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4.6.성령받은 자의 삶(고린도전서 12:1-3)

[성경본문] 고린도전서12:1-3개역개정

1.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2.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

3.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성령받은 자의 삶(고린도전서 12:1-3/2008.4.6.오전)


1. 오랜만에 다시 고린도전서를 통해 은혜 받게 됨을 감사합니다.
당시의 고린도 사람들은 헬라철학을 바탕으로 하는 지식을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헬라철학은 우상숭배를 가르치고 있으며, 그러므로 이 고린도 지역에는 우상숭배가 왕성하고, 겸하여 황제숭배가 당연한 일처럼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도덕적으로 문란했는데, 이것은 헬라의 우상종교가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러한 영적, 도덕적 환경 속에 있던 고린도 교회의 문제점은, 세속적인 것과 신령한 것과의 구별이 어려운 점이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예수를 믿고 성령 세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성령과 세상, 믿음의 일과 마귀의 일을 구분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자신들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신앙이 흔들렸고, 영적인 방황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회가 사는 길은, 성령 받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정도가 아니라,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자신의 믿음조차 지킬 수 없었던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좋은 점도 많았고, 훌륭한 교인들도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책망을 받게 된 것은 바로 영적인 분별력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편지를 통해 은사와 능력과 신령한 것을 반복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2. 그러므로 사도바울이 13장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성령의 역사는 먼저 성도들의 신앙고백을 통하여 가장 확실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사실이 본문 3절에 기록되어 있으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저주아래에 있는 보통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요,
그분을 무시하지 않는다는 의미인데,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무시하면서 살았습니다.
믿음으로 행한다고 하면서, 그분의 말씀을 거역하였고, 입으로는 은혜를 말하면서 실상은 성령을 훼방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면 성령받은 자의 신앙고백은 어떤 것입니까?
1)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습니다.
2)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며, 나의 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입술로만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마음으로 믿어야 합니다.
이미 우리 안에 확정되어진 신앙의 경로를 보면, 마음으로 믿고, 그 믿음의 내용을 입술로 고백하고, 고백되어진 신앙고백대로 살아갈 때,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3. 그렇다면 성령은 어떻게 임하는 것입니까?
성령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는 순간 찾아오십니다.
오셔서 하나님의 뜻대로 믿는 자를 감화하시고, 인도, 보호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도 보혜사(파라클레토스)라 하는데, 이것은「곁에」라는 의미를 가진 「파라」라고 하는 단어와 「부르다」는 의미를 가진「칼레오」라는 단어가 합성하여 「어떤 사람의 옆으로 오도록 부름받은 자」란 뜻으로 사용되어졌던 것입니다.
그분은 이렇게 우리의 곁으로 오셔서 능동적인 면에서는 격려와 권고를 행하시고, 수동적인 면에서는 우리를 위하여 변호인의 역할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를 돕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얼마나 많은 두려움과 염려와 고통 속에서 살아갑니까?
그런데 우리 곁으로 오신 성령님은 우리의 모든 두려움과 염려와 고통, 그 밖의 모든 문제로 인한 어려움에서 우리를 도우시고, 보호하시고, 건지시고, 위로해 주시는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믿노라고 하면서, 계속 염려하고, 두려움과 불안 속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세상사람들이 당하는 문제들을 우리도 당합니다. 그들이 만나는 위기는 우리에게도 찾아옵니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일을 우리도 당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와는 다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문제를 만났을 때, 그들을 도울 자가 없으며 위로할 자가 없지만, 우리에게는 도우시는 성령님이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4. 이렇게 우리 곁으로, 그리고 우리 가운데 오신 성령님이 우리를 위하여 구체적으로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분별의 지혜를 주십니다.
현대인의 특징은, 절대적인 가치를 잃고, 방황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식은 날로 상승하는데, 가치관은 무너지고 있습니다.
문명은 발달하는데, 삶의 질은 추락하고 있습니다.
뜻대로 되지 않으니 고민하고 방황하다가 결국에는 우상이나 점쟁이를 찾아갑니다.
또는 술과 마약과 여러 가지의 세상 향락으로 삶을 탕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노력과 지혜로는 참 평안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성공하려면, 지혜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잠언과 전도서는 지혜의 책을 주셨습니다.
지혜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바로 행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지난주의 뉴스에서, 신입사원의 직장생활을 7,5,3에 비유하고 있었습니다.
신입사원이 3년 안에 회사를 그만두는 비율이, 중졸은 7할, 고등학교는 5할, 대졸은 3할이라고 했습니다.
이 뉴스 속에 숨어 있는 의미를 하나 발견했습니다.
공부를 많이 하면 할수록 지식만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인내심도 증가한다는 사실입니다.
공부하기 싫은 이유의 가장 큰 원인은 인내심의 한계에 있습니다.
유학 가서 학위 따는 것, 이것은 목숨을 건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공부하면서도 장래에 대한 불안이 얼마나 크며, 안팎으로 받는 스트레스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인내를 잘합니다. 인내심에 한계가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면 응답 받을 때까지 부르짖고, 열심을 내면 열매가 있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엇이 옳고 그르며, 무엇이 최선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고전2:13절에,「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친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지혜 있는 사람은 망하지 않습니다.
망할 수밖에 없는 조건 속에서도 살아날 길을 찾아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아무도 이 세상을 바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5.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삶을 살게 합니다.
당시 로마세계에는, 황제를 숭배하는 제도가 있었고, 이것을 강요당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고린도 교인들에게는 과연 누가 나의 참된 구주며, 주가 되시는가에 대한 정체성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마치 일본에 살고 있는 재일 한국인이 겪는 갈등과도 비슷한 것입니다.
한국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자니 이방인 차별을 받고, 부딪힘으로 많은 갈등을 겪습니다.
그렇다고 일본인으로 살자니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에 부딪혀 또 다른 갈등을 겪게 됩니다.
고린도 교인들에게는 나의 주가 누구냐? 예수인가? 로마 황제 카이자르인가?
분명히 주님도 말씀하시기를,「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마6:24)이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육체를 입고 살기 때문에, 세상도 중요하고, 돈이나 친구나 명예나 좋은 환경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로 인하여 우리의 마음이 흔들려서는 안될 것입니다.

6. 저는 요즘 주위의 환경이 급속히 변화되면서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를 받고 있습니다.
작년 말부터 최근까지 많은 선교사들이 사역지를 이동하고, 본국으로 귀국하거나, 또는 소천함으로 그동안 사귀어 왔던 적지 않은 동료나 후배 선교사들이 곁을 떠났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몇 사람들이, 가장 열심을 내시던 분들이 귀국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하기를, 우리가 나이를 먹으면서 더 많은 이별을 맛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가친척은 물론이고 언젠가는 주위의 사람들과도 이별해야 합니다.
자녀들도 떠나보내고, 사역에서 은퇴하면 여러분들과도 이별해야 합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부부관계도 끊어지고 나면, 마지막 남는 관계가 무엇인가? 그것은 주님과의 관계뿐입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고 보니, 그렇다면 내가 정말 가장 귀하게 여기고 정성을 다하여 아름다운 관계를 영원히 지속해야 할 것은 주님과의 관계뿐이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이 관계를 다른 모든 관계보다 우선하여 든든히 해야 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생각도 성령님의 도움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향해「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마16:16)이라는 고백을 할 때, 그것은 베드로에게서 나온 고백이 아니라 하나님이 알게 하신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고백한 것이라고 주님이 말씀해 주셨듯이, 지금 이 시간에도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말씀을 듣고 배우지만, 지금까지 머리로만 이해하던 것들, 지식으로 머물러 있던 것들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고백하며 그 진리를 생활에 적용함으로, 참 하나님의 자녀된 자의 삶을 살게하시는 줄 믿습니다.
과연「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사53:5)는 이 고백은 지식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생명의 말씀을 받아 영원한 생명을 이어가게 하시는 성령의 힘인 줄 믿습니다.

7. 과연 누가 나를 새롭게 하는가? 성령님 바로 그분입니다.그가 우리를 하나님이 모시기에 합당한 자의 삶을 살도록 도우시며, 그 분의 감화를 통하여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이전에 좋던 것 이제는 분토로 여기며, 삶의 목적이 변하고, 취미도 변하고, 생활의 방법이 달라진 줄 믿습니다.
본문 2절의 말씀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대로 끌려 갔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기 전에는, 끌려 다니는 생활이었습니다.
그래서 방황하고, 마시고 세상의 낙을 즐기며 하루하루를 목적을 잃고 연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방황하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죄와 허물을 고백하며 가슴을 찢게 하셨습니다.
이제는 그 분의 피로 씻으시고, 성령의 불로 소멸하여 우리를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지금도 성령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도록 모든 것을 도우시고 함께 하시는 줄 믿습니다.
이제는 끌려 다시는 삶이 아니라, 성령님의 감화하심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은혜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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