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2.18.위대한 사랑(요한복음3:16-17)

[성경본문] 요한복음3:16-17개역개정

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위대한 사랑(요한복음3:16-17/2011.12.18.오전)
1. 한국의 신문학 시대를 열었던 공초 오상순 선생이 계셨습니다.
일본 동지사 대학을 나와 평생 독신으로 살았고, 교사 생활을 하면서「폐허」라는 동인지를 창간하여 많은 시를 남기면서 한국의 신문학을 이끌었던 분입니다.
그가 사람을 만날 때 마다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날 처음 만나는 사람이건 하루에 열 번을 만나건 만날 때 마다 딱 한가지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반갑고 고맙소, 고맙고 반갑소」.
찾아오는 사람들이 대부분 손아래 사람들이었으니 끝에「소」자를 붙였는데, 동료가 찾아오면 「반갑고 고맙네, 고맙고 반갑네」 였을 것이고, 간혹 손윗사람을 만나면 당연히 「반갑고 고맙습니다, 고맙고 반갑습니다」 였을 것입니다.
그는 누구를 만나든지 입을 열기만 하면 첫 마디가 이러했다고 합니다.
그는 평소 사람을 만난다는 것 자체를 반가움으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70살에 세상을 떠날 때에도 병석에서 누워 찾아오는 사람들을 향하여 역시, 「반갑고 고맙소, 고맙고 반갑소」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결코 인사치례의 입에 붙은 말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얼마나 귀하고 고마운 일인가를 그의 영혼 속에 깊이 각인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그도 한 때는 크리스천으로 살면서 성경말씀에 크고 작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 졌습니다.
한 사람의 시인이 사람의 만남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말씀 속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모습에 남다른 은혜를 받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2. 십이월도 벌써 중순이고 다음 주일은 아기 예수께서 탄생하신 성탄 주일입니다.
성탄절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고 이 땅의 죄인된 인생을 만나기 위해 오신 구원의 사건입니다.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는 물론, 인간의 몸을 입고 아기 예수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도 이 만남을 고맙고 반가움으로 찾아오신 줄 믿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모습이요 우리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기쁜 마음으로 달려 오셨는데, 정작 주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입어야 할 우리는 이 만남이 무슨 의미의 만남인 줄 모른채,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척하고 미워하고 대적하며 마침내 십자가에 그 분을 못 박아 죽이고 말았던 것입니다.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우리에게 예수님과의 만난에 진정한 기쁨과 감사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한 해를 너무 바쁘고 피곤하게 달려 오다보니, 사람 만나는 것 자체가 피곤하고 귀찮다 보니 예수님 만나는 것조차도 귀찮고 피곤한 일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주님의 사랑의 사랑이 어떤 사랑이며 그 분이 날 위해 희생하신 사랑의 수고가 어떤 것인 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피곤한 줄 모르고, 은혜를 입은 자로서의 감사가 있다면 은혜 갚기 위한 희생을 결코 짐으로 여기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구약 시대의 사랑의 선지자인 호세아의 이야기입니다.
3. 그는 어느 날 디블라임의 딸인 고멜을 데려다가 결혼하고 자녀를 낳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아는대로 고멜은 원래 행실이 나쁜 여자였습니다.
몸을 파는 음란한 창기였습니다. 돈 몇 푼에 몸을 팔고 남자들의 거짓 사랑의 꾐에 빠져 이용당할 대로 다 당하고는 나중에 버림당하기를 반복하는 그런 여자였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자신의 명령에 충실한 거룩한 선지자에게 고멜을 데려다가 가정을 만들고 자녀를 낳으라고 명령 하셨습니다.
이 여자가 얼마나 행실이 나쁘고 문제가 많은 여자인지 호세아를 읽어본 사람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만일에 여러분에게 자식이 있다면 백 명이면 백 명이 고멜에게는 결코 장가를 보내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에 그런 여자를 자신의 아들들이 사랑하니 결혼한다고 선언한다면 땅을 치고 통곡할 것입니다.
만일에 동생이나 형이 있다면 그런 여자에게 장가가는 것을 반대할 것입니다.
만일에 친구나 친척에게 그런 일이 있으면 찾아다니면서 한사코 말렸을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이 성장하여 결혼적령기에 들어서면 결혼할 상대를 찾기 시작하는데, 최선을 다해 더 좋은 상대를 찾기 마련입니다.
제 자식의 성격이나 삶의 태도나 사회적인 지위며 경제적인 능력은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능력 있고 재력 있고 인물 좋고 성격 좋은 사람만 찾기 마련입니다.
이것은 분명 잘못된 생각이지만 동시에 이것이 바로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우리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가장 좋은 가문과 인물이며 가장 훌륭한 여자를 소개하지 않고 이스라엘에서 가장 밑바닥 인생이며 가장 천한 여자에게 장가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4. 이유가 무엇입니까? 범죄로 타락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 우상숭배의 죄에 빠진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선지자를 희생 시켜서라도 하나님 사랑에서 떠난 이스라엘이 죄를 씻고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간절하며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가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알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이 죄로 망하기 보다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은혜와 영원한 축복을 누리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호세아에게 고멜을 데려다가 결혼하고 자녀를 낳으라고 하셨습니다.
문제는 호세아 선지자의 사랑과 인내에도 불구하고 고멜은 그 못된 행실을 고치지 못하고 다른 남자들과 어울려 놀다가 아예 남편과 자녀와 집을 버리고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남편 호세아는 비록 사창가에서 몸값을 지불하고 그녀의 빚을 탕감해 주고 데려온 여자였지만, 정상적이고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아니하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고멜은 그런 남편의 마음을 몰라주고 기회만 있으면 가정을 뛰쳐나갔고, 길거리에서 이 남자 저 남자의 품에 안기며 방탕한 삶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남편의 사랑보다는 이미 이런 잘못된 삶에 길들여진 고멜은 이 방탕하고 더러운 삶이 마치 자신의 운명인 것처럼 죄가 가져다주는 쾌락에 빠져 살았던 것입니다.
그 결과 정욕적이고 이기적인 남자들에게 이리저리 이용만 당하다가 나중에는 버림을 받고 또 다시 장터의 노예로 팔리고 말았습니다.

5. 그런데 하나님은 또 다시 호세아에게 말씀하시기를 도망간 고멜을 찾아내어 데려다가 이전처럼 사랑하고 자녀를 낳으며 행복한 가정을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런 상황에서 과연 어떤 남자가 도망간 여자가 찾아내어 다시 이전처럼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과연 이런 일이 가능한 일이라 생각합니까?
그러나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다시 고멜을 찾아 나섰고, 이전에 자신과 처음 만났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육체와 마음이 더욱 망가지고 무너져 내린 고멜을 만났습니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더 이상은 도무지 사랑해 주고 싶어도 사랑할 만한 곳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망가져 버린 고멜이었지만, 호세아는 말씀에 순종하여 그녀를 다시 집으로 데려오게 되었습니다.
그녀를 다시 데려 오기 위해 치룬 몸값은 은 15개와 보리 한 호멜반이었습니다.
이것은 여자 노예 한 사람의 몸값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 한 가지는 고멜이라는 이 여자는 호세아를 만나기 전에도 창기였고, 호세아와 결혼한 이후에도 창기의 행실을 버리지 못했고, 다시 비싼 댓가를 치루고 데려 올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선지자 호세아는 그녀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녀를 이제는 더 이상 사랑하지 않으리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이것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요, 바로 이것이 선지자 호세아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었기 때문입니다.

6. 중요한 것은 왜 하나님이 거룩한 선지자를 말씀에 곱게 순종하는 이런 선지자까지 희생시키면서, 타락한 한 여자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 어떤 희생을 치루고서라도 여전한 사랑으로 사랑하시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과연 이 여자가 이토록 귀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나 이유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어머니들에게는 모성애라는 본능이 있듯이 우리 하나님에게는 죄인을 향한 용서가, 용서하시되 끝까지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되 온전한 변화를 이룰 때 까지 인내하시면서 끝까지 사랑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남몰래 셈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내게 있어 이 사랑의 가치가 얼마나 되는가?
그 셈의 결과를 따라 그 사람에게 대하는 태도가 달라집니다.
가치 있고 내게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더 많이 사랑해줄 수 있지만, 가치가 없다고 생각할 때 버림당하는 것이 이 세상의 사랑의 셈법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큰 죄인이고, 아무리 연약하고 무능하고 가치가 없는 인생일지라도, 이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통하여 변하여 새사람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멜이 번번이 호세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버리고 도망갈지라도 반복해서 그를 찾아가 용서하시고 은혜의 자리로 다시 불러 주시는 것은, 인간이면 인간답게 살고, 하나님의 백성이면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를 따라 축복을 누리며 사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임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7. 오늘 본문이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착하고 충성된 선지자를 보내셨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사랑을 뿌리치고 도망가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마지막에 하신 일이 바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고멜 같은 우리에게 보내신 것입니다.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심판받고 멸망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시기 때문입니다.
천 번 만 번 죄를 반복해도 마지막에라도 그 죄를 깨닫고 돌이켜 하나님의 사랑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리 하나님은 사랑에 눈이 멀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호세아 선지자를 고멜에게 보낸 것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의 죄인된 우리에게 보내시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사랑도 한쪽이 일방적으로 포기해 버리면 깨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으며, 우리가 아무리 그 사랑을 부인하고 도망간다고 하여도, 하나님이 포기 하시지 않고 선지자를 보내서라도 고멜처럼 다시 사랑하시는 변함없는 사랑이 오늘 우리를 주님의 은혜 안에서 살게 하는 줄 믿습니다.

8. 생활이 어렵고 힘들다고 낙심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도망가지 맙시다.
선지자 호세아인들 어찌 미래에 대한 꿈이 없었으며, 행복한 가정생활에 대한 꿈이 어찌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창기 고멜을 향한 하나님의 참 사랑에 먼저 감복하였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알았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고, 맛볼 수 있었기 때문에 그도 하나님의 마음으로 고멜을 사랑하고, 도망간 고멜을 다시 데려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용서할 수 없었던 것들을 용서하고 이해할 수 없었던 것들을 이해하고 용납한다면 우리는 이미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 속에 있는 사람들인 줄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의 사랑의 능력이 우리 가운데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귀히 여기면 나도 은혜를 베풀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놀랍고 위대하며, 그 사랑이 얼마나 크고 아름다운가를 깨달아 반갑고 고마운 마음이 넘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모든 만남 속에서 반갑고 고마운 마음이 넘치는 성탄절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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