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8.14.좁은 문(마태복음 7:13-14)
[성경본문] 마태복음7:13-14개역개정
13.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좁은 문(마태복음 7:13-14/2011.8.14.오전)
1. 「좁은문」 하면 노벨상 수상자인 앙드레 지드의 작품이 생각납니다.
주인공 제롬은 여름마다 휴가를 시골 삼촌집에서 보내면서 사촌인 알리사를 사랑하게 되고, 두 사람은 그 동네 교회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목사님의 설교에 감동을 받게 됩니다.
숙모가 젊은 남자와 눈이 맞아 두 딸을 버리고 가출해 버리자 제롬은 불쌍한 알리사를 위해 평생 헌신하기로 작정하고 그것이 자신에게 있어서 들어가야 할 좁은 문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알라사는 동생인 줄리엣도 제롬을 사랑하는 것을 알게 되자, 동생을 위해 제롬을 포기하고 자신은 더욱 깊은 신앙의 세계로 들어가 오직 주님만 사랑하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실제로 알리사는 제롬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랑을 거부하고 달아나는데, 한편 줄리엣은 제롬에게는 언니 알리사 이외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없음을 깨닫고 마음에도 없는 사람과 불행한 결혼을 하고 맙니다.
알리사의 신앙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제롬의 사랑과 주님에 대한 헌신 사이에서 오는 갈등을 통해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그녀는 주님께로 나아가는 이 좁은 길을 둘이서 함께 갈 수 없음을 알게 되고, 진정한 사랑의 완성이란 오직 주님의 품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임을 깨닫고 결국에는 자신의 순결함을 지키기 위해 세상을 버리게 됩니다.
앙드레 지이드의 이 「좁은문」 은 읽는 사람에 따라 각각 다른 다양한 결과와 감동을 얻을 수 있는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사실 주님의 산상수훈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로부터 시작되어진 이 가르침의 결론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이론이나 탁상공론이 아니라 우리 삶의 실제입니다.
성경말씀은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에게 이 세상을 지나면서 이렇게 살라고 가르치고 명령하시는 삶의 실제입니다.
특히 이 산상수훈의 말씀은 매우 실제적이고 구체적이고 명확한 말씀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악한 자를 대적치 말고,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고 하며, 억지로 오리를 동행하게 하거든 십리를 함께 가라는 것과 구하는 자에게 주고 빌리고자 하는 자를 거절하지 말라는 등의 구체적인 말씀들입니다.
그렇다면 21세기의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좁은 문」이란 무엇입니까?
어떻게 살아야만 주님의 가르침대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는 삶이 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해야만 좁은 길로 나아가는 참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까?
우리가 만일 말씀을 듣기만 한다면 이 생명의 말씀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누가복음13:24절에 보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냥 시험 삼아 한두 번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계속해서 힘쓰고 노력하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좁은문」의 여주인공 알리사가 추구한대로 참된 구원과 행복은 좁은 문 저 너머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만나는 「좁은 문」의 좁다는 의미는 매우 제한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듣는 사람의 마음을 답답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들어가야 할 그 문이 너무 좁아서 많은 짐을 지고서는 들어갈 수 없음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소유에 있어서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3. 지난 주간에 영국의 곳곳에서 일어난 폭동에서, 그 폭동에 가담한 사람들이 남의 가게나 공장에 들어가서 많은 물건들을 훔쳐다가 자기 집에 두었습니다.
그들은 폭동을 구실로 더 많은 물건들을 훔쳐 자신의 소유들을 늘리려고 했습니다.
그들의 일으킨 폭동의 구실이 무엇입니까?
흑인 청년 한 사람이 경찰에게 사살되었다는 사실에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의 주식이 폭락하고 금값이 천정부지로 상승하고, 일본의 엔화가 천장을 뚫을 정도로 상승하고 있는데 이 모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지구촌 사람들의 소유욕에 있습니다.
개인이나 회사나 정부나 심지어 교회들조차 막대한 빚을 끌어다가 성공과 행복의 거품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한동안은 빚을 갚기 위해 새로운 빚을 져야 했지만 이제는 너나 할 것 없이 빚을 값을 능력조차 탕진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입니다.
왜 이런 결과를 가져왔다고 생각합니까?
1960년대의 대한민국은 참으로 가난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도 잘 살아보자고 선택한 것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경제부흥을 위한 좁은 길, 험한 길이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쌀을 많이 깎아 내면 맞은 있지만 영양분이나 수량이 줄어들기 때문에 대통령의 명령으로 많이 깍지 못하게 했고, 일회용 젓가락 사용도 금지했습니다.
새마을 운동도 했습니다. 대기업들에게 많은 혜택을 준만큼 서민은 어려웠습니다.
이 모든 것이 힘들고 불편했지만 오늘의 우리 대한민국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사람들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싫어합니다.
저마다 넓은 길로 가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손바닥만 한 국토가 황폐화되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국토 보다 먼저 사람들의 마음이 오염되고 황폐화되고 말았습니다.
「좁은 문」이란 신앙 세계만의 해결책이 아닙니다.
국가도 개인도 회사도 가정도 좁은 문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미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4. 좁다는 것은 또한 많은 사람들이 함께 갈 수도 없는 길임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소속된 사회에서 어떻게 처신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보다 더 많은 사람들과 더 많은 관계를 맺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만나고 방문하고 그들과 돈독하고 친밀한 관계를 맺는데 많은 시간과 물질과 정력을 소모하면서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더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위해 페이스 북이나 트위트 같은 것을 통해 거미줄 같은 네트웍을 형성해서 유대관계를 쌓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늘 소수에게 집중하셨고, 약하고 불쌍한 자들에게 가까이 가셨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 실상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피라미드를 쌓아 올린 파라오에게는 많은 노예가 필요할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많은 인간관계가 필요 없습니다.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관계는 주님과 나 사이의 관계이며, 주님이 내게 맡겨 주신 소수의 사람들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지난 주간에 혼자서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제가 70년대 신학교 다닐 때 이 엠 바운즈의 「기도의 능력」을 3독하면서 많은 은혜를 받았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다 잊어버렸습니다.
지난 주간에 책장 사이에서 숨어 있던 이 책을 꺼내어 다시 읽었습니다.
그 가운데, 십자가에 못 박힌 설교만이 진정한 생명을 줄 수 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설교는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에게서만 나올 수 있다는 말씀에 가서 제 가슴에 못이 박혔습니다.
스승의 가르침에 십자가가 없는 설교는 설교가 아니라는 말씀에 늘 십자가를 생각하고 설교 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설교를 많이 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여태껏 제 설교는 전부 불량품이란 사실입니다.
왜냐면, 내 자신이 아직 십자가에 온전히 못 박히지 못했는데, 그렇다면 내게서 나온 이 설교들은 무엇이란 말입니까? 전부 엉터리였던 것입니다.
영혼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죽이는 설교가 이 세상에 가득합니다.
무엇이 영혼을 죽이는 설교입니까?
설교자 제자신은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아니하고서 십자가를 말하는 설교입니다.
그러나 이제라도 이런 사실을 깨닫게 되었으니, 그래서 우리는 사람 만나는 시간보다 주님을 먼저 만나고, 주님 만나는 시간을 더 많이 사용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좁은 문이요 좁은 관계가 아니겠습니까?
5. 또한 좁은 문과 길이 협착하다는 것은 제한이 많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세상사는 삶의 환경이 얼마나 불편하고 고통스러운지 알려 주는 내용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것이라 말씀하셨고, 세상에서 너희가 환란을 당할 것이라 말씀하셨고, 산상수훈 처음 부분에서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마5:11)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믿는 자가 선택한 좁은 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선택한 본문은 매우 짧은 두 구절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 내용이나 가치에 있어서는 매우 심오하고 엄청난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문을 통해서 주목해야만 할 내용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바로 이 좁은 문, 좁은 길로 가셨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이 가신 길은 십자가의 길이었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길이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두 가지의 문과 두 가지의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과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 그리고 멸망에 이르는 길과 생명에 이르는 길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의 선택할 수 있는 문이 있지만, 나는 너희에게 반드시 좁은 문을 선택하기 원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는 주님 스스로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셨고 그 좁은 문으로 들어 가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사건이 있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의 주님의 모습에서 그분이 선택하셨던 이 좁은 문, 십자가의 길이 얼마나 험하고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기록하기를,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히5:7)다고 하셨으며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 온전하게 되었」(8-9)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우리들은 교회 안에서조차 이 좁은 문을 싫어합니다.
오히려 좁은 문이란 단어와 그 의미조차 잊어버리고 좁은 문이 있는지 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과연 이 시대의 교회가운데서 서머나 교회의 고난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목숨을 걸고 신앙을 사수한 충성된 증인들이 있습니까?
있다면 그들은 분명 좁은 문을 선택하고 그곳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는 자들임에 분명합니다.
사데 교회의 몇 몇의 성도들이 그 흰옷을 더럽히지 아니하고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분명 그들은 좁고 험한 길을 가는 사람들임에 분명합니다.
6. 주님이 선택하신 것이 좁은 문이요, 주님이 가신 그 길이 좁은 길이라면 반드시 우리도 가야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비록 좁은 문을 선택하더라도 나중에는 넓고 좋은 길이 나오겠지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을 잘 들여다보면, 넓은 문은 문만 넓은 것이 아니라 이어지는 길도 넓다는 사실이고, 좁은 문은 문만 좁은 것이 아니라 그 길도 좁고 불편하고 험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길이 어디까지 이어지고 있습니까?
넓은 길은 멸망으로 끝날 때까지 계속 넓고, 좁은 길은 생명에 이르기까지 끝가지 좁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면 좁은 끝까지 좁은 길로만 가야하고, 넓은 문을 선택하면 끝까지 넓은 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다 보니 노아의 시대에도 사람들이 홍수로 멸망하기까지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5장의 부자들이 자신들의 재물이 썩고, 입은 옷이 좀 먹고 그들의 금과 은이 녹이 슬어 자신들에게 멸망이 임하기까지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천국 가는 길은 어떤 길입니까?
마가복음10:23절 이하에서 주님은 부자가 천국 들어가기가 마치 낙타가 바늘귀로 통과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하시면서, 계속해서 29절 이하에서는 주님 따라 가는 길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말씀하셨습니다.
부자들만 천국 들어가는 길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가난한 우리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10:29)리지 아니하면 이 좁은 문을 통과 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핍박까지 겸하여 받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걸어온 믿음의 길은 어떤 길입니까?
정말 좁은 문을 선택하고 좁은 길로만 왔습니까?
7. 주님이 선택하신 십자가는 다름 아닌 좁은 문이요 좁은 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기독교가 국가 천제의 인구의 25%나 된다고 말합니다.
미국의 경우에는 크리스천의 증거를 영접기도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세례나 영접기도나 등록된 이름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예외 없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반드시 좁은 길로 가야만 하며 그것이 십자가의 길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 가는 길이 매우 험하고, 지고 갈 짐이나 소유도 없이, 함께 갈 사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는 영원한 생명에 이를 것이며 주님의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청교도 신앙을 가진 이 앙드레 지이드의 좁은 문은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여러 가지의 결론을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제롬이나 알리사는 세상이 말하는 행복을 맛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랑과 행복에 관해 실패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 사람들은 말씀에 기록된 「좁은 문」이란 무엇을 의미하며, 내 삶에서 그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그것을 위해 힘쓰고 애쓰고 자신을 희생하던 사람들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지난 주간에 한일전 축구에서 한국이 37년만에 일본에 대패했다고 소동입니다.
3-0으로 졌으니 사실 충격입니다.
그러나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일본팀과 한국 팀의 승패의 결과는 다름아닌 승리를 위해서 누가 좁은 문을 선택하고, 좁은 길을 갔느냐의 차이입니다.
오늘 여기에 모인 우리 대부분의 사람들도 좁은 문을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그 문으로 이어지는 좁은 길을 영생에 이르도록 계속 나아가야만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요 먼저 좁은 길로 나아가신 우리 주님의 소원입니다.
좁은 문은 우리에게 있어서 십자가 이외의 또 다른 상징이요 삶 자체입니다.
우리 삶 속에서, 아니 오늘부터 일주일 동안 우리 삶의 현장에서 매 순간, 매 사건 마다 그 속에서 나타나는 넓은 문과 좁은 문, 그리고 넓은 길과 좁은 길이 무엇인가를 분별하여 주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좁은 문, 좁은 길은 길을 택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