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2.18.영광은 하나님께, 평화는 우리에게(누가복음2:8-14)

[성경본문] 누가복음2:8-14개역개정

8.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9.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제공: 대한성서공회

영광은 하나님께, 평화는 우리에게(누가복음2:8-14/2016.12.18.오전)


1. 최근에는 일본에도 밸런타인데이 같이 서양에서 지키는 절기를 들여와서 장사의 수단으로 삼고 있는데 정작 사람들은 그 날이 무슨 날인지 모른 채 즐기는가 하면, 그 가운데서 믿기 어려운 사실은, 일본 사람들의 다수가 성탄절이 무슨 날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그럴까 하는 마음으로 일본 야후에 들어가서 크리스마스의 의미가 무엇인지 사전을 찾아보았더니, 제일 먼저 올라오는 것이 노엘이라는 단어였습니다.
노엘은 프랑스어로 크리스마스의 의미라고 하면서 음악용어로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탄절을 쳐서 살펴보니 성인이나 위인들의 탄생일을 축하하는 축제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가 어떤 날인지 질문하는 사람에 대한 대답 역시 말도 안 되는 소리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크리스마스는 어린아이들뿐만이 아니라 어른들도 즐기는 일 년 중의 가장 큰 이벤트라는 설명이었습니다.먹고 마시며 놀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딱 어울리는 설명입니다.
그리고 화면에 제1순위로 올라오는 것들이 통신판매 회사들의 홈페이지였습니다.
위키페디아(Wikipedia)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는 절기라고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크리스마스의 어원에 대한 것과 역사적인 고찰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예상치 못했던 이런 결과로 인해 뒤통수를 맞은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세상 사람들은 크리스마스라고 하는 껍데기만 알고 있을 뿐이지, 그 내용이 무엇인지 관심도 없고 알려고 하지도 않으며, 다만 그 날에 너도 나도 즐기면 그만이라는 것입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우리 자녀들이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지 않고 세상에서는 절대로 크리스마스에 대한 기본적인 내용들을 알 수도 없으며, 제대로 된 설명조차 들을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2. 크리스마스, 성탄절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들을 구원하려고 자기 몸을 십자가에 대신 내어주시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날입니다.
그러므로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오셔야만 했는지, 그리고 그 분이 와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행하셨는지 그것을 생각하고 그 분에게 감사하며 찬양하는 것이 진정한 성탄절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탄절의 참 의미를 깨닫고 그래서 감사하며 찬양하기 위해서는 성경말씀의 가르침에 주목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이전에 일어났던 일들을, 그리고 2장은 예수님의 출생에서 시작하여 어린 시절의 성장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동네 베들레헴에서 출생하신 것, 특히 이 사실을 4, 11절에서 거듭 밝히고 있는 것은 그 분이 다윗의 자손으로 다윗의 성에서 태어나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의 출생이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며, 사람들에게는 평화가 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경 말씀대로라면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시면 당연히 전쟁과 분쟁이 그치고 평화가 와야 하는데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가운데서 우리가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평화는커녕 도리어 더 많은 분쟁과 미움과 고통을 경험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그 분이 평화의 왕이고 그 분이 평화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오셨는데, 지금도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피 흘리면서 대적하고 있으며, 어디 그 뿐입니까?
사회생활 자체가 서로 뺏고 뺏기는 분쟁이고 전쟁이며, 우리 가정은 또 어떻습니까?
부끄러운 말이지만 같은 기독교라면서 종파끼리 싸우고 교단끼리 대적하고, 교회 안에서 조차 서로 원수처럼 분쟁하고 있으니 과연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분쟁의 왕이 아니라 평화의 왕으로 오신 것입니까?

3. 왜 우리 가운데 평화가 없으며 이 분쟁의 원인은 과연 무엇입니까?
그 원인을 오늘 우리는 본문 가운데서 찾아야 하고, 또한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잃어버렸던 평화를 되찾아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무섭다는 이 말이 두 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찍이 경험해 보지도 못한 일이 갑자기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이 평소처럼 밤에 양떼를 돌보면서 쏟아지는 잠을 이기기 위해서 서로 대화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이 있는 그 장소가 갑자기 환해지면서 하나님의 천사가 그들 곁에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너희를 위해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한다고 하면서, 지금 베들레헴에는 다윗 왕의 자손인 한 아기가 태어났음을 알려 주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새로운 왕이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소식은 당시로서는 충격적이고 두려운 소식이었습니다.
왜냐면 이스라엘에는 이미 헤롯왕(헤롯 대왕)이 통치하고 있었고, 그 왕은 에돔인으로 머리가 비상하며 매우 잔인하고 악독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집안 혈육까지 무참히 피로 숙청을 일삼던 사람이었습니다.
통치 말기에는 자신의 아들들까지 죽였고, 마2:16절에는 이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베들레헴과 그 주변의 모든 지역에 있는 2살 이하의 아기들을 다 죽일 정도로 잔인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천사다 목자들에게 전해준 다윗왕가의 출생 소식은 불안하고 두려운 소식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천사가 전해 준 소식이 기쁨의 소식이 될 수 있으며 좋은 소식, 즉 복음이 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4. 우리도 살면서 두려운 소식을 많이 듣고 있습니다. 듣기 싫은 소리도 있고 기분 나쁜 소식도 있고, 듣고 나서 후회하는 소리도 들으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 때 마다 여러분은 이런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 나가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구원을 이루시듯이, 우리를 위해 모든 일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롬8:28)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그 분이 모든 것을 선하게 바꾸어 주시며 축복의 기회가 되도록 도우심을 믿고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내 현실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들, 그런 환경들이 우리에게 두려움과 염려의 근원이 되는 것 같지만, 성령으로 잉태한 마리아도 처음에는 무섭고 두려웠지만(1:30),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믿고,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고 하면서,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1:37-38) 고 고백할 때,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며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는 그런 역사가 있는 줄 믿습니다.
목자들에게도 이런 믿음이 있었기에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신 베들레헴으로 달려가 탄생을 축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 자리에서 도망을 갔을 것이고, 어떤 기회주의자들처럼 행동했다면 천사의 말을 듣고 반대로 헤롯 왕궁에 달려가 고자질을 했을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주어진 환경과 조건을 볼 때 인간적으로는 염려와 근심과 두려움이 앞서지만, 믿음으로 순종하고 믿음으로 나아감으로 도리어 평안과 기쁨을 얻으며,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을 체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평안을 만들어 내며 이러한 순종에서 평화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5. 지난 16일에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이 일본 아베 수상의 고향인 야마구찌로 초청을 받고 그곳에서 양국간의 회담을 했습니다.
내용의 골자는 북방 4개 도서를 일본에 반환하고 대신에 서로 경제협력으로 평화를 구축하자는 것입니다.
과연 양국간에 평화가 지속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아름답고 귀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푸틴 대통령이 국가간의 소중한 약속시간을 2시간이나 지각하면서 나타난 것을 보면서, 과연 이 사람의 가슴속에 이웃 나라와 더불어 누리는 평화를 원하는 마음이 있을까 의심이 들었습니다. 왜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인류 가운데서의 진정한 평화는 사람의 힘으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실 때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평화의 왕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 분은 오셔서 평화를 이루기 위해 헤롯처럼 살육하고 탄압하고 공포정치로 짓눌러 왕권을 강화함으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신을 낮추시되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에 순종함으로 이루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평화의 와인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고도 진정한 평화를 이루지 못하고 도리어 분쟁 가운데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본문 14절의 말씀대로 영광은 하나님께 돌리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살아갈 때 평화를 이룰 수 있는데, 우리는 반대로 달려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도 할 수만 있으면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하고, 하나님의 자리에 내가 서서 그 영광을 가로채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우리 주위에는, 특히 작금의 대한민국 정치 상황에서 보면, 평화를 외치는 자들이 도리어 더 분쟁하고 선동적이며 편파적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야 하는데 자기 영광만을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와 국가를 분쟁의 장소로 만들고 소란스럽게 만드는 장본인들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자기 본연의 사명, 자기 자리를 떠난 사람들이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6. 나무는 처음 자리에 그대로 심겨진 그런 나무가 아름답고 건강합니다.
그런데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옮겨 심겨진 나무는 건강하지 못하고 아름답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어머니는 아이들에 대한 어머니로서의 사명의 자리가 귀하고 아름답고, 아내와 남편의 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 14절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이라는 말씀이 가슴에 와 닿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소식을 제일 처음들은 사람들이 밤에 자기 양떼의 곁을 지키던 목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원래 이 기쁨의 좋은 소식은 성전에 있는 제사장이나 서기관 같은 종교 지도자들이 먼저 들어야 할 소식이고, 양떼 가운데서 밤을 새우는 목자들이 아니라 왕궁에서 먼저 들어야 마땅한 소식입니다.
그러나 그런 곳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들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는 목자들이었기 때문에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강탄을 제일 먼저 알림으로 그들의 축하를 받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대단한 자리일수록 사회적으로 대단한 사람들을 초청하고 그들의 가진 배경이나 권력이나 소유의 힘으로 내가 마련한 자리가 빛이 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도 반색을 하며 반기며 자리를 빛내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는 이 말씀처럼 자신의 기쁘신 뜻을 따라 자신이 택하신 사람들을 먼저 베들레헴으로 부르셨습니다.

7. 그렇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이란 어떤 사람들입니까?
우리는 그 대답을 이 땅에 우리를 위해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해서 얻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그는 평화의 왕으로 오셨지만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나실 정도로 겸손한 방법으로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할 때 얼마나 비천하고 얼마나 무능하고, 평화의 왕이라고 하면서 그 모습과 처한 환경이 얼마나 부끄러운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것을 개의치 않으셨고, 도리어 천하고 낮은 곳에서 인생을 시작하심으로 가난하고 연약하고 비천한 자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일본에 들어온 복음은 사무라이 계급을 통해서 왔기 때문에 그래서 복음이 저변으로 확산되지 못했다고 하면서, 반대로 한국은 기독교 복음이 가난한 평민들을 통해서 전파되었기 때문에 일본보다 복음화가 빨라질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은 아래서 위로 올라가면서 확대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유는 복음의 근본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장 낮은 곳에서 그 생애를 시작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돈이 있어야하고 지위가 있어야 하고 많은 사람들과 인맥을 맺어야 복음도 전파되며 큰일을 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그기에 비하면 예수님의 생애는 너무 초라했습니다.
태어나실 때에도 마구간에서 구유에 누워 있었고, 33년간의 생애를 통해서 인자에게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실 정도로 가난하고 어렵게 사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이 복음은 온 세상에 전파되었고,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축복을 누리며 살고 있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8:9) 고 말했습니다.
그 분의 가난하심은 겸손에서 나온 것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약하고 가난한 자까지도 구원받고 영원한 축복을 받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8. 또한 그 분은 권력이나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특별한 어떤 힘으로 이 평화를 이루시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 구원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이 사실에 대하여 이사야 선지자는 미리 말하기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53:5) 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일하는 사람을 어리석은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자신은 앉아서 머리를 쓰고 사람들을 돈과 권력의 힘으로 부리는 것이 경영자의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과 일본이 다른 것은, 한국 사람들은 자녀들이 회사에 들어가 관리직에 앉으면 성공했다고 생각하지만, 일본의 경우는 영업사원이 회사에서 제일입니다.
돌아다니면서 영업의 경험을 쌓은 사람들이 결국에는 경영자로 성장하고, 바깥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수많은 문제와 부딪히면서 성장하는 사람들을 일본 회사는 신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을 이루시는 일, 이 땅에 참 평화를 가져오는 일에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지 않고 스스로 일하셨고 자신을 제일 먼저 십자가에 희생하신 분입니다.
그 분은 분명 통치하시는 왕으로 평화의 왕으로 오셨지만 사람들의 통치 방법과는 달랐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도 예수님의 제자요 하나님의 자녀라면 당연히 그 분의 방법을 따라야 마땅할 것입니다.

8. 이 세상을 위한 우리 하나님의 목적은 샬롬이고 평화입니다.
그러나 이 평화는 세상 사람들의 방법으로는 결코 이룰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인류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으며 우리의 현실이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우리 가정에서부터 시작해서 나라와 민족, 그리고 온 인류 가운데서 참 평화의 사명을 이룰 수 있습니까?
죄로 말미암아 깨어지고 무너진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입니다.
인간은 원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 목적으로 지음 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사도바울의 고백대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던지 다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고전10:31).
그런데 서두에서 말씀드린 대로 이 땅에 평화의 왕이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평화를 누릴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이 받으실 그 영광의 자리에 우리가 앉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는 평화대신 분쟁이 반복되며 화평대신 고통과 두려움에 잠겨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 일을 회복하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고, 이 일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탄절은 산타의 선물을 기다리는 그런 계절이 아니라, 날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날입니다.
그러므로 참 성도는 성탄절을 통해서 스스로를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일에 힘쓰는 그런 계절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분의 베푸신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하며 찬양할 때, 우리 가운데 참 평화가 넘치는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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