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8.7.하늘에 열린 문(요한계시록4:1-11)
[성경본문] 요한계시록4:1-11개역개정
1.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
2.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3.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4.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더라
5.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나고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6.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들이 가득하더라
7.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8.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졌고 그 안과 주위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 하고
9.그 생물들이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릴 때에
10.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
11.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제공: 대한성서공회
하늘에 열린 문(요한계시록4:1-11/2011.8.7.오후)
1. 계시록은 3장까지는 박해와 여러 환란 속에서 지상의 주님의 몸된 교회들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습니다. 그러나 4장에 들어오면서 그 장면은 급변하여 그 무대가 천상으로 옮겨가면서 하늘 문이 열리면서 제일 먼저 하나님의 보좌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도요한은 1절에서, 「하늘에 열린 문이 있」다고 했으며, 그는 주님이「이리로 올라오라」는 음성을 듣고 그 열린 문을 향해 올라갔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하늘 문이 열리는 장면을 여러 번 목격하게 됩니다.
에스겔이 환상을 볼 때가 그랬고,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세례를 받으실 때가 그랬고, 스데반이 성난 군중들의 돌에 맞아 순교할 때에도 하늘 문이 열렸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1절 마지막 부분에서 주님이,「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고 하신 내용입니다.
이것은 3장의 내용이 끝나면서,「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는 내용과 비교가 되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2,3장에서 주님이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에게 보낸 편지 마지막에 가서는 예외 없이 이 말씀이 반복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4장이 시작되면서 듣는다는 말 대신에 본다, 혹은 보이리라는 말씀이 반복되고 있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왜나하면 듣는 자와 보는 자의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전도자를 통해 그 들은 내용을 따라 신앙생활 하는 사람과, 4장에서처럼 보고, 그 본 내용을 따라 신앙생활 하는 사람의 차이는 매우 크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은 욥기42:5-6절을 보면 명확해집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귀로만 듣는 주님을 이제는 눈으로 하나님의 실존을 체험하고 흔들릴 수 없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도요한이 그 눈으로 본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는 열린 하늘 문을 통하여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천상세계를 통하여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신앙의 체험이 있기를 원합니다.
2. 사도요한은 이리로 올라오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이끌려 올라간 곳에서 열린 하늘 문 사이로 본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보좌입니다. 그리고 그 보좌 앞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향하여 올리는 24장로들과 4 생물들의 예배광경을 목격했습니다.
또한 주님은 앞으로 반드시 될 일들을 미리 보여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전도자를 통해서 듣기만 하는 신앙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체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체험이 없는 신앙생활은 지식은 늘어가지만 확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본다는 말의 의미는 눈으로 목격하는 것도 의미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체험적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내 삶 속에 살아 함께 역사하시는 주님을 체험하려면 영적인 눈이 열려야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세계를 보고, 그곳에서 남다른 은혜와 능력을 체험할 때,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소유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사도요한이 열린 하늘 문 안으로 본 첫 광경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보좌였습니다.
이 보좌는 거룩하고 공의로우며 영원하시며 모든 만물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이 앉으시는 자리입니다.
주님이 사도요한에게 하나님의 보좌를 제일 먼저 보여준 이유는, 이 보좌야 말로 세상과 하늘과 모든 만물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보좌는 천국의 중심이요 온 만물과 우주의 중심이며 모든 것의 중심입니다.
바로 그곳에 하나님이 앉으신 것은 11절에 기록된대로, 하나님만이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유일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 백성된 우리들의 중심에 무엇이 있습니까?
반드시 하나님의 보좌가 있어야 합니다.
이 지상의 교회도 아니며, 장차 우리가 들어갈 영원한 천국도 아니요, 반드시 하나님의 보좌가 되어야 하는 것은, 이 보좌 앞에 모여 찬양하는 24장로와 4생물들의 모습에서 그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도요한이 목격한 두 번째 장면은 바로 이들이 하나님 보좌 앞에서「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하며,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자라」고 하면서, 그 보좌 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자신들의 면류관을 벗어 주 하나님께 드리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하나님 보좌 앞에서 경배하며 자신의 면류관을 벗어 드리는 이 사람들이 과연 누구인가 하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네 생물은 또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많은 의문들을 가지고 있으며, 이들의 정체가 무엇인가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계시록 2,3의 7교회를 통해 우리는 그 답을 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신앙의 선한 싸움을 싸우며 마지막 까지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한 충성된 자들을 향해 주님이 하신 약속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두 가지로, 첫째는 생명의 면류관이요 그 둘째가 의의 흰옷이었습니다.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께 예배하는데 자신의 생명을 건 사람들과, 하나님 중심의 이 신앙의 정절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초개와 같이 내 던진 순교자들과,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해 몸 바쳐 충성했던 그 증인들에게 하신 약속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생명은 물론, 세상의 온갖 좋은 것들을 버리고 오직 주님만 사랑한 결과로 얻은 그들의 면류관과 의의 흰 옷을, 이제는 이것마저도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올리면서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4. 그렇다면 왜 24장로들인가 하는 의문입니다.
24 숫자는 12를 두 번 곱한 것입니다.
곧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12지파와 신약시대의 12사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구약 전 시대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모든 시대의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을 일컫는 상징적인 숫자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엎드려 예배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그 예배 중에 자신들의 금 면류관을 벗어 드림으로 하나님께 세세토록 영광을 돌리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의 예배 대상이신 하나님을 본문은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8절에 보니,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예배하는 하나님을 전에도 계셨다고 함은 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일컫는 것이요, 이제도 계신다는 것은 만물을 자신의 뜻대로 통치하고 계시는 분이심을 의미하는 것이요, 장차 오실 자라는 것은 최종적인 영원한 승리자 하나님을 일컫는 것입니다.
5.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 땅의 모든 생명체의 존재 가치는 오직 하나님을 예배함에 있으며, 모든 피조물의 궁극적인 목적이 보좌에 앉으신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있으며, 바로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따라 만물을 만드시고 우리 인생을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줄 모른다면 곧 인간의 가치를 잃는 것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이라는 이 서신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신앙의 박해와 환란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로하기 위해 보낸 것입니다.
박해와 환란 가운데 있던 이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신앙의 박해라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다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주님의 가신 길을 나도 가겠다고 스스로 선택한 사람들만이 얻는 결과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보다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더 귀하게 여기셨기 때문에 십자가를 선택하셨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자신의 삶보다 더 귀함을 아셨기 때문에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기독자는 운명에 사로 잡혀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서의 스스로의 운명을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그 사실이 본문 10절에 기록되어 있으니,「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졌」다고함으로, 저들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아니하고, 천국에 올라가서도 영원토록 하나님 보좌 앞에서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을 영생을 얻은 최고의 목적으로 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6. 계속해서 6절 이하에 나오는 4 생물들도 밤낮을 쉬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데, 그 모습들이 4가지의 생물들의 모습과 흡사하다고 했습니다.
「그 첫째 생물은 사자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대한 가장 오래된 랍비 문헌에 의하면, 가장 강한 조류는 독수리며, 가장 센 가축은 소이며, 가장 뛰어난 야수는 사자며, 이들 가운데 가장 강한 존재는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이같이 생물 세계를 대표하는 각각의 4생물이 하나님 보좌 앞에서 그 분을 찬양 경배할 뿐만 아니라, 그분의 모든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자신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을 향해 영광을 돌리는 것이 마땅함은 하나님이 그들을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4생물들이 각각의 모양을 따라 각각의 독특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고, 예수님의 여러 신학자들이 신약성경의 첫 부분에 나오는 4복음과 연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하고 있는데, 그 중에 어거스틴의 학설을 들자면, 마태복음을 사자로, 마가복음을 사람으로, 누가복음을 송아지로, 요한복음은 독수리로 표현하면서 그 각각의 생물은 곧 예수님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7. 이 4장에서 중요한 것은, 사도요한이 주님의 음성에 이끌려 올라간 천상에서 제일 먼저 목격한 것은 모든 생물들과 피조물들이 하늘 보좌에 앉으신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들의 주가 되심을 고백하며, 그 분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며, 그 분께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다 돌려 드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생명과 바꾼 순교로 얻은 금 면류관조차 주님께 드렸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것이 인간의 본분이요 모든 생명들이 지음 받은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머나 교회는 환란과 궁핍에 더하여 옥에 던짐 당하는 시험 속에서도 주님께 대한 충성에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버가모 교회는 악한 자들 앞에 끌려가 죽임을 당할 때에도 주님을 모른다고 하지 아니했으며, 사데 교회는 의의 흰 옷을 더럽히지 아니했으며, 빌라델비아 교회 역시 환란과 시험 속에서도 말씀을 지킨 것은, 장차 천국에 올라가서 자신들을 구원하신 이 하나님을 영원토록 찬양하고자 함에 있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잠시잠깐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이 예배가 지상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까지 이어져야 하는 것은, 우리가 이 일 때문에 지음 받았고, 이것 때문에 구원받았으며, 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우리의 전 생애와 내세에서의 유일한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주일에 한두 번쯤이 아니라, 교회서나 가정에서나 우리가 있는 그 어느 곳에서든지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거룩하고 아름다운 찬양과 감사와 영광을 쉼 없이 돌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