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3.22.그 법대로 하면(요한복음19:1-16)

[성경본문] 요한복음19:1-16개역개정

1.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

2.군인들이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3.앞에 가서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손으로 때리더라

4.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하더라

5.이에 예수께서 가시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

6.대제사장들과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

7.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8.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

9.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되 너는 어디로부터냐 하되 예수께서 대답하여 주지 아니하시는지라

10.빌라도가 이르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11.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 하시니라

12.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13.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가서 돌을 깐 뜰(히브리 말로 가바다)에 있는 재판석에 앉아 있더라

14.이 날은 유월절의 준비일이요 때는 제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15.그들이 소리 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이르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

16.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그들에게 넘겨 주니라제공: 대한성서공회

그 법대로 하면(요한복음19:1-16/2015.3.22.오전)

1. 우리는 지금까지 법이라고 하면 정치가나 혹은 직업적인 전문가들이 다루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법이란 무엇이며 혹은 법의 정신은 무엇인가? 등의 법에 대한 사고는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느껴집니다.그렇기 때문에 법에 대한 어떤 정의를 내린다고 할 때, 생각 이상으로 그 대답이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만큼 중요하고 또한 복잡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법에 대해서 논한다는 것은 매우 조심스러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회가 있는 곳에 법이 있다는 말을 전제로 해서 생각해 본다면, 법이란 사회성을 가진 사람들의 행동과 사고를 판단하는 기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갑자기 제가 법에 대하여 말하게 된 것은 오늘 본문의 내용을 읽어 내려가면서 한 가지의 의문점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는 유대인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 7절에 보니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 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말하는 법대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이 사안이 당시의 유대인들뿐만이 아니라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매우 심각한 문제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법이란 무엇입니까?
왜 그들의 법대로 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죽어야 하는가에 의문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둘러싸고 적어도 3가지의 법이 서로 비교되거나 충돌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대제사장 무리들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법과, 총독 빌라도를 중심으로 하는 이스라엘을 억압하고 있는 로마의 법,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하시는 하나님 중심의 법을 볼 수 있습니다.

2.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된 이 유대인들의 법은 어떤 법이며, 그 법의 출발점은 어디서부터입니까?
이스라엘의 법은 모세의 5경인 창세기에서 신명기에 이르는 여호와의 말씀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그곳에 기록된 내용은 종교와 도덕을 망라하는 10계명을 시작해서, 성전을 중심으로 행해지는 예배에 대한 의식들, 그리고 각종 계약에 대한 법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이러한 법은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고 축복하시는 그런 목적을 가진 하나님의 계명, 즉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계약사상이 그 중심에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무엇이 우리의 눈에 들어오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는 유대인들의 협박과 공갈, 한 마디로 무법천지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지상에서의 종교가 존재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사랑으로 이웃을 섬기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사회에 공의를 실현하는 것, 그리고 최종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향해 그분께 모든 영광을 돌리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심문하고 죽이기 위해서 빌라도 법정에 세운 종교지도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이 유대인들의 모습이 무엇입니까?
인간의 욕심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법에 대한 도전장을 내고 있는 것입니다.

3. 본문의 말씀을 읽어내려 가면서 느낄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종교가 인간의 욕심에 사로잡혀 한 번 타락하기 시작하면 얼마나 비참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가에 대한 좋은 사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유대인들이 하는 행동이 무엇입니까?
율법의 말씀, 즉 그들이 소유하는 이 법을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을 범죄자로 몰아서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고 하는 가장 중요한 죄목이 무엇입니까?
7절에 보니,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 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예수님 편에서 보면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바른 말씀을 하셨지만, 종교지도자들의 편에서 보면 그는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빙자하고 있는 사기꾼에 불과한 것입니다.
정말 백번 양보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 사기꾼에 불과하다면 당연히 그들의 법대로 하나님을 모독한 죄로 죽어야 마땅한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의 법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빌라도의 판단은 무엇입니까?
빌라도는 여러 번 예수에게서 죽임을 당할 만한 죄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세상 법정이 아무리 썩어도 죄 없는 자를 죄인으로 몰아 죽음에 이르게 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래서 법에 관한 남다른 소견과 일반적인 상식에 기초한 빌라도가 본 예수는 유대인들의 진노를 사서 죽임을 당할 만한 그런 죄를 지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유대인들이 보는 예수와 로마 사람이 보는 예수는 다를 수 있지만, 당신의 정치적인 상황이나 종교적인 상황을 볼 때, 유대인들의 행동은 분명 도를 넘는 행동임에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4. 왜냐면 사도바울은 이 세상의 법과 권세에 대하여 주저함이 없이 분명한 결론을 통해서 우리에게 바른 답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롬13:1-2절에 보면,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로 보면 유대인들의 법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이 유대인들의 법 위에 로마의 법, 로마의 권세를 세우셨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로마의 법을 존중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행동은 어떤 결과를 가져오고 있었습니까?
총독 빌라도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게 할 만큼 그들은 집요하게 공갈과 협박을 퍼 부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늘 로마에 적대적이었고, 로마를 원수로 생각하던 사람들인데, 언제부터 로마 황제 가이사의 충신이 되었단 말입니까?
예수에게는 죄가 없다고 판단하여 그를 놓아 주려고 애를 쓰고 있는 빌라도를 향하여 예수를 놓아주면 너는 황제의 충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로마의 속국이 된 자신들의 법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일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로마의 반역자로 몰아 죽이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빌라도의 반응은 감당하기 어려운 두려움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세상 법정의 한계점이라는 사실입니다.

5. 유대인들의 법이나 로마 사람들의 법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구원의 주가 되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바로 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12절에서 빌라도 아무리 힘을 쓰고 애를 쓰도 소용이 없으며 문제를 바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간혹 어떤 기독자들이 세상 법정에 가서 일반 도덕적, 사회적인 문제가 아닌 교회 문제나 교회의 정치적인 문제로 재판을 받는 일들이 있는데,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 이유는 그리스도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서 어떻게 바른 대답을 들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 4절에 빌라도는 확실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다" 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권한 안에 있는 이 재판에 대한 확실한 고백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독 빌라도는 자신의 확신에 따르는 공정하고 바른 재판을 할 수 없었다는 사실에서, 세상 법정의 한계점을 다시 한 번 절감할 수 있습니다.
세상 법정은 군중이라는 세력에 약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두려운 마음에 백성에게 굴복하여 예수님을 그들이 마음대로 하도록 내어 주었고, 자신의 권한을 포기하는 어리석고 불쌍한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일본이 제2차 대전에 패배하고 나서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리고 있을 때, 온 나라 안에 쌀 암매가 극성을 부리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야마구찌 요시다다(山口良忠,1913-1947)다 라고 하는 유능한 젊은 판사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정부는 쌀 암거래를 불법으로 선언하고, 그것을 단속하기 위해 식량관리법을 만들고, 그런 사람들을 검거하거나 기소하는 일을 야마구찌 요시다다에게 맡겼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의 형편으로는 누구라도 암거래가 되고 있는 쌀을 먹지 않으면 생명을 연명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일을 맡은 판사는 스스로 국가가 금하는 불법 거래를 통한 쌀은 먹을 수 없다고 결심하고, 심지어 형제들이나 이웃 사람들이 가져다주는 불법 거래된 쌀 까지 거부한 채로 식량을 자급자족하다가 영양실조로 쓰러져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는 자신에게는 이렇게 엄격했지만, 양식문제로 재판을 받는 사람들을 동정하여 정상 참작을 해서 매우 가벼운 벌만 내렸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과 가족의 생명을 걸고 국가의 법을 지켰고, 법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지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빌라도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6. 오늘 본문에서 또 한 가지의 법이 나오는데 그것은 11절에서 볼 수 있는 그리스도의 법, 곧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그런데 이 그리스도의 법은 어디서 온 것이며 그 근원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 답은 예수님의 대답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자가 없었으리라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 고 하셨습니다.
유대인의 법이나 로마의 법과 대조되는 그리스도의 법은 무엇입니까?
그 특징이 위에서 주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곧 만물의 주권자가 되시는 하나님에게서 나온 법이라는 사실과 동시에 그 분의 법은 반드시 악행자에게 엄중한 심판이 있겠다는 사실도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것이 또 다른 특징입니다.
세상 법정의 한계점은 주어진 환경과 조건에 약하다는 것입니다.
단적인 예로 독재자나 성난 군중들 앞에서는 바른 재판을 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법정에 죄인으로 서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유대인들은 법을 핑계로 삼아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아갔고 결국에는 죄 없는 자의 죽음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들의 법대로 하면 예수님을 죽일 수도 없으며, 죽여서도 안 될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법을 빙자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7.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영화 명량을 통해서 나타나는 이순신 장군이 왜구의 침략에서 나라와 민족을 구원하려고 할 때, 왜 그렇게 적이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순신 장군에게는 3가지의 적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일본이라는 침략자의 모습을 가진 적이 있었고, 둘째는 법의 탈을 쓴 국가 내부에 자리 잡고 있는 적이 있었고, 셋째는 이러한 대적들 앞에 굴복하고 좌절하려고 하는 자신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또 다른 자신의 연약한 모습의 적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볼 때, 사람이 의롭고 거룩한 일에 힘을 쏟을수록 적이 많다는 사실과, 그러므로 사람이 사람답게 살고 바로 산다는 것, 특히 믿음으로 아버지의 거룩한 뜻을 이루고자 하는 삶의 몸부림이 있을 때에 얼마나 많은 걸림돌과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넘어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아무리 귀하고 아름다운 법을 만들어도, 반드시 그 법은 강한 자에 의해서 찢어지고 구멍이 뚫리고 깨어지며, 그 법을 이용해서 더 많은 악행들이 나타난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법은 반드시 있어야 하지만, 그 법 이전에 법을 지키고자 하는 준법정신 보다 더 위에 있는 것, 곧 우리 자신들 속에 있으면서 우리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법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통해 우리 안에 새로운 법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법을 어떻게 지킬 수 있으며, 그 법을 통해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성취할 것인가에 대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교회 안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모였는데 그 가운데 제일 무섭고도 불쌍한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법대로 하자는 사람들입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법대로 하면 다 잘되고 문제가 없을 것 같지만, 세상에서 법대로 완벽하게 시행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으며, 만일 우리가 법대로 한다면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반대로 교회 안에서 제일 귀하고 아름다운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법도 중요하지만 모든 일에 기도하면서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사람입니다.

8.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법이 없어도 된다는 것입니까? 하고 물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세상의 법도 지키면서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이중적인 부담을 가지고 살아야 그것이 바로 살 수 있는 비결인 것입니다.
이런 삶은 결코 내 힘으로 감당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그런 우리에게 큰 힘이 되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법 자체는 불완전하지만 더 큰 문제는 불완전한 사람들의 손에 이 법이 들려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한 번도 법이 잘못되었다고 항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가장 민감한 문제점의 하나인 세금 문제에 대해서도 말씀하시기를, "가시아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마22:21) 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법도, 로마의 법도 다 잘못되었으니 고쳐야 한다고 항변하시거나 저항하지 않으셨습니다.
있는 그대로 다 받아들이고 순응하셨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에게는 더 크고 놀라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한 사람도 예외가 없이 법대로 하면 다 죽을 사람들입니다.
법대로 하면 용서 받을 사람이 없습니다.
법대로 하면 그 법 때문에 온 세상은 무너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러한 법을 초월하는 더 위대하고 놀라운 법을 성취하시고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빌라도의 법정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대신하여 죄인으로 죽임을 당하심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만족시키는 사랑의 법 그 자체가 되셨습니다.

9. 법에 관한 글을 읽어보니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자유란 법이 허용하는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권리이므로, 만약 어떤 시민이 법이 금하는 바를 행할 수 있다면 다른 시민도 역시 그 가능성을 가지게 될 것이며, 따라서 그는 자유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그 본성으로 볼 때 민주정체와 귀족정체는 결코 자유스러운 국가는 아니다. 그것은 권력이 남용되지 않을 때에만 존재한다. 그러나 경험에 의하면, 권력을 가진 자는 예외 없이 그것을 남용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법을 집행하는 사람도, 법을 지키는 사람도 다 법안에 있고, 그 법 아래에 있어야 법은 국가를 움직이는 시스템이여 원동력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법을 무시하고 저항하고 그것을 흔드는 사람들은 자신이 흔들고 있는 그 법 아래에서 살 자격이 조금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문제가 있는 법이라도 그 법 아래에서 순응하고 살아갈 때, 우리는 더 좋은 법을 만들 수 있으며, 이러한 법이 더 훌륭하고 귀한 인재를 양성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이런 법과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우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6:2) 고 하였고, 사도베드로도 말하기를,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벧전4:8) 고 했습니다.
유대인과 로마 사람들은 법을 만들고 그 법을 제 마음대로 남용하여 무죄한 자를 죄인으로 죽였지만,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따라 순종의 길로 나아가심으로, 십자가에서 순종을 통해 우리에게 하나님의 법아래 있는 자들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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