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5.은혜 입은 자의 삶(창세기6:1-8)

[성경본문] 창세기6:1-8개역개정

1.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2.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3.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4.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5.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7.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8.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은혜 입은 자의 삶(창세기6:1-8/2014.1.5.오전)
1. 오늘 본문 1절 이하를 보면 노아의 홍수 직전의 시대가 어떤 상황에 있었는지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노아의 홍수가 대략 기원전 2,400년 이니, 지금부터 약 4,400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놀랄만한 사실은 그 때나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나 사람들이 살고 생각하는 모습이 많이 닮았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이 첫 번째로 추구하는 것이 아름다움이었습니다(2).
본문에서 사용된 아름다움이란 단어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그것을 만드시고 난 후에 "보시기에 좋았더라" 는 좋다는 단어와 동일한 히브리어 「토브」를 사용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름답다, 놀랍다, 완벽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아름다운 것에 끌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경치에 감탄하고, 잘 만들어진 물건에 예술적 가치를 부여하고, 남녀의 미모나 완벽한 몸매를 부러워하고, 보기에 아름답고 맛있는 음식에 찬사를 보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름답고 완벽한 것에 관심을 가지거나 감탄하는 것은 그것을 부러워하고 소유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2. 문제는 이런 아름다움을 소유하고자 하는 인간적인 본능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들로 불리는 셋의 경건한 자손들도 세상의 아름다운 여자들의 모습에 빠지고 말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앞 다투어 아름다운 여자들을 주목하고 그들을 자신들의 아내로 삼으려 했습니다.
그 사실이 2절의 "보고" 라는 단어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기서 본다는 말은 단순하게 보는 행동을 넘어 자세히 주목하고 관찰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그들을 자기 아내로 삼았다는 이 말은 아름다운 것을 사유화 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가장 적합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 여자들의 외모에 현혹이 된 것입니다.
이러니 세상 사람들이야 더 말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아름다운 외모가 지상 최고의 선이 되고 말았습니다.
얼마 전부터 이웃 나라들이 한국을 가리켜 성형천국이라고 비웃고 있지만, 외모를 지상주의로 생각하는 것은 전 세계 어디나 동일한 현상입니다.
그래서 다른 것은 다 용서가 되어도 못 생긴 것은 용서할 수 없다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왜 사람들이 외모의 아름다움 모습에 열광합니까?
인간 심연에 자리 잡고 있는 죄의 본성이 가지고 있는 쾌락을 만족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절의 "자기들이 좋아하는" 이 말은 쾌락에 만족한다는 의미입니다.
그 때 사람들이나 지금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죽기까지 육체의 쾌락을 즐기는 것입니다.

3. 그런데 하나님은 이러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리는 셋 자손들의 행동을 보시고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들을 멸망시키고 인간의 수명도 120년으로 줄이겠다는 말씀입니다.
무엇이 문제이며 무엇이 잘못된 것입니까?
원래 아름다움이란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외적인 것은 인체의 오감으로(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확인할 수 있는 아름다운 것을 말하고, 내적인 것은 생각이나 심령으로, 가슴으로 느끼는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부드럽고 따뜻한 마음이나 상대방에게 신뢰감을 줄 수 있고, 지성적이고 교양이 있으며 여자라면 애교가 있는 것도 내적인 미에 해당합니다.
이런 것은 눈으로 확인하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만남과 대화를 통해서, 어떤 일을 함께 하면서 느낄 수 있는 것들입니다.
문제는 내적인 아름다움은 간 곳이 없고 오로지 눈으로 보고 만족하는 그것을 인생의 전부로 여긴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먹어서는 안될 선악과를 먹은 것도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창3:6)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타락과 사회적인 부패가 눈으로 보는 것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 책망하기를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너희는 외모만 보는다도"(고후10:7) 고 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가 문제에 빠진 것입니다.
이런 것은 하나님의 자손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4. 하나님의 자녀들이 행하는 이런 외모의 아름다움을 지상주의로 삼는 행동이 일시적인 유행이 아니라 오랜 세월을 거쳐 계속 증가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4절에 보면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 다고 했습니다.
남들보다 더 아름답고 더 완벽한 미모의 여인을 자신의 아내로 삼고, 남들이 소유하기 어려운 더 아름답고 귀한 물건을 제 소유로 삼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절대적인 권력이 있던지, 절대적인 부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4-15) 바로 이것입니다.
결국에는 5절의 말씀대로 죄악이 세상에 관영하였고, 모든 사람들의 생각이 처음부터 끝까지 악으로 가득하게 되었고, 그 결과 하나님이 처음으로 사람 지으신 것을 한탄하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한탄하신다는 말은 죄악으로 가득찬 인간을 보시고 슬퍼하다, 불쌍히 여기셨다는 의미입니다.
지금 우리들의 심각한 문제는 자녀들을 기도와 말씀으로 키워놓고 장성하면 불신앙인들과 결혼을 시키는 것입니다.
겉으로 나타나는 문제는 결혼 대상의 그리스도인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선교사들은 자녀를 불신앙인과 결혼시킨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는데, 아유는 돈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고무신도 짝이 있고 젓가락도 짝이 있고 가위도 양날이 있는데 왜 하나님의 자녀에게 짝이 없습니까?
짝이 없는 것이 아니라 문제는 욕심 때문입니다.
우리의 욕심이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이라도 아름다우면, 돈이 많으면, 능력이 뛰어나면 그것을 결혼이라는 수단을 통해 제 소유로 삼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욕심이 우리와 우리의 자녀를 알게 모르게 하나님 떠나게 만드는 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5. 그러나 본문 마지막 절에 가면, 외모 지상주의의 절망적인 세상의 모습과 우리의 연약한 모습에서 큰 소망과 위로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는 이 말씀입니다.
그리고 9절 이하에서 노아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자세히 밝히고 있습니다.
노아가 살았던 시대적인 환경과 조건은 신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최악의 시대였습니다.
세상 돌아가고 있는 모습에 하나님이 너무도 실망하셨고, 죄악과 쾌락으로 인해 썩어 문드러진 세상 가운데서 인생을 보시고 슬퍼하실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아의 삶의 모습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그 은혜에 힘입어 살았습니다.
사람들은 환경과 조건을 따지고 탓하면서 자신의 잘못된 행동과 생각들을 합리화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죄악이 관영한 세상에서 살면서도 세상의 관습이나 유행이나 가치관을 따르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섬기고 그 분이 베푸시는 은혜에 만족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의롭게 정직하게 살기가 너무 힘든 시대였습니다.
신앙을 소유하고 믿음을 지킨다는 것 자체가 기적과 같은 시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아는 가문의 전통이나 평생 모은 재산이나,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그런 것들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지켰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어도 하나님은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6. 노아가 어떤 사람입니까?
9절에 보니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 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존재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은혜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기도의 응답과 성도의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도의 능력이 무엇입니까?
어떤 환경과 조건 속에서도 하나님 중심의 바른 신앙을 지키는 것입니다.
연꽃이 피어 있는 연못에 가보면 특징이 그 연못에 고인 물이 더러운 것입니다.
더러운 물속에 있는 고기는 아무도 먹지 않습니다.
그런데 더러운 물 한 가운데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연뿌리는 왜 사람들이 먹고 좋아합니까?
연꽃은 더러운 물속에서도 그 물을 마시지 않고, 하늘에서 내리는 이슬로 연명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아름다움을 지키면서 반드시 아름다운 꽃과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최고의 꽃으로 치는 것입니다.
성도의 능력이란 세상의 유행이나 관습이나 가치관을 따라가지 않아도 하나님의 은혜 하나로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입니까?

7. 사람들은 노아가 하나님 앞에 은혜를 입을 수 있었던 것은 9절의 말씀을 연결하여 의인이고 완전한 자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만한 인간적인 노력이나 하나님을 향한 어떤 특별한 공로가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8절의 "은혜" 라는 단어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단어 자체만으로 보면 은혜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호의와 자비를 베푸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진노를 받아 심판 받을 인생에게 도리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베푸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스럽지 못한 사람을 사랑스럽게 보는 것을 말합니다.
결코 용서 받지 못할 사람이 용서받고 그 위에 선물까지 받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입니까?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고, 우리의 죗값을 대신하여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하심으로, 모든 죄와 허물이 사하여질 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자녀로 삼아 주신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였더니"(갈4:8),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대신에 십자가에 못 박을 때, 우리는 하나님도 알지 못했습니다.
마귀에게 사로잡혀서 우리가 원하지도 않는 일에 끌려가서 소망도 없이 죄에게 종노릇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런 우리를 만세전부터 죄 가운데서 구원하시기를 계획하셨다가 때가 되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하시고 자녀 삼아 주신 것입니다.
죄와는 상관이 없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살게 하시고, 영적인 만나로 우리의 심령으로 만족하며 천국 갈 때 까지 복되고 의로운 길을 걷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8. 그러므로 노아가 아무리 정직하게 살려고 하고 그 당시의 사람들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을지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똑같은 죄인이요 홍수로 심판받을 수밖에 없는 마땅한 죄인임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노아가 그 당시의 사람들과 다른 것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 다는 이것입니다.
노아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이것 이외에 우리는 다른 말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에 노아는 그 시대의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았고, 신앙을 지키기 어려운 그런 시대에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노아 이외의 세상은 외모의 아름다움에 빠지고, 아름다움이 세상의 가치관을 지배하고 있을 때, 노아는 오직 하나님의 베푸시는 은혜로 살았습니다.
우리가 차선책으로 불신자를 예수 믿기로 하고 자녀를 결혼시키는 경우가 있지만, 근본적으로 성경에서 불신자와의 결혼을 금지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결국은 도덕적인 타락이 우상숭배까지 가기 때문입니다.
도덕적인 타락은 단순한 세상의 일부분이 아니라, 문화가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고 그래서 삶의 방식과 모습이 다른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항상 머물러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곳에 어떻게 우리 사랑하는 자녀들을 보낼 수가 있습니까?
    
9. 이 시대의 사람들도 외모를 보고 사람을 선택하고, 가지고 있는 소유와 능력을 보고 선택하고 있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겉모습이 아니라 중심에 모시고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우리의 중심을 보신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가치관과 신앙을 어디에 세워야 하겠습니까?
성령님이 와 계시는 우리의 중심, 심령에 세워야 할 것입니다.
외모가 아름다운 사람보다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앙을 더 아름답게 보아야 할 것이고, 가진 소유와 능력을 자랑하기 보다는 믿음으로 사는 자를 귀하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
새해가 시작되니 사람들은 여러 가지의 새로운 계획과 희망에 가득차 있지만, 우리는 교회와 우리의 신앙을 세속화시키려는 이 시대의 강력한 도전이 더욱 치열해지는 시대로 봐야 합니다.
돈을 더 많이 벌고 더 편하고 더 아름다워지는 것도 인생에 중요한 일이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이 열심을 내어야 할 일은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선포하며 산에 올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방주를 짓고 구원을 준비하던 노아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과 직분과 능력들을 동원하여 이 시대를 구원하는 복음을 위해 사용한다면, 하나님은 이 시대에 우리와 우리의 자녀들이 가는 길을 인도하시고 도우시고 축복하시는 줄 믿습니다.

올 한 해도 세상과 타협하지 아니하고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지키는 우리에게, 영적인 아름다움으로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이기게 하시는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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