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7.21.애통하는 자의 복(스가랴12:10-14)

[성경본문] 스가랴12:10-14개역개정

10.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11.그 날에 예루살렘에 큰 애통이 있으리니 므깃도 골짜기 하다드림몬에 있던 애통과 같을 것이라

12.온 땅 각 족속이 따로 애통하되 다윗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들의 아내들이 따로 하며 나단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들의 아내들이 따로 하며

13.레위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들의 아내들이 따로 하며 시므이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들의 아내들이 따로 하며

14.모든 남은 족속도 각기 따로 하고 그들의 아내들이 따로 하리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애통하는 자의 복(스가랴12:10-14/2013.7.21. 오전)

1. 이규태의 코너에 보면 "좌전과 우전(左錢右錢)" 이라는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순흥땅의 만석꾼인 황부자 부부가 하루 한 끼만 먹고 버려진 땅을 개간하고, 밤새는 줄 모르고 길쌈을 하여 마침내 거의 만석꾼이 되었는데, 그는 돈궤를 두 칸으로 나누고 용도에 따라 나누어 썼다고 합니다.
친구가 찾아와서 아들이 과거보러 가는데 노자 돈을 빌려 달라고 해서 돈궤를 열어 보더니 지금은 돈이 없으니 며칠 기다려 달라고 하는데 오른쪽은 비어 있었지만 왼쪽은 가득한 것을 본 친구는 돈이 저렇게 많은데 왜 없다고 하느냐고 따지니, 과거를 치르는 좋은 일에 악전을 쓸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부부가 피땀 흘려 열심히 번 돈은 오른쪽에 넣어 두고, 소작으로 받은 것과 돈이나 곡식을 빌려 주고 얻은 이익은 악전이라 하여 왼쪽에 넣어 두고 용도에 맞추어 사용했다고 합니다. 제 수중의 돈도 그 질을 엄격하게 따져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한국의 선비사회는 물론이고 서민들 가운데서도 있었던 아름다운 정신문화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사회는 돈의 출처나 질을 따지기는커녕 돈에 대해서는 다다익선(多多益善)의 사상이 팽배하여 많은 소득을 소유하면 유능하고 훌륭한 사람으로 치부되고, 아무리 덕과 인품이 높고 사상이 훌륭해도 가진 것이 없으면 소인배요 무능한 존재로 인식되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신23:18절에 보면 "창기의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아무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 이라 했고, 19절에는 형제에게 돈이나 식물을 빌려 주고 이자를 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자를 받을 요량으로 교인들끼리 돈을 빌려주거나 목돈 마련을 목적으로 곗돈 놀이 하는 것은 아무리 세상이 바뀌었다고 해도 이것은 하나님 앞에 벌 받을 일입니다.
이로 보건데 돈의 출처나 질을 따지는 것은 선비의 정신 이전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에 필수적인 사항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경건하게 살려고 애를 쓰는 기독교인들은 세상에 만연한 윤리적 부패와 영적 무기력에 알게 모르게 제 자신이 날로 악화되고 있는 영적 환경에 물들어 가고 있음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전에는 심각한 범죄로 취급받던 일들이 오늘날에는 단순한 유행처럼 여겨지고, 윤리와 도덕의 가치관은 거의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사물을 판단하고 행동을 판단하는 기준이 말씀이나 도덕이나 사회적인 윤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좋으면 그것이 곧 선한 것이고 내게 나쁘면 그것은 악이라고 여기는 것이 보편화되고 말았습니다.
왜 사람들이 이렇게 자기중심적이 되고 말았습니까?
더 이상 하나님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그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는 여인이 그 태에서 난 젖먹이 자식을 잊지 못하는 것처럼, 비록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죄인 중의 괴수가 되어도, 하나님은 우리를 잊지 못하시며 우리를 당신의 손바닥에 새기셨다고 하셨습니다(사49:15-16).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도 하나님은 우리를 떠나지 못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잊고 살아도 하나님은 일분일초라도 우리를 잊으신 적이 없이 우리를 온전히 사랑하셨습니다.
비록 탕자처럼 아버지의 품을 떠나고 제 마음대로 살았다고 해도, 그래서 회복 불능의 상태에 빠진다 해도, 우리 인생이 만신창이가 되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가 그에게로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시대 시대마다 회개할 마음을 주사 영적으로 각성하게 하셨고, 마침내 큰 부흥의 역사를 일으킴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3. 이 같은 하나님의 사랑, 이 같은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향한 회복의 역사가 학자 에스라를 통한 이스라엘의 부흥 운동이요, 사도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하루에 3천여 명이 회개하고 세례 받은 사건이 바로 그것입니다.
영국에서 요한 웨슬레 이후에 부흥운동의 열기가 사라지면서, 교회들 마다 교인들은 현저하게 줄어들었고, 사람들은 종교적인 일에 무관심하였고, 교회는 형식주의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엄청난 영적 기갈에 사로잡혀 있을 때, 웨일즈 지방의 광산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회개 운동이 있었습니다.
이 회개운동은 마침내 1904년의 큰 부흥운동으로 이어졌고 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에 10만여 명의 사람들이 회개하고 구원받았다고 합니다.
밤이고 낮이고 구원받는 사람들은 늘어갔고, 사람들은 모여서 여기저기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면서 훔쳐간 물건들을 돌려주었고, 술집들은 손님이 없어 문을 닫고,
경찰들이 하는 일이 없어졌으며, 이 부흥의 불길이 다른 지역으로 다른 나라로 번져가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의 1907년에 평양을 중심으로 일어난 대 부흥운동이 바로 그것입니다.
1월7일, 평양의 장대현교회에 모인 1500명의 사람들이 회개 기도함으로 한국 교회의 부흥은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회개할 마음을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 사실을 오늘 본문 10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라"는 것입니다.
사회는 물론이고 교회마저 심각한 영적 질병에 시달리고 있는 이때에,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영적인 회복인 줄 믿습니다.
  
4. 그렇다면 영적인 회복은 어떻게 옵니까?
예수님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마5:4)이라 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울어야 합니다. 왜 울어야 합니까?
내 죄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입니다.
내 죄가 그의 손발에 못을 박았고, 내 허물이 그의 옆구리에 창을 찔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내 죄가 하나님의 아들까지 죽이는 더 큰 죄를 낳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독자를 잃은 어미가 그 아들을 생각하고 통곡하듯이, 애굽인들이 장자의 죽음을 슬퍼하듯이 그렇게 울라는 것입니다.
11절의 "무깃도 골짜기 하다드림몬에 있던 애통"은 무엇을 말합니까?
요시아 왕이 므깃도에서 애굽과의 전쟁에서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죽은 사건으로, 이 때 전 이스라엘이 그를 위하여 크게 애곡하던 사건을 말합니다(대하35:20-27).
이것은 한 두 사람의 개인적인 회개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회개운동을 말합니다.
이것은 전 민족적, 전 국가적인 회개 운동을 말합니다.
오늘 일본의 참의원 선거가 있는데 여당 자민당은 국회의석 과    반수를 넘겨 헌법을 개정하고, 아베노믹스 경제정책을 통해 일본을 변화시키려고 안간힘을 쏟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을 변화시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이외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왜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사람이 변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정책이나 물질이라도 다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변하지 않는데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면 재앙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리당략에 놀아나며 거짓말하는 정치인들부터 변해야 합니다.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탐욕에 눈이 먼 사업가들도 변해야 하고, 모든 것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우리들도 변해야 하고, 부모를 무시하고 제 마음대로 사는 우리 자식들도 변해야 합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오직 십자가의 복음뿐이기 때문입니다.

5. 이러한 변화를 위해서 오늘 본문은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10절에 보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하였는데, 여기 찌른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다카르」로, 이는 조롱하고 멸시하는 정도를 넘어서 상대방을 칼로 찔러 깊숙이 관통시켜 죽이는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일방적으로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늘 거역하며 대적했습니다.
이러한 대적과 거역 불순종이 마침내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스라엘만의 범죄가 아니었습니다.
곁가지와 같은 우리도 같은 죄에 참여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독자를 잃은 어미의 슬픔이 얼마나 큰 것인가는 당해 본 사람만이 압니다.
누가7장에 보면 나인성 과부가 독자를 잃고 통곡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런데 아들의 관을 붙잡고 따라가며 절망에 빠져 울던 그 과부의 눈물과 애통하는 마음을 보시고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듯이 그녀의 아들을 다시 살려 주셨습습니다(눅7:11-16).
우리가 주목해야 할 중요한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눅7:13절에,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를 주님은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울고 통곡해야 하는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볼 때 신자는 울어야 합니다. 애통하는 심령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눈물이 없는 신자는 신자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지 않으면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6. 하나님의 백성이 받는 복은 스가랴 12장에서 볼 때 2가지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첫째는 1-9절까지의 말씀으로, 원수들을 정복하고 예루살렘의 영광을 회복하는 외적인 축복이요, 그 둘째는 10-14절의 말씀으로 각 사람의 심령에 부어주시는 애통하는 기도의 축복입니다.
사람들은 기도가 무슨 축복이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불타는 기도, 회개를 불러일으키는 심령의 기도는 영적인 각성이요, 영적인 부흥이요, 사람의 전인격을 새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만이 맛볼 수 있는 귀한 은혜의 체험인 줄 믿습니다.
애통하는 심령은 회개의 역사를 통해 깨끗함을 얻으며, 깨끗한 마음은 마침내 하나님을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2-14절에 보니, 이 애통함을 따로 따로 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흔히 사람들은 남이 울면 같이 울고, 따라 울고, 흉내 내어 울기를 잘합니다.  
이것은 일종의 군중심리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란 분위기에 약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회개의 역사는 남들이 울지 않을 때에도 울 수 있어야 합니다.
군중 속에 있을 때에나 홀로 있을 때에도 장소와 시간을 가리지 말고 울어야 합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신자의 눈물을 귀하게 보시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죄인의 괴수라도 자기의 죄를 원통히 여기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울면,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감동을 받습니다.
이것이 우리 하나님의 강점이자 약점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7. 본문 10절에서 직접 나오지는 않지만,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의 이 말씀은 그야말로 성령의 역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전무후무한 불법한 살인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전 예루살렘이 이 일에 참여했습니다.
세월이 흐른 후에 그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 시작했고, 이 책임이 전 예루살렘의 사람들에게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깊은 탄식 가운데 회개와 용서를 빌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회개의 역사를 통해서 그들 가운데 새로운 영과 은사들이 부어짐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행전에 기록된 오순절의 성령 강림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할 마음을 불러일으키고, 회개할 마음을 불러일으키고, 그리고 십자가 제단에 눈물을 쏟도록 은혜를 베푸시는 이는 성령이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회개의 역사는 결코 내 힘으로,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님만이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시고, 회개할 마음을 주시며, 구원과 은혜를 사모하는 간절한 마음을 주시고, 마침내 우리의 전인격을 새롭게 하실 수 있는 분인 줄 믿습니다.
오늘 우리가 영적인 회복을 가져오고, 그래서 우리 자신들이 새롭게 되는 것은 오직 한 가지, 하나님 앞에서의 애통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애통"과 "통곡" 이라는 말이 7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울면서 하는 기도, 눈물을 쏟는 기도는 특별한 기도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8. 오사카 중앙교회에 속한 우리 모두가 새롭게 되며, 우리 모두가 주님의 큰 은혜를 입는 유일한 길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복하고 애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요"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울면 지는 것이고 눈물을 보이면 끝장이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그렇지 않습니다.
눈물은 성령님이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증거요, 예수님이 나를 돌아보시고 은혜 베푸시는 증거요, 하나님의 더 큰 축복을 향하여 나아가는 복된 시작인 줄 믿습니다.
이 약속을 믿고 오늘부터 울면서 가슴을 치면서 애통하면서 기도할 때, 하나님은 제일 먼저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우리의 자녀들과 가정은 물론, 이 땅 이 민족까지 지은 죄를 용서해 주시고 가장 큰 축복인 새롭게 되는 은혜로 충만케 하시는 줄 믿습니다.

コメントを残す

メールアドレスが公開されることはありません。 が付いている欄は必須項目で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