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6.3.마음이 문제입니다(마태복음 13:1-23)
[성경본문] 마태복음13:1-23개역개정
1.그 날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2.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서 있더니
3.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4.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5.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7.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8.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9.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10.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11.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12.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13.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14.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5.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16.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17.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18.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19.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
20.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21.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22.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23.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마음이 문제입니다(마태복음 13:1-23/2012.6.3.오전)
1. 우리가 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을 통해서 사람의 마음에 관한 것들을 배웠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로 시작하면서 우리 마음의 문제들을 다루었습니다.
가난하다는 의미는 마음을 비운다는 것이고,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들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절대 무능에 대한 인식입니다.
이 무력함 속에서 성령님을 더욱 의지하게 되고, 자신의 비움을 통해 주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복이 있」다는 사실을 통해 주님은 나타나는 외형적인 것보다는 사람의 마음을 더 강조하고 주목하고 계심을 알 수 있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에게 자주 책망을 듣던 바리새인, 서기관 같은 종교지도자들이 행위에 있어서 우리보다 얼마나 더 경건하고 신실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에 대하여 그들이 얼마나 철저하며 얼마나 정확합니까?
우리가 도무지 따라가기 어려운 그런 행위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책망 받게 된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마음이 문제였습니다.
마음은 인격의 중심이고 감정과 지성의 중심이고 그래서 기독교의 복음은 마음에서 시작하는 것인데, 실상은 그들의 마음은 부패와 타락의 온상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렘17:9)고 했습니다.
모든 문제 거리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고 고통을 주는 문제의 원인은 바로 사람의 마음에 있습니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한 자, 마음이 청결한 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해를 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더럽고 마음이 부패하니 그래서 마음을 깨끗이 하려고 우리 스스로가 노력한다고 하면 우리는 더 불쌍한 존재가 되고 스스로에게 더 큰 실망을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은 오직 하나님만이 깨끗하게 하실 수 있으며, 우리의 심령을 하나님만이 예수님을 닮도록 만드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오늘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해 예수님이 강조하시는 것은 씨 뿌리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입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마음으로 깨닫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씨 뿌리는 자와 함께 4종류의 밭이 나오고 있습니다.
길가와 돌밭과 가시나무가 자란 곳과 그리고 좋은 땅 옥토가 나옵니다.
씨는 복음을 말하고 씨를 뿌리는 자는 예수님이나 혹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 자신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뿌린 씨를 받는 밭이라고 하는 사람의 마음이 문제입니다.
「길가」라고 표현된 곳은 처음부터 복음이 들어갈 만한 여지가 전연 없는 상태의 마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마음에는 고집과 독선과 교만으로 가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것만으로도 주위 사람들을 피곤하고 고통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합니다.
그런데 더 답답한 것은 영생과 진리의 말씀에 대하여 깨달음이 전혀 없으며, 관심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흔히 부인은 믿고 남편은 믿지 않을 때 많이 나타나는 현상인데, 부인이 믿는 기독교를 따라 오지는 않아도 어느 정도 수긍하고 인정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아예 부인의 기독교 신앙을 처음부터 무시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옛날 아버지들은 집에서 제왕처럼 군림하다 보니 자기 아내를 무시하고 그 신앙도 무시하고 때로는 신앙을 박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깟 것이 무엇을 알겠느냐는 것입니다.
어리석게 종교라는 아편에 빠져 헛일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영혼의 문제 이전에 그 사람의 마음의 문제고 인격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으면 아내의 신앙에 관심을 가지고 존중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3. 「길가」와 같은 마음의 상태를 가진 사람들은 우리 주위에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스스로를 지혜롭다고 생각하지만, 본문에서는 이 사람들이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인가를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4절에 보니 「뿌릴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고 했습니다.
축복의 씨가 생명의 씨가 제 인생에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씨가 제대로 자라면 30, 60, 100배의 결실을 얻는 것도 알지 못하고 방치해 둠으로 결국에는 새들이 와서 제 마음대로 먹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농부가 봄을 기다리면서 예비해 두었던 종자를 제 마음대로 먹어버린 꼴입니다.
이것은 마치 에서가 허기를 이기지 못해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팥죽 한 그릇에 팔아먹고 만 꼴입니다.
그 장자의 명분이 얼마나 귀한 것이며, 하나님이 그 장자의 명분에 내리실 엄청난 축복을 알았더라면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에서는 그것을 지켰을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과 진리와 영생에 관해서 깨달음도 없고 관심도 없었기에 귀중한 생명의 씨앗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에 「돌밭」으로 표현된 마음이 있습니다.
이것은 신앙의 뿌리가 없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복음을 듣고 기뻐하여 즉시 믿음은 생겼지만 뿌리가 깊지 못함으로 얼마 가지 못해서 넘어지는 신앙입니다.
시험과 핍박으로 열매 맺지 못하는 신앙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4. 그 다음에 「가시떨기」 나무가 자라는 땅으로 표현된 마음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사실 하나는 가시나무가 잘 자라고 있으니 이곳은 옥토임에는 틀림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가시나무만 없으면 떨어진 씨앗이 얼마든지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한 곳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복되고 좋은 마음을 가진 것입니다.
문제는 가시나무가 자라나는 곡식을 방해함으로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 「기운을 막았」다는 것은 숨통을 죄어버린 상태를 말합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일반적인 은총에 풍성함을 누리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좋은 환경과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세상의 유혹과 물질에 대한 근심, 부귀영화에 대한 헛된 꿈이나 세상 염려로 인해서, 그가 소유한 축복들이 전연 신앙생활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자신이 하나님의 일반은총의 축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감사 대신에 불평하고, 헌신하는 대신에 세상일에 매달려 고생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돈 걱정하면 온전한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도바울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찔렀」(딤전6:10)다고 했습니다.
돈 걱정 하는 대신에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고 했기 때문입니다.
재물과 부귀는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셔야 잘 먹고 잘 살고, 하나님이 도와 주셔야 주신 사명을 위해 풍성한 재물로 섬길 수 있는 줄 믿습니다.
5. 본문을 자세히 보면 길가나 돌밭이나 가시나무나 한결같은 특징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빼앗거나 방해하는 세력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생명의 씨앗을 먹어버린 새나 성장을 방해하는 돌멩이들이나 가시는 전부 사단의 역사입니다.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13)하게 하는 것입니다.
전도해 보면 알 수 있는 것처럼 누구나 복음을 듣고 믿음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이유는 비유의 이중성에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비유라는 말이 본문에서 처음 등장하고 있으며, 예수님은 8개의 비유를 가지고 천국 복음을 설교하셨습니다.
그런데 비유를 통해 나타나는 분명한 사실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구별하는 일과 대조하는 일입니다.
이 사실이 49절 이하에 가서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비유의 이중성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천국의 복음을 더욱 명확하게 깨달아 믿음이 더욱 성장하도록 하고, 영적 이방인들에게는 천국의 복음이 비밀이 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메시지를 듣고도 반응과 결과가 전연 다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문제는 마음에 있습니다.
완악하고 교만한 마음으로는 설교를 비판할 수는 있어도 깨달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에는 은혜가 임하는 줄 믿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사도바울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고 했습니다.
똑같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들에게는 구원을 이루는 능력이지만, 영적 이방인들에게는 걸려 넘어지는 멸망의 도구라는 것입니다.
6.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지만, 악의 세력에 오염되어 교만한 마음 완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스스로 예수님의 가르침에 설득 당하는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그 사실을 유대인들의 예수님에 대한 태도에서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수많은 증거를 받고서도 그 사실을 애써 거부하였고, 그분의 능력조차 바알세불의 힘을 입었다고 말하듯이, 이 사람들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그의 백성이 되는 것을 염려해서 스스로의 마음 문을 닫아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15절의 「마음이 완악하여 져서」라는 이 말은 간단히 말해서 영적 감수성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듣기는 들어도 처음부터 들으려는 자세가 전연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강제로 자신들의 눈을 감고 있는 것입니다.
이유는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 사랑보다는 세상을 더 사랑하고, 진리보다는 육체의 쾌락을 더 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 뿐 만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에게 경각심을 주는 말씀이 또 있습니다.
본문 12절을 보면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고 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자본주의의 원리를 적용한 내용으로서 소유한 자는 소유한 것으로 인해서 더 많아지고, 없는 자는 있는 것 마저 빼앗기고 만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말씀을 깨닫고 은혜 받은 사람은 점점 더 큰 은혜의 세계로 더 큰 믿음의 세계로 나아가지만, 깨닫지 못하는 자는 점점 영적 세계가 좁아져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은 갈수록 말씀과 성령으로 지혜로운 사람이 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세상 한가운데서 교만하고 완악한 채로 점점 바보가 되어갈 뿐입니다.
7. 본문 8절의 말씀을 보면 복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고 하면서 16절에 보면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신약시대에 태어난 우리들이 구약의 선지자들과 믿음의 영웅들이 장차 오실 메시아를 간절히 사모하면서도 예수님의 제자들과 오늘날의 우리들처럼 영적인 특권을 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 만나 믿고 구원받은 것이 가장 큰 축복인 줄 믿습니다.
신약시대, 은혜의 시대에 태어나서 성령님을 모시고 살면서 천국 복음을 깨닫고 은혜 받는 것이 큰 복인 줄 믿습니다.
본문이 말씀하시는 중요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마음입니다. 마음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황폐한 자는 영적 소경이요 영적 귀머거리요 영적 불구자입니다.
말씀을 깨달을 수도, 순종할 수도,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마음이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복된 마음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의 상태에 따라 30배도, 60배도, 100배의 열매도 맺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예배 시간을 통해서 이미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주의 은혜를 사모하기에 갈급한 마음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기독교는 마음의 종교입니다.
예수님을 영접 할 때에도 마음으로 영접하였으며, 성령님도 내 마음에 모시고, 하나님도 우리의 중심인 마음을 보신다고 했습니다.
오늘 모인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마치 다윗을 향하여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행13:22)하심같이, 우리에게도 이 같은 복 된 마음을 가지도록 베푸신 은혜와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