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3.29.다 이루었다 하시고(요한복음 19:28-30)

[성경본문] 요한복음19:28-30개역개정

28.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29.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30.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제공: 대한성서공회

다 이루었다 하시고(요한복음 19:28-30/2015.3.29.오전)


1. 저는 어릴 때 생각하기를 모세가 애급의 바로 왕 앞에 섰을 때, 왜 바로가 모세를 죽이지 않았을까 이것이 궁금했는데, 성경에 보면 그 답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출4:16절에 보니, "너는 그에게 하나님같이 되리니" 하였으니, 모세는 애급 왕에게 신과 같은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루하루를 신앙을 잃지 않고 감사의 생활을 할 수 있는 이유도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그 은혜의 결과입니다.
왜냐하면 마귀는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도 우리를 공격하는데, 반드시 우리의 약점과 연약한 부분을 공격해서 낙심하고 근심하게 만들어서 신앙생활을 바로 하지 못하도록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을 지키며 바른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내 힘이나 내 자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하심의 덕분인 줄 믿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은 33년이라는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출생부터 시작하여 수도 없이 생명의 위협을 받으셨지만, 하나님은 그가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완벽하게 보호해 주셨고, 때로는 천사를 보내어 힘을 돕기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우리처럼 연약한 육신을 입으셨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며 순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9장에서 보면 예수님의 가상칠언, 즉 십자가에서 하신 7번의 말씀 중에 3가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첫째가 사랑하는 제자에게 모친 마리아를 부탁하신 말씀으로, 26절에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고 하신 말씀과, 제자에게 "보라 네 어머니라" 는 말씀, 두 번째는 본문에 나오는, "내가 목마르다" 는 말씀과 그리고 최후의 한 마디인 "다 이루었다" 는 말씀입니다.
종려주일과 고난주간을 맞이하면서, “다 이루었다”는 이 말씀을 중심으로 은혜를 받기 원합니다.

2. 사람에게는 누구나 성취에 대한 욕구가 있습니다.그러나 내가 원한다고 소원을 이루고 꿈을 이루고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도리어 원하지 않는 실패와 좌절, 고통 속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생애를 마감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틀림없는 승리자요 원하는 것을 성취하신 분입니다.
그렇다면 한 평생 고난의 길을 걸어오신 그 분이 어떻게 승리자요 자신의 원하는 것을 성취할 수 있었습니까?
예수님도 우리처럼 연약한 육신을 입으시고,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난의 길을 걸어오시면서 인간이 체험할 수 있는 모든 고난과 수욕을 다 당하셨는데 어떻게 그 분이 승리자가 될 수 있었습니까?
그 결정적인 증거가 “다 이루었다” 는 십자가에서 하신 마지막 말씀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다 이루었다는 말씀입니까?
예수님이 이 세상에 인간의 육신을 입고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이 그 분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었고 이유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구원의 계획을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성취시켜 나갔습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아버지의 뜻에 철저하게 순종하심으로 성취하셨습니다.

3. 그러므로 그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신 이 말씀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곧 온 세상의 죄를 위한 화목 제물로 하나님이 그의 죽음을 통해 만족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 인생이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분명한 답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28절에, “내가 목마르다”고 하셨는데, 그 분의 목마름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신문을 받으시면서, 또한 십자가를 지고 갈보리 언덕으로 올라가시는 과정에서 온 몸이 채찍을 맞아 찢어지고 살이 터지고 피가 흐르다가 엉겨 붙었는데, 물 한 모금 제대로 마시지 못하신 채로 이번에는 양 손과 양 발에 대 못을 박아 십자가에 달리셨으니 그 분의 목마름이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한 마디 한 마디를 자신이 원하시는 대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성경에 예언된 대로 말씀하셨다는 사실은, 그 분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얼마나 철저하였는지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순종을 통해서 우리에게 나타내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순종은 세상의 물질이나 명예나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 귀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야말로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우며 소망에 넘치는 것인지 보여 주신 것입니다.

4. 그런데 그 분의 십자가는 이상하게도 강도 두 사람 가운데 서 있었습니다.
이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유대인들의 의도는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백성을 속이고 현혹하는 사기꾼이요 강도 같은 존재임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육체적으로 고통당하는 것과 말로 다할 수 없는 수치를 당하는 것과 어느 것이 더 괴로운 것인가 비교하는데, 예수님은 십자가의 사건을 통해 이 두 가지를 한꺼번에 다 당하셨습니다.
인간의 육신을 입고서는 어느 것 하나라도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이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 자신이 만드신 만물 가운데서 그는 다른 피조물들처럼 똑같은 상황에 놓이셨고, 다른 인생들이 평생에 걸쳐서도 다 경험할 수 없는 고통과 수치를 십자가를 통해 다 당하셨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이 지상에서 옳은 교회의 표시를 고난에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서 초안에 기록하기를, 교회를 가리켜,「복음으로 인하여 쫓기는 순교자의 집단」 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독일의 신학자 본 훼퍼는, 십자가를 지지 않으며 사람들에게 생명을 내어 주지 않는 자는 그리스도와의 공통성을 잃은 사람이라고 하였고, 그는 이미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따라 함께 고난의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생명을 다시 얻은 사람이고 했습니다.
 
5. 마가10장에 보면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한 부자 청년이 나옵니다.
그 때 예수님이 이 청년을 향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19절에 보면 “네가 계명을 아노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고 할 때, 그 부자 청년은 대답하기를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 다고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다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부자 청년은 근심하면서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원하는 영생을 얻자니 지금 소유하고 있는 재산을 포기할 수 없고, 그렇다고 지금 소유하고 있는 물질이 자신에게 만족을 주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마 죽을 때 까지 이 양쪽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온전한 답을 얻지 못한 채로 불행 중에 죽었을 것입니다.
많은 재물이 그 청년이 마땅히 가야만 하는 길을 가로 막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말씀에 순종하심으로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하늘의 모든 영광을 버리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무엇입니까?
죄인이 용서받고 구원을 얻는 것이요,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그 저주 가운데서 온 인류가 구원받아 영생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이었고, 십자가를 지신 이유였습니다.

6. 사람들은 십자가를 고난과 수치의 상징으로 생각하지만, 옛 순교자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도리어 고난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야말로 고난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 고난의 잔이 나에게서 지나가기를 아버지께 구했으며, 하나님은 아들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어떻게 들어 주셨습니까?
그가 스스로 고난의 잔을 마심으로 그 당면한 고난을 넘어가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를 지는 것은 곧 십자가를 극복하는 것이요, 고난을 향해 앞으로 나아갈 때 그 고난은 지나가는 것이요,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성취할 수 있었고, 승리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다 이루었다” 는 이 말은, 십자가의 고난과 수치를 극복하고 이긴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의 선언이었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그는 지나치게 무모할 정도로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뜻에 순종하여 나아갔습니다.
친척과 아비 집과 본토를 버렸고, 그리고는 갈 바를 알지 못한 채로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으로 만족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계속해서 아브라함을 다시 부르실 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100세에 얻은 사랑하는 아들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때에도 무모하고 어리석을 정도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는 하나님의 약속이 아들이삭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순종하여 얻은 결과는 무엇입니까?
가장 귀한 것, 가장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께 드림과 동시에 또한 사랑하는 아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것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순종을 통해 받은 축복이었습니다.

7.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도 원하지 않는 고난의 십자가, 수치와 죽음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고, 그 분의 아들로서 완벽한 순종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적인 가치관과 삶의 방식으로 십자가를 바라보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사건입니다.
제가 베트남을 방문하고 감동받은 사건은 1975년 공산화가 된 이후에 베트남의 교회가 죽거나 사라진 것이 아니라 도리어 3배로 성장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바로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사건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목마름을 강조함으로 예수님의 육신적인 고난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십자가의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특히 교회를 향한 메시지가 무엇인지 제대로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위험하고 불행한 일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강조하기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 (고전1:18) 이라고 했습니다.
이번 고난 주간을 앞두고 예수님의 목마름에 집중하면서 그분의 십자가의 고난에 함께 동참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독일의 신학자 본훼퍼는 말하기를, 우리가 무엇을 소유하고 얻었던지 간에 그것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주어진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며, 우리가 가는 길도 그리스도를 통해서 갈 수 없다면 그것은 잘못된 길이라는 그 말에 제 가슴에 못이 박히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지고 가는 십자가, 그 분과 함께 걸어가는 고난의 길이 얼마나 값지고 소중하며 또한 아름다운 일인지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의심 한 점 없이 분명히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고난 주간을 통해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처럼, “다 이루었다” 고 고백할 수 있는 순종의 사람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コメントを残す

メールアドレスが公開されることはありません。 が付いている欄は必須項目で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