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7.24.좋은 관계(마태복음 7:1-12)
[성경본문] 마태복음7:1-12개역개정
1.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3.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6.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7.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9.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10.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12.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 좋은 관계(마태복음 7:1-12/2011.7.24.오전) 1. 윌리엄 폴 영이 쓴 오두막이란 신앙소설에서 주인공 맥은 사랑하는 막내 딸 미시를 잃고 오랫동안 방황하던 중, 하나님이 보낸 쪽지를 받고 딸이 죽었던 장소 오두막을 찾아갑니다. 그곳에서 맥은 견딜 수 없는 분노와 슬픔이 되살아났지만, 하나님이 준비한 정성어린 요리와 부드러운 대화를 통해 그분의 치유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결국에는 마음의 모든 상처가 아물고, 왜 하나님이 사랑하는 미시를 데려 갔는지, 그리고 미시의 육체가 어디서 잠자고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자기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이며, 잘못된 관계들을 통해 쏟아져 나오는 고통과 문제점들을 깨닫게 됩니다. 맥은 인생에서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거대한 슬픔이라고 표현되어진 이 고통을 통해 도리어 하나님의 어루만져 주심으로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맥의 치유는 다름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함으로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잘못되어진 인간관계를 밝히고 있으며, 두 번째는 하나님과의 잘못된 관계를 말하면서, 이 잘못된 두 가지의 관계를 회복하는 방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2. 주님은 먼저 우리의 인간관계에서 오는 가장 치명적이고 빈번한 문제를 일으키는 문제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는 내용입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는 하루 동안에 얼마나 많은 비판을 쏟아 내면서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대통령을 포함한 정치가에 대한 비판은 얼마나 통렬하고 날카로운지 모릅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이웃 사람들을 향한 비난과 비판, 그리고 판단들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 조차 모르면서 공격의 화살들을 날리고 있습니다. 남들을 무시하는 말들, 시기심과 질투심을 교묘하게 포장하여 내 뱉는 공격적인 언사들로 우리의 하루 삶을 가득히 채울 때가 대부분이라 해도 과장이 아닐 정도입니다. 왜 주님은 다른 허물들도 많은데 그런 것은 제쳐두고 왜 비판하지 말라고 하십니까? 비판은 교만한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교만한 마음은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모든 비판, 비난은 아무리 오랫동안 쌓아 올린 좋은 인간관계라 할지라도 삽시간에 전부 무너뜨리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관계의 파괴는 대부분이 비판적인 태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3. 우리가 비판하려는 마음이 생겨날 때, 과연 내가 남을 비판하고 공격하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며, 과연 남을 비판할 자격이 내게 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은 2절에서 남을 비판하면 그 비판을 내가 도로 받게 될 뿐 아니라, 막4:24절에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 또 더 받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비판이라는 것은 되로 주고 말로 받는 결과를 만드는 것입니다. 인간은 남을 비판하거나 판단할 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스스로 자기사랑에 똘똘 뭉쳐진 존재로 이미 비판이나 판단의 정확한 근거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남을 비판하는 자가 얼마나 어리석고 꼴사나운 모습을 하고 있는지를 3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고 했습니다. 여기 「티」는 식물성 먼지를 말하고, 「들보」는 나무둥치, 즉 통나무를 말합니다. 자신의 눈에는 통나무가 박혀 있는데, 남의 눈에 들어간 먼지를 빼내겠다고 소란을 부린다면 생각만 해도 이것은 코미디요 적반하장입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을 가리켜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신 외식이 무엇입니까? 자기 속에는 온갖 악의와 더러움으로 가득하면서 그것을 숨기고 가장 거룩한 척하며 그 인격을 가장하는 것을 말합니다. 특히 본문은 성경적으로는 많은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자신의 생활에서는 전연 적용할 줄 모르는 영적으로 무능한 바리새인들을 가리켜 하신 말씀입니다. 4. 말씀을 배우면 배울수록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으로 변해가야 하는데, 배울수록 교만해지고, 주의 사람들을 비판하고 공격적인 자세를 가지는 바리새인의 후예들이 많기 때문에 교회가 세상의 공격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자신들만이 주님의 온전한 제자인 것처럼 행세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깁니다. 그래서 6절의 말씀이 본문의 중간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본문과는 전연 어울리지 않는 말씀이 잘못 끼어 들어간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을까 염려하라」. 이것은 가장 귀한 것이라도 그 귀함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으며 귀한 것을 이런 자들에게 함부로 베풀면 도리어 상함을 입는 다는 말씀입니다. 본문의 개나 돼지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개나 돼지는 이스라엘이 가장 부정한 짐승으로 여기는 것으로, 절대로 하나님께 제물로 드릴 수 없는 짐승들입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못한 유대인들을 의미합니다. 말씀은 그 어떤 인간이라도 새사람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가르쳐도 그런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사람, 말씀을 드러내놓고 무시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영적으로 부정한 동물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믿음의 사람들은 말씀으로 인해 지혜로운 사람들입니다. 그 지혜가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람들, 내 곁으로 이끌어 주신 사람들은 공격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으로 삼으라고 보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비판 대신에 이해하고, 모든 판단은 하나님께 맡김으로 모든 인간관계를 마지막까지 사랑과 은혜로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5. 두 번째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성장해 갔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하나님 만나기를 거부하고 숨고 말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죄가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 죄에 지배된 삶이 시작되자 하나님을 피하여 숨고 말았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죄가 무엇입니까? 생명의 근원이 되신 하나님으로부터의 공급을 거절하고 스스로 생명을 유지하고, 스스로 모든 것의 주인이 되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귀의 범죄요, 아담과 하와는 이 마귀의 범죄에 빠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금단의 선악과를 따먹고 그 대가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만 것입니다. 사람과의 관계도 그렇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도 내가 주인이 되고 내가 중심에 서면 모든 관계가 깨어지고 혼란이 오기 마련입니다. 요즘 미국에서 6세 이하의 어린 아이의 출입을 금지하는 레스토랑이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합니다. 이유는 아이들이 문제가 아니라 그 아이들의 부모들이 문제입니다. 공공의 장소에서 자기 자녀들을 마치 지구의 중심이라도 되는 듯이 그렇게 다루는 부모들 때문에 다른 손님들이 피해를 보고 고통스러워하는데도 부모들은 아랑곳 하지 않습니다. 자녀들이 자기 가정에서는 중심이 되는지 몰라도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공공의 장소에서 그것을 강요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내가 중심에 서면 관계는 깨어지는 것입니다. 6. 사람들은 남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그 관계를 통해 인생의 즐거움과 풍성함을, 아름다움을 누리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자주 만나고, 만남을 통해서 서로를 알게 되고, 만남을 통해서 신뢰관계가 쌓여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7절 이하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기도를 통해서 내가 그 분을 얼마나 의지하고 신뢰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외에는 내게 소망이 없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고백의 연장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는」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입니다. 구하는 자에게 영육간에 좋은 것으로 풍성케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구하는 자에게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할 정도로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인간의 가치가 무엇을 통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납니까? 내가 다른 사람에게 어떤 대접을 받는가에 따라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존귀하게 여긴다면 그만한 가치가 내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나를 고발하고 경찰로 하여금 철장에 가두게 만든다면 그것이 내 인생의 가치입니다. 사람들에게서 어떤 대접을 받는가에 따라 내 인생의 가치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7.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두 종류의 인간이 나오고 있습니다. 개나 돼지 같은 인간이 있고, 다른 편에는 하나님의 자녀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서는 최고의 것을 아끼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거부하고, 비판하고 공격하고 완악한 마음으로 스스로를 가두어 놓은 사람에게는 심판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대우하고 계십니까? 마18:22-25절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일만 달란트를 빚진 종이 주인의 은총을 입어 어마어마한 빚을 다 탕감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날 길가다가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의 빚진 친구를 만나자 강제로 끌고 가서 옥에 넣고 말았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된 주인은 그 종의 빚 탕감을 취소하고 빚을 다 값을 때까지 옥에 가두고 말았습니다. 이 사람에게 친구에 대한 티끌만한 자비만 있었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잘못된 인간관계가 자신은 물론이고 친구까지 망하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35절에 무엇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까?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같이 하시리라」는 말씀입니다. 자비함이 없는 인간관계, 교만한 마음에 남을 비판하고 공격하는 사람들, 남을 무시하고 시기나 질투심에 가득한 사람들, 그래서 늘 인간관계에서 고통과 전쟁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그대로 값아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8. 주님은 마22:37절 이하에서 가장 큰 계명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37)는 이것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위해서 생명을 걸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 계명으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39)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했습니다. 즉, 성경 66권의 핵심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눅10장에 보면 같은 성경 구절이 나옵니다.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의 대답은 이 두 가지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말씀하시면서, 「이를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냥 육체가 사는 것이라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도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 율법사의 질문이 무엇입니까?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눅10:25)입니다. 이 율법사는 지금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물어 보고 있고, 예수님은 영생을 얻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9. 신앙생활은 결국 관계입니다.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세상 삶도 내 인생의 가치도 내 인격도 달라집니다. 우리는 세상을 사랑하는 일이라면, 세상에서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서라면 많은 것을 희생하며 참으며 수고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면서 정작 우리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는 얼마나 참았으며 얼마나 희생했습니까?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서는 얼마나 수고했습니까? 12절 마지막 구절에서 「대접한다」는 말은 우리가 기분이 좋을 때 한두 번 선심 쓰듯이 대접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대접하는 것을 말합니다. 곧 우리 삶의 일부분이 되어버린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이 모든 관계를 아름답게 만들 이유가 있고 사명이 있습니다. 좋은 관계는 나와 다른 사람들을 복되게 만들며, 이런 복된 관계가 곧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주님을 기쁘게 하는 일인 줄 믿습니다. 좋은 관계를 위해 모든 사람들에게 최고의 대접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로부터 최고의 대접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관계는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가 영원토록 아름답고 복된 관계를 위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최고의 것을 지금부터 영원토록 베푸시는 줄 믿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