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7.24.주님이 원하시는 것(계시록 3:14-22)
[성경본문] 요한계시록3:14-22개역개정
14.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15.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17.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18.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21.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제공: 대한성서공회
주님이 원하시는 것(계시록 3:14-22/2011.7.24.오후)
1. 오늘 본문의 라오디게아 교회는 소아시아의 7교회 중에 마지막교회입니다.
왜 마지막 교회라고 할 수 있느냐 하면, 사도요한이 밧모섬에서 계시 받은 말씀이 에베소 교회에서부터 시작하여 이 교회까지 전달되는 그 과정을 지도로 그려보면 반달형으로 이어지면서 라오디게아 교회에서 끝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칭찬이 없는 교회입니다.
사데교회가 칭찬이 없는 교회라고는 하지만, 3:4절에서 나타난 대로 마지막 까지 신앙의 정절을 지킨 몇 사람을 주님이 합당한 자로 여기고 있기 때문에 사데교회는 전연 칭찬이 없다고만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이 라오디게아 교회는 책망만 있고 칭찬이 전무한 교회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지적한 이 교회의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미지근한 것과 불쌍할 정도로 영적으로 가난하고 벌거벗은 교회라는 것입니다.
본문 17절의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면 좋겠습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쓸모없는 교회라고 볼 수 있습니다.
15절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라는 말씀은 지난번의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한 말씀과 똑같은 말이지만 그 말의 의미는 전연 반대입니다.
주님이 아시는 이 교회의 행위, 성도들의 삶은 어떤 것입니까?
무엇이 주님의 책망을 듣게 만들었습니까?
2. 첫째로 미지근한 신앙, 미지근한 태도 때문입니다.
이것은 저들이 스스로 인정하듯이 자신들의 부요함 때문이었습니다.
기원전 60년에 이 지역에 일어난 큰 지진으로 모든 것이 파괴되었을 때, 이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력으로 재건할 정도로 재정적인 힘이 있었던 교회였습니다.
바로 이 재정적인 넉넉함이 저들로 하여금 무사 안일주의에 빠지게 만든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적으로 볼 때, 세상 사람들과 교인들의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이 교회는 자신들의 물절적 풍요가 마치 영적인 풍요며 능력인 줄 착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아무리 교회가 잘못이 있다고 하여도 주님이 토해 낸다는 말씀은 표현이 심한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곳의 물의 성분이 어떻다는 것을 안다면 주님의 표현은 매우 적절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마시는 물은 미지근하다고 해도 토할 정도는 아닙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 지방의 물은 철분과 석회질이 풍부하기 때문에 뜨겁게 해서 마시든지 차게 해서 마시지 아니하면 맛없는 물이 되고 맙니다.
특히 미지근한 상태는 정말 사람으로 하여금 구토를 일으키게 한다고 합니다.
어쨌든 주님이 입에서 토해 낼 정도의 교회, 그런 신앙의 사람들이라는 것은 매우 충격적인 것입니다.
사실 우리 주위에도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사람들, 남의 말에 이리 저리 잘 흔들리는 사람들, 어떤 의사 결정에도 속하지 못하고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 참으로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3.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둘째로 영적으로 완전히 죽은 교회라는 사실입니다.
17절에,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부자라고 자랑하는 이 교회를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고 했습니다.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닌데, 더 심각한 사실은 자신들이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지조차 모른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게 위기입니다. 이 시대의 문제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평소에 잘 한다고, 나름대로 열심히 한다고 생각하고, 나름대로는 의롭다고 생각합니다마는 문제는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보시는가 하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서머나 교회의 환란과 궁핍을 아신다고 하면서 그러나 그들은 네게 부요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겉으로는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너무 가난하고 형편이 없었고, 그 위에 환란과 핍박으로 큰 고통 가운데 있었지만, 주님이 보실 때에는 부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보는 기준이 아니라 주님이 보시는 기준이 중요합니다.
세상이 어떻게 보는가가 아니라 주님이 이 교회를 어떻게 보시는가가 중요합니다.
성도는 세상이 우리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에 마음을 빼앗기고 흔들려서는 안됩니다.
주님이 보시는 기준으로 봐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서머나 교회와 이 라오디게아 교회는 세상이 보는 기준과는 정반대의 결론에 도달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기준입니다.
4. 구체적으로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점을 살펴봅시다.
곤고하고 가련하다고 했는데, 이것은 눈을 뜨고 바로 쳐도 보기가 어려울 정도로 처참할 만큼 불쌍한 상태를 말합니다.
마치 전쟁터에서 모든 것을 잃고 폭격을 맞아 살아 있다고는 하지만 아무런 소망도 없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것은 신앙상태가 유치한 것을 넘어 그의 불신앙에 가까운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가난하다고 했는데, 이것은 주님께 대한 헌신이 전연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적으로 심각한 빈곤을 의미합니다.
또한 눈이 멀었다고 했는데, 이것은 영적인 세계에 대한 무지를 말하는 것으로, 성경적으로 아는 것이 없고 깨닫는 것이 전무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 위에 이 라오디게아 교회는 벌거벗었다고 했습니다.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완전히 부패한 것을 의미합니다.
질병에 걸린 사람으로 표현한다면 모든 질병이 죽음을 향해 복합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상태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쓸모없는 교회가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향해 말씀을 주시는 주님은 어떤 분입니까?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시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 까지 하시」(마12:20)는 주님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것처럼 쓸모없이 보이는 교회라도 주님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5. 그래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위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계십니다.
첫째로,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라」 는 말씀입니다.
불로 연단한 금이란 믿음을 말합니다.
육신적으로 부요한 자가 아니라 영적으로 믿음으로 부요한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보혈로 모든 죄와 수치를 씻어라 는 말씀입니다.
셋째로,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치료하시는 주님의 은혜로 육신이 보지 못하는 것을 영적인 눈으로 보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말씀은 주님의 구원은 일방적인 은혜로 이루어지지만,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고, 자신을 새롭게 하는 일에는 스스로의 열심히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새벽기도에 드린 말씀 중에 마태복음 9:27-38절의 말씀으로 교회의 사명이라는 제목으로 말씀 드렸는데, 주님을 본 받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으면 병자를 치료하는 능력이 나오며, 영혼을 구원하는 역사가 일어나며, 영혼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귀신도 물러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체험한대로 귀신들린 자들은 교회로 데려만 와도 귀신이 쫓겨 나갔습니다.
영적인 싸움은 내가 연약해서는 이길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주님을 의지하고 그의 도움을 간절히 사모할 때, 그분의 능력으로 이기는 것입니다.
6. 이 불쌍한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주님의 소원이 무엇입니까?
주님은 이 교회와 더불어 더욱 친밀한 교제를 원하고 계셨습니다. 함께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부요한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사람들과 교제를 나누는데 많은 시간과 재물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화려한 옷과 악세사리로 치장하며, 집안의 가구며 장식에 돈을 아끼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부요함을 자랑하고 초대받은 손님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러면서 주님과의 교제는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20절에서 주님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영적으로 잠이 든 자들을 깨우시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문을 두드리시는 주님의 모습에서 무엇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주님은 결코 멀리 계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 문밖이라는 장소는 경우에 따라서는 가장 가까운 곳이 될 수도 있지만, 때로는 가장 먼 곳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문 밖은 문 하나의 차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집 안에서 다른 것에 신경을 쓰면 바깥에 있는 사람을 전연 의식할 수 없는 장소입니다.
텔레비전으로 세계 지구촌 구석구석의 뉴스를 접하면서도 문 밖에 서 계시는 주님을 전연 의식할 수 없을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7.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가장 가까운 곳을 원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더불어 먹으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와 함께 같은 식탁에 앉아 즐겁게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식탁이란 단순히 허기진 배를 채우는 그런 장소가 아니라 가족간의 대화가 있고, 얼굴을 서로 쳐다보면서 가족간의 애정을 나누는 장소가 식탁입니다.
주님은 바로 그 식탁에 함께 앉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남미에 가면 식사시간이 깁니다. 저녁에 먹기 시작하면 2-3시간은 소모됩니다.
교회서 예배할 때도 그 정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탈리아에 가 보니 저녁 식사에 초대 받는데 8시였습니다.
알고 보니 식당이 그 시간에 문을 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한 테이블에 한두 번 손님을 받으면 그날 장사는 끝이 납니다.
그런데 만일 어떤 사람들이 바쁜 것을 핑계삼아 예수님을 만나고는 겨우 라면이나 샌드위치로 때우려고 한다면,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이 교회의 문제점은 자신들이 얼마나 비참한 상태에 있는지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저들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회개하고 새롭게 변화되기를 원하셨고, 그래서 구체적인 방법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 후에 주님의 소원은 다름 아닌 변화된 라오디게아 교회와 함께 더불어 먹는 복되고 아름다운 만찬을 함께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8. 칭찬 하나 없는 쓸모없는 이 교회를 향해서도 주님의 애정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여기 보좌는 임금이 앉는 영광의 자리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이기고 승리를 얻으심으로 하늘 영광의 자리에 앉은 것처럼,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한 자들에게는 같은 영광을 허락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살아 있는 교회는 다름 아닌 믿음을 위해 몸부림치며 하늘의 영광을 위해 힘쓰고 애쓰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19절에서 주님은 이 교회를 향해,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며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주님의 소원은 곧 우리를 향한 소원입니다.
미지근해서 다 죽어가는 교회가 아니라 열심을 내서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여 영원한 영광을 얻는 복된 교회, 그런 성도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