2018.8.12.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마가복음2:1-12)
[성경본문] 마가복음2:1-12개역개정
1.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2.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3.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4.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5.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6.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7.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8.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9.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10.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11.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12.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제공: 대한성서공회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마가복음2:1-12/2018.8.12.오전)
1. 요한복음 5장에 보면, 베데스다라고 하는 연못이 나옵니다. 이곳에는 많은 병자들이 모여들었는데, 이유는 가끔 천사가 내려와서 이곳의 물을 솟구치게 하면, 그 때는 어떤 병자라도 제일 먼저 물에 들어가면 질병이 치료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는 둘도 없는 기회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환자가 나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온갖 질병에 걸린 사람들이 원근 각처에서 찾아와 물이 솟구치기를 기다렸다가, 제일 먼저 들어가서 치료받기를 기다리기 때문에, 내가 치료받으려면 이 모든 사람들 보다 먼저 들어가야 합니다.
베데스다의 의미는 자비의 집, 혹은 은혜의 집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이런 현실을 놓고 보면, 이곳은 자비의 집도, 은혜의 집도 아닌 그야말로 치열한 경쟁만이 있는 살벌한 곳입니다.
이러한 경쟁사회는 건강한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병들고 버림받고 고통 하는 사람들 사이에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물에 들어가 치료받는 사람에게는 이곳이 과연 자비의 집이요,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곳일지라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 때마다 낙심과 고통을 더하는 시간이 될 뿐입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이미 38년 동안 질병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는데, 자신의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래도 소망을 가지고 이곳 베데스다에 찾아왔지만, 물이 솟구칠 때 마다 자기를 도와 물에 넣어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는 그 때 마다 이곳에서 절망하고 고통하면서 많은 세월을 보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말씀 한 마디에 그를 치료해 주셨습니다(요5:8-9).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삶의 대열에서 낙오하면서 더 큰 상처와 두려움과 절망으로 무너지고 있는 그런 우리의 삶의 현장에 주님이 찾아오셨고, 우리 스스로가 해결할 수 없는 그런 인생의 문제를 주님이 해결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2.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은 병자가 예수님을 찾아가는 모습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본인은 중풍 병을 앓고 있기 때문에 다른 네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든 사람들이 입추의 여지도 없이 바깥 까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건강한 사람도 예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는데, 중풍병자를 침상채로 매고 어떻게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차라리 말씀이 끝나고 사람들이 흩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병자를 메고 온 사람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행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집 위로 올라가서 지붕을 뚫고 그곳으로 병자를 침상 채로 달아 내렸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들의 이런 행동을 통해 감동을 받을 수 있고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핵심은 중풍병자를 치료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데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많은 경우에 본질을 놓치고 엉뚱한 곳에 우리 인생을 낭비할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황금 알을 낳는 오리의 배를 가르면 한꺼번에 더 많은 황금 알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 막상 오리의 배를 갈랐지만 그곳에는 원하는 황금 알이 없었습니다.
그냥 두었더라면 매일 황금 알을 얻을 수 있었을 텐데 욕심이 문제였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네 사람의 헌신적인 수고를 통해 중풍병자가 병에서 놓여 건강을 얻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중풍병자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3. 본문 5절에,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병이 치료되는 경우는 베데스다 못에서 38년 된 병자를 치료할 때처럼,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요5:8)고 하면 됩니다. 그런데 중풍병자에게는,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더구나 죄를 용서한다는 이런 말은 유대 사회에서 매우 심각한 문제를 일으킵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죄를 용서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인데, 사람이 그런 죄를 용서한다고 선언하는 것은 신성모독죄요 인간으로서 감히 할 수 없는 말이기 때문에 당연히 종교지도자들의 공격을 받을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예수님은 이단이고 율법에 따라 벌을 받아야 합니다.
이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주님이신데도 불구하고, 그는 모든 사람들이 듣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 그 분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걸으라고 말하지 않고 죄 사함을 받았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것은, 죄를 사하는 이러한 예수님의 권세가 어디를 통해서 나타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중풍병자를 데리고 예수님 앞으로 달아 내린 이 사람들의 믿음을 통해 나타났습니다.
4. 본문 5절에 보면,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 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람들을 볼 때, 무엇을 보며 무엇을 중요시합니까?
그 사람의 외모입니까? 가진 소유입니까? 인격입니까? 사회적인 지위나 힘입니까?
예수님이 보시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나의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가 믿음을 강조 하는데, 과연 그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과, 인생의 어떤 문제라도 능히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과, 자신의 생명을 대신할 정도로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신 것을 믿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산다는 것은 정말 치열하고 고통스럽고 1%도 안 되는 승자독식의 세계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에게 하나님 중심의 믿음이 있으면, 환란 가운데서도 건짐을 받을 것이고, 믿음의 조상들처럼 말씀에 순종하면, 다윗처럼 하나님을 의지하여 승리할 것이나, 믿음이 없으면, 가롯유다 처럼 이리 저리 고민하다가 영원한 패배자가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을 보면, 믿음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병자가 치료받고 죄 사함을 얻어서 온전한 축복의 사람으로 변화가 되면, 제일 기뻐해야 할 사람은 서기관들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그것을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종교지도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학자 에스라의 경우도 서기관 출신으로 이스라엘의 영적 부흥을 일으킨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행하는 이 선하고 아름다운 일을 두고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본문에서는 신성 모독죄로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을 사랑과 은혜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율법으로 정죄 받아야 할 대상으로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5. 그렇다면 우리는 세상이나 사람들을 볼 때 어떤 관점으로 보고 있습니까?
그들을 매사에 나의 경쟁 상대로만 보고 있습니까? 내 속을 뒤집는 원수로 보고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세상을 볼 때, 우리가 어떤 관점으로 보는가에 따라 세상은 달라집니다.
비관적으로 보는 사람은 늘 비판적이고 우울하고 소망 없는 인생으로 살아가지만,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상을 보기에 아름답고 복이 있는 좋은 세상으로 보면 내 마음도 소망이 넘치고 아름다워질 것이고, 우리가 이 세상을 하나님께 받은 복음의 사명의 현장으로 볼 때에는, 구원을 이루는 십자가의 복음으로 우리의 심령이 불타오를 것입니다.
그런데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은혜받기 보다는 그가 어떤 말을 하는지, 어떤 실수를 하는지 책잡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중풍병자를 메고 온 이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이 주목하실 만한 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 불쌍한 병자라도 예수님께로 가면, 예수님을 만나면 인생이 새로워질 줄 믿었기 때문에 그 믿음의 힘으로 어려운 난관을 뚫고 예수님 앞으로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 어떻게 보고 있는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하루하루 바쁘게 시간에 쫓겨서 살다보면 남이 나를 어떻게 보고 있으며 나라고 하는 존재를 어떻게 판단하고 있는지 그런 것 생각할 여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평소에 사용하지 않던 모자를 쓰거나 유명 메이커 가방을 들고 외출을 하고, 선글라스를 끼거나, 눈에 두드러질 정도로 옷을 화려하게 입었다면 당연히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 신경이 쓰이기 마련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6. 내가 말은 많고 그럴듯하게 사람들을 설득한다고 해도, 남들에게 모범이 안 된다면 사람들은 우리를 이중인격자나 가짜로 볼 것입니다.
남들에게 말만 하고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우리를 따라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하는 대신에 먼저 행동하고, 남들보다 앞서 모범을 보인다면, 사람들은 우리를 믿고 따라 올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온갖 말을 가지고 평가하고 비난하고 공격했습니다.
믿고 따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그를 이단이나 귀신들린 자로 몰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권력의 욕심에 눈이 어두운 사람처럼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십자가를 지실 때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하였습니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그 분을 향하여 조롱을 퍼 부었지만, 일부의 사람들은 자신의 가슴을 치면서 애통하였고, 마지막 십자가의 죽음을 보고는 로마 백부장은 고백하기를 그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많은 사람들의 비난하던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온 인류를 향한 생명까지 희생하시는 그 분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도 자신을 향해 여전히 야유와 조롱과 비난을 쏟아내던 그 사람들을 위해서도 자신의 생명을 대신 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7. 우리는 지금 주님의 몸된 교회를 내 몸처럼 사랑하고 있습니까?
성도들을 사랑으로 섬기고 불쌍히 여기고 있습니까?
목회자의 수고를 알아주고 존경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사람들의 눈만 속이려고 하고 있습니까?
지금 이 시간에 우리 주님이 보시는 것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있어야 마귀의 유혹도 물리칠 수 있고, 믿음이 있어야 고난 속에서도 은혜의 삶을 살 수 있으며, 믿음이 있어야 장차 천국에도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2:17절에 보니,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러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 다고 하셨습니다.
영적으로 병들고 저주 받은 인생을 말씀으로 고치시고 그들을 찾아 구원하여 하나님 자녀로 삼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잘난 인생이라도 믿음이 없으면, 이런 예수님을 눈앞에 두고서도 서기관들처럼 정죄하고 비난하고 공격하여 넘어뜨리려고만 할 것입니다.
혹시 우리의 죄 짐이 어느 정도이며 그 무게가 얼마나 될 것인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시골에 가면 볼 수 있는 지게 하나에 다 실을 수 있는 크기입니까?
지게의 끈이 팽팽할 정도의 무게라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우리가 몰고 다시는 자동차에 다 실을 만한 것입니까?
8. 인생의 근본 문제는 전부 우리 안에 있는 죄에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인생 자체가 죄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선한 일 보다는 악한 일을 더 좋아하고, 의롭고 거룩한 일에 희생하기 보다는 육신의 쾌락과 잠시잠간의 기쁨을 누리는 것을 더 좋아하는 인생입니다.
그러나 죄 지은 인생으로부터 받는 고통과 저주는 우리가 견딜만한 그런 수준이 아닙니다.
인생의 힘으로 감당할 만한 그런 무게가 아닙니다.
조상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모든 사람들의 죄와 함께 우리 스스로가 범하고 있는 자범죄에 이르기 까지 그 죄 짐은 온 지구를 덮고도 남을 만큼 큰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 힘으로 해결 할 수 없는 이 모든 죗값을 치러 영원한 행복자요 승리자가 되도록,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10절에 보면 에수님의 분명한 선언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면서, 그 때서야 11절에 보니,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은, 이 중풍병자가 죄를 용서받아서 놀란 것이 아니라, 중풍병자가 치료되었다는 사실에 놀라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중풍이 치료되는 것도 기적이고 큰 능력이지만, 더 중요한 사실은 이 사람의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로 사함을 얻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합니다.
9. 인간의 육신은 의식주 문제로 행복과 불행이 갈리지만, 우리의 심령은 용서 받아야 평안하고, 용서를 받아야 자유함을 누리고 마음도 가벼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안에 죄 문제가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로 해결되고, 십자가의 보혈로 씻음 받을 때, 감사가 있고 기쁨이 넘치고 찬양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는 죄를 사하는 권세입니다.
이 권세는 누구도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오직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자기의 생명을 대신 내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소유한 권세입니다.
죄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는 이 권세를 힘입어 우리는 세상 한 가운데로 들어가서, 지금도 병들고 죄 짐에 눌려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복음으로 치료하고 구원하는 생명의 역사가 우리 교회를 중심으로 온 일본 땅에 풍성해지기를 소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