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8.11.여호와의 구원과 계획(출애굽기 14:26-31)
[성경본문] 출애굽기14:26-31개역개정
26.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물이 애굽 사람들과 그들의 병거들과 마병들 위에 다시 흐르게 하라 하시니
27.모세가 곧 손을 바다 위로 내밀매 새벽이 되어 바다의 힘이 회복된지라 애굽 사람들이 물을 거슬러 도망하나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을 바다 가운데 엎으시니
28.물이 다시 흘러 병거들과 기병들을 덮되 그들의 뒤를 따라 바다에 들어간 바로의 군대를 다 덮으니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29.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가운데를 육지로 행하였고 물이 좌우에 벽이 되었더라
30.그 날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스라엘을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매 이스라엘이 바닷가에서 애굽 사람들이 죽어 있는 것을 보았더라
31.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
| 여호와의 구원과 계획(출애굽기 14:26-31/2013.8.11.오전) 1. 지난주에는 자동차를 수리하기 위해서 차를 맡기고 자동차공장에서 내어 준 낡은 경자동차를 나흘 동안 타고 다녔는데, 평소에 타고 다니던 제 차에 대해서 별 생각이 없었는데 막상 남의 차를 타고 다녀보니 한마디로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차가 좁고 낡은데다 냄새가 나고 35도를 웃도는 무더위에 에어컨 작동도 시원치 않고, 제 차는 주차를 하고 한 번에 모든 문을 버튼 하나로 잠글 수 있지만 이 차는 문마다 일일이 잠그야 하고, 기름을 넣을 때에도 열쇠로 열어야 하는 등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이 불편했습니다. 그러다가 며칠 만에 차를 돌려받아 타고 다녀보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차를 타는 것 자체가 감사하고 좋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좋은 옷이나 물건도 늘 그것만 사용하면 귀한 줄 모르지만, 거칠고 무겁고 기능성이 떨어지는 불편한 옷을 입고 며칠 생활 해 보고 나면 좋은 옷의 가치를 알게 되고, 좋은 물건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제 자신이 머물고 있는 곳에서 한 번씩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올라와야 감사하는 마음도 생기고 주어진 환경과 조건도 귀한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2. 매년 팔월 십오일은 한국으로서는 일본의 침략과 압제에서 자유를 얻어 해방된 날로서 우리는 이 날을 「광복절」이라 부르고, 일본으로는 전쟁의 악몽에서 벗어난 「종전기념일」에 해당하는 날입니다. 1945년 8월15일, 한국 사람들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온 국민이 거리거리를 뛰쳐나와서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라를 잃고 주권을 빼앗기고 언어와 이름까지 빼앗기고 살아보니 그것들이 얼마나 소중한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세계에 자랑할 만한 경제력과 기술, 그리고 학문의 수준이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과거에 모든 것을 빼앗긴 아픔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오늘 우리 시대의 사람들이 우리가 누리고 있는 많은 것들을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고 감사치도 않으며, 남들과 비교하면서 상대적인 박탈감으로 오는 불만과 불평을 쏟아내면서 서로 미워하고 원망한다면 우리는 다시 한 번 과거처럼 아래로 내려가야 할 때가 온다는 사실입니다. 왜냐면 우리의 구원이, 우리가 빼앗긴 것들을 다시 회복하고 자유를 누릴 수 있었던 구원의 능력이 결코 우리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21세기의 대한민국의 번영이 결코 우리 혼자만의 힘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많은 나라와 많은 민족들의 도움이 있었고, 그 배후에서 도우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이외에는 구원의 소망이 없는 줄 알고 늘 기도하며 믿음으로 살았던 믿음의 선배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3. 이스라엘이 수천 년의 역사를 통해서 셀 수도 없는 많은 위기를 겪으면서도 역사에서 사라지지 아니하고, 도리어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등의 분야에서 세계적인 힘을 자랑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들이 받은 고난입니다. 이스라엘은 고난 속에서 잃어버리고 빼앗긴 영육간의 소중한 축복들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생각했고, 환란과 고통 속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히브리 민족을 애급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의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애급 땅에 임한 10가지의 재앙으로 온 나라가 초토화된 뒤에 바로 왕은 이스라엘이 애급에서 나가는 것을 허락하였고, 그래서 이스라엘은 430년간의 애급의 생활을 청산하고 자유의 몸이 되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왕의 욕심은 제 스스로의 약속을 번복하게 만들었고 군대를 동원하여 출애굽 하는 이스라엘을 추격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홍해에 가로막혀 추격해 오는 애급의 군대로 인해 사면초가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4. 그런데 본문이 강조하는 핵심이 무엇입니까? 본문에서 4번씩이나 반복하고 있는, “ 여호와께서”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자력으로 스스로를 구원한 것이 아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구원의 소망을 하나님께 둔 결과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14:13-14절의 말씀에서 미리 선언되어진 말씀이었습니다. “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어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형편을 너무 잘 아시고 가만히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 이스라엘의 수준이 어느 정도였습니까? 10-12절의 말씀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기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겟노라” (11-12) 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두려워하고 낙심하며 모세를 향해 원망하고 공격했습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가 아니면 소망이 없는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형편 속에서도 하나님의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 구원은 홍해의 같은 장소, 같은 길이었지만 그 길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한 길이었고, 애급 군대는 그곳에서 수장시키는 심판을 베푸셨습니다. 5.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그 이후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받았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 축복을 누렸지만, 남의 나라와 남의 민족에게 억압받고 강탈당하고 자유를 잃어버리는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심이 완벽한 줄 알았는데 왜 이런 결과를 반복해야만 합니까? 그들의 죄가 그들의 불순종이 원인이었습니다. 본문 31절의 말씀을 보면,“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베푸신 큰 일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 종 모세를 믿었더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그들이 이 큰 구원을 보고 체험하기 전에는 제대로 믿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보고 체험하고 믿었으며 달라졌습니다. 문제는 그 신앙 그 마음이 오래 가지 못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자신들이 받은 은혜와 축복들을 시간이 갈수록 당연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죄가 우리 마음에 자리 잡기 시작하면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못하게 만듭니다. 감사할 수밖에 없는 조건들을 의심하게 만들고 화평 대신에 분쟁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에 빠졌고, 그래서 잘 될수록 교만의 늪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6. 8월 15일을 앞두고 한국 사람들이나 일본 사람들의 생각이 복잡합니다. 소설가 이께자와 나쯔끼씨가 아사히신문에 기고한「명예 있는 패배」라는 글을 보니, 일본 사람이 패전을 하고 항복한 이후에 느낀 감정이 잘 표현되어 있었습니다. 전쟁이 끝났다는 안도감과 더불어 다른 한편에서는 패배에 대한 치욕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일본인은 패전은 잊어버리고 종전만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30년 동안 일본에 살면서 8월만 되면 일본 언론들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평화롭게 잘 살던 일본 사람들이 원인도 모른채 미국으로부터 원폭을 맞은 것처럼 표현하는 이유를 이 글을 읽고 그 원인을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고대 일본인들은 죄는 씻을 수 있지만 수치는 씻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수치는 각자가 평생 지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영속패전론(永続敗戦論)의 저자인 시라이 사또시는 일본 사람들이 언제까지 한국이나 중국에 머리를 숙이고 잘못을 빌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분명한 답을 내기를, 그것은 일본이 지고 가야할 당연한「유산의 상속」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전쟁에 직접적인 책임이 없는 후손들이 전후에 얻은 평화와 번영을 누렸으니 함께 지고가야 할 「패배의 유산」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일본 사람들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전쟁의 패배와 그 책임을 강요하고 있고, 일본 사람들도 전쟁의 책임을 돈으로 보상하면 다 끝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쌍방이 다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논리는 시간이 갈수록 분쟁만 더할 뿐입니다. 7. 우리가 함께 생각해야 할 가장 핵심적인 것은, 대한민국의 해방이 제 힘으로 얻은 구원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일본도 패배를 씻을 수 없는 수치라고 생각하는 그런 사고 때문에 그래서 가미가제 특공대로 결사항전은 해도 항복은 할 수 없다는 그런 생각 때문에, 결코 스스로는 전쟁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에 원자폭탄을 맞은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한국이나 일본이나 잿더미에서 세계 경제대국이 되고 일류 국가가 된 것을 보면 그 때의 패배, 그 때의 아픔이 도리어 잘 된 일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2013년의 광복절을 맞이하면서 지금 한국과 일본은 가장 어려운 관계에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한일의 우호관계가 20년 정도 후퇴했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역사를 되돌아보면 할 말이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일본 사람들도 우리에게 할 말이 많습니다. 이유는 서로가 생각의 출발점이 다르고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고 느낌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부부싸움이 왜 일어납니까? 상대방을 내 생각대로 내 방식대로 만들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한 식구로 한 몸을 이룬 부부로 살아가려면 똑 같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누구를 중심으로 변화되고 바뀌어야 합니까? 남편입니까? 아내입니까? 대부분의 경우는 결국 힘이 센 사람의 주장대로 살다보니 가정에 평안이 없습니다. 사람은 주어진 환경과 조건을 변화시킬 능력이 없습니다. 더구나 다른 사람을 내 방식대로 묶어두고 내가 원하는 대로 변화를 시키려고 하는 것은 상대방에서 보면 그 자체가 폭력이고 인권유린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남편은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아내도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가정이 남편이 주장하거나 아내가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주장하는 가정이 되어야 온전한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8. 이것은 국가와 국가 간의 문제도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백 년 전의 대한민국은 정말 연약하고 불쌍한 나라였습니다. 오십년 전에도 그랬습니다. 그런 나라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급에서 구원하듯이 그렇게 기적같이 구원해 주시고, 이제는 열방에 자랑이 될 만한 귀한 나라로 세우신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모든 나라와 민족을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서 영원히 축복하시려는 것입니다. 일본이나 중국이나 이웃 나라들이 영적 부흥이 일어나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 일을 하라고 우리에게 빼앗긴 자유를 회복케 하시고, 영적으로는 제사장의 나라가 되게 하셨습니다. 일본은 지금 나가사키나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을 통해 전 세계에 평화를 호소하고 있습니다. 두 번 다시 이 땅에, 이 지구촌에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한 때 전쟁의 광기에 휩싸여 이웃 나라를 침략하고 많은 고통을 주었던 일본이 이런 평화의 일에 앞장선다는 것은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색안경을 끼고 볼 것이 아니라 일본이 주장하는 이 평화가 지구촌의 모든 사람들의 평화가 되기 위해서는 한국도 중국도 피해를 입었던 모든 나라들이 함께 참여하고 협력한다면, 이것이 우리가 두려워하는 일본의 재침략의 야욕을 막는 좋은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역사 교과서의 내용이 잘못되었다고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는 것은 교과서가 잘못 기록된 것 보다 더 큰 재앙은 잘못된 것을 가르치고 잘못된 것을 배우는 것이 더 큰 재앙입니다. 그러므로 이것도 큰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서로를 향해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다는 이것입니다. 9. 한국 독립운동의 안중근 의사의 기념 돌비에 새겨진 글이 생각납니다. 見利思義 見危援命(이익을 보거든 의를 생각하고 위태함을 보거든 목숨을 주라). 그는 일본에 저항해서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면서도 동족은 물론이고 일본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도 잊지 않았습니다. 그는 조선총독인 이등박문의 심장을 향해 권총을 쏘았지만 많은 일본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쳐 싸웠지만 일본 사람을 미워하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라"(마5:44-45)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들의 이웃에 대한 진정한 모습입니다. 일본이 패전의 잿더미에서 일어나 세계에 유례가 없을 정도의 경제 부흥을 일으키고 선진국이 된 것도 일본 사람들의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내일을 위해 받은 사명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축복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과 일본은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을 받은 나라들입니다. 자동차를 몰고 다니다보면 내가 아무리 조심해서 방어 운전을 한다고 해도 갑자기 와서 들이받는 사고는 막을 길이 없습니다. 이 귀중한 것들을 두 번 다시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감사하는 마음과 서로가 조심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한일관계가 서로에게 불편해지고 서로가 미워한다면 양쪽 나라에게 손해는 있어도 좋은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한일관계 뿐만이 아니라 아시아의 모든 나라들이 서로가 조심하고 서로가 양보하면서 참아 준다면 우리는 행복한 이웃을 둔 최고의 나라들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의 은총과 축복들을 모든 이웃들과 함께 나누는 그런 나라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