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2.3.눈 뜨기를 원하라(마태복음20:29-34)
[성경본문] 마태복음20:29-34개역개정
29.그들이 여리고에서 떠나 갈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따르더라
30.맹인 두 사람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31.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32.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들을 불러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33.이르되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34.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
눈 뜨기를 원하라(마태복음20:29-34/2013.2.3.오전)
1. 사진을 찍다보면 카메라도 좋아야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렌즈입니다.
렌즈는 구도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밝은 렌즈는 빛을 많이 통과시킴으로 어두운 실내나 흐린 날씨에도 선명한 사진을 찍을 수 있고, 셔터 속도도 빨라져서 흔들림을 방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외부의 빛을 카메라 본체로 전달하는 양이 많으면 많을수록 렌즈 가격은 엄청나게 차이가 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눈도 나이를 먹을수록 어두워지게 마련이고 그래서 눈에 좋은 음식이나 치료법을 찾게 되고, 보다 선명하게 사물을 보기 위해 돋보기의 신세를 지게 됩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선명한 사진을 위해 더 좋은 렌즈를 구하게 되고, 눈이 어두워지면 더 잘 보이는 것을 찾기 마련인데, 우리 영혼의 눈은 밝은지 어두워졌는지를 분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이 여리고를 지나가시다 만난 소경들이 눈을 뜨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예수님의 제자로 따르게 된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의 말씀은 마가복음 10:46절 이하에서도 기록하고 있지만, 그곳에서는 한 사람의 소경인 바디메오를 지명하고 있지만 본문은 복수의 소경을 말하고 있는 것에 차이가 있습니다.
또한 마태복음 9:27절 이하에도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서도 두 사람의 소경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3가지의 사건이 보여주는 공통적인 것은 앞을 보지 못하는 장애자들이 예수님을 만나 눈을 뜨게 되었다는 것과 그들의 믿음대로 되었다는 것과 자기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예수님을 향해 부르짖었다는 내용입니다.
오늘 우리는 육신의 어두움에 갇혀 신음하는 이 소경들을 통해 빛을 잃고 어두워진 이 세상의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이며, 또한 어떻게 해야 빛을 잃고 어두워진 우리의 삶을 진리의 빛으로 생명의 빛으로 회복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2. 육신의 눈이 어두워지면 아무리 밝은 세상도 어두움에 잠긴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내 눈이 어두우면 아무리 중요한 것도 볼 수 없지만, 반대로 내 눈이 밝으면 웬만한 어두움 속에서도 사물을 분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신이 쇠약하고 노쇠하면 눈이 어두워지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도 쇠약해지면 어두워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영혼의 눈은 어두워지면 그 증상을 자각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 증상을 말씀드리면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영의 눈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면 제일 먼저 성경을 점점 읽지 않고 멀리하게 됩니다.
집에서 찬송소리가 끊어지고, 기도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점점 예배를 멀리하게 되고, 그래서 일주일에 한두 번 교회 와서 예배하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몸과 마음이 자꾸 피곤해지고 그래서 주님의 일에 소홀히 하게 되고, 그 반대로 세상일에는 점점 바빠지기 시작합니다.
걱정 근심이 늘어나고 생활 속에서 선과 악을 분간하지 못해서 문제가 생기고, 불신자들을 겁내고, 가정의 불신앙 식구들의 눈치를 보게 됩니다.
긴 안목에서 멀리 보는 것보다는 항상 당장의 문제만 쳐다보고 낙심하고 한숨을 쉽니다.
사44:18절에 보니 “그들이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함은 그 눈이 가리워져서 보지 못하며 그 마음이 어두워져서 깨닫지 못함이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야 하는데, 은혜의 삶,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지 못하면 그날부터 마귀가 우리의 영의 눈을 어둡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3.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육신의 장애와 질병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 장애자들의 고통과 어려움을 다 알 수는 없지만, 객관적으로 제일 힘들고 어려운 장애 중에 하나가 보지 못하는 장애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살면서 제 살고 있는 세상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믿으면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영의 눈이 어두워 제대로 보지 못한다면 이 또한 가장 불쌍한 영적 장애가 아니겠습니까?
예를 들어 내가 예상치 못한 어려움에 빠졌다면, 그곳에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이며 왜 이런 고난을 당해야만 하는지 깨닫지 못한다면 어떻게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으며, 그 고난을 또 어떻게 이길 수 있겠습니까?
4세기의 유명한 교부 어그스틴은 참회록과 하나님의 도성이라는 귀한 책을 썼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의 도성이라는 책을 쓰게 된 결정적인 동기가 있었습니다.
313년에 콘스탄틴 대제가 밀라노 칙령을 선포하여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정하고 더 이상의 핍박이 없는 신앙의 완전한 자유를 누리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야만인 게르만족이 로마로 쳐들어와서 삽시간에 로마가 멸망하게 됩니다.
어그스틴은 왜 하나님의 백성들이 불신앙과 야만족에게 유린당하고 멸망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도 오랜 신앙의 핍박에서 벗어나서 이제는 신앙의 자유를 얻어 아름답고 평화로운 기독교 국가로 새로운 출발을 시작하는데 말입니다.
어그스틴은 여기에 대한 고민과 의문을 가지고 많은 세월을 보내야먄 했습니다.
그 후에 어그스틴은 이런 이해할 수 없는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뒤늦게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야만족으로 하여금 로마를 무너뜨리게 하셨지만, 그 로마를 정복한 게르만 민족을 그리스도인으로 변화시키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로마를 무너뜨리고 그 위에 하나님 중심의 신성 로마 제국을 세웠던 것입니다.
어그스틴은 이 사실을 알고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에 감탄을 했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갑자기 하나님의 나라가 무너진 것 같았고, 기독교 신앙 자체가 흔들리는 것 같았지만, 하나님은 이 로마에 더 크고 위대한 나라를 세우시기 위해 게르만 민족을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아그스틴의 영의 눈이 열린 것입니다. 인류 역사의 배후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 하나님의 섭리를 본 것입니다.
4. 오늘 본문에서 소경들은 예수님을 향해 젖 먹던 힘까지 다 동원하여 부르짖었습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마가복음10장에서는 이 소경의 간구가 더욱 애절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 말이 거듭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유는 사람들이 시끄럽다고 맹인 거지를 꾸짖어 더 이상 소리 지르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아마 군중들의 발길에 채이면서 엄중하게 제지를 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은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뿐이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두운 눈을 열지 않고는 사람 구실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앞을 보지 않고는 이 거지 신세를 면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명을 걸고 예수님을 찾았고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왜 우리에게는 이런 간절함이 없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잘 먹고 잘 살고 행복하고 부족한 것이 없는 인생이기 때문입니까?
예수님을 간절히 찾지 않아도 볼 것 다 보고 알만한 것 다 알고 누릴 수 있는 것 다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영의 눈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그 어두움이 너무 심해서 제 자신이 지금 보지 못한다는 사실 조차도 잊어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 시대를 향해 이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눈은 있어도 소경이요 귀가 있어도 귀머거리인 백성”(사43:8) 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육신의 눈으로만 다 볼 수는 없습니다.
마음의 눈이 있으며 지식이라는 눈도 있으며 영의 눈도 있으며 역사의 눈도 있습니다.
우리는 육신의 눈이 자유롭게 사물을 보고 분별할 수 있듯이 우리의 영안의 눈도 열려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행하시고자 하시는 역사를 읽어야 참 그리스도인이요 하나님의 백성인 줄 믿습니다.
5.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앞에 나와서 부르짖어야 합니다.
눈이 어두워 하나님의 손길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지 못하는 우리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하고 말씀을 가까이 하며,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기를 간절히 사모해야 할 것입니다.
내 눈이 어두운데 어떻게 우리 자녀들의 장래를 바로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마15:14) 고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얼마나 답답하시면 이런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그러나 감사한 것은 연약한 인생이 부르짖을 때 예수님은 반드시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소경들의 간절한 부르짖음에 예수님은 가시던 길을 멈추시고 소경들에게 다가 오셨습니다.
그리고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앞을 보지 못하는 너희에게, 지금 사람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없는 기막힌 상황에 있는 너희에게 내가 도울 일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저들은 망설임도 없이 “우리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고 했습니다.
철학자 소크라테스도 네 자신을 알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인간의 인간됨의 근본은 제 자신을 돌아보는데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제 자신을 돌아보는 순간에 제일 먼저 인간의 한계점을 보게 됩니다.
우리 주위에 안하무인격으로 날뛰는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제 자신을 돌아볼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네 자신을 알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신앙도 제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제 스스로는 도무지 구원의 소망이 없으며 제 스스로는 가장 연약하고 불쌍한 존재인 것을 깨닫게 하는데서 십자가의 복음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6. 우리의 영과 육신의 눈이 밝아지려면 예수님을 만나는 것 외에는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거지 소경들도 온갖 난관을 물리치고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를 만나면 어두운 눈이 열리고 문제가 해결될 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소경들을 예수님은 어루만져 주셨고, 오랫동안 빛을 잃고 닫혔던 눈들을 열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눈을 감고는 신앙생활 바로 할 수 없습니다.
어두운 눈으로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면 눈이 열리는 줄 믿습니다.
육신의 눈만이 아니라 영안의 눈이 열려야 합니다.
우리의 눈이 밝아지기 시작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잃어버린 예배가 회복됩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살려고 스스로 애를 쓰게 됩니다.
성경보고 기도하는 습관이 회복됩니다.
회개의 눈물이 쏟아지고 하나님의 은혜로 내 심령을 채우게 됩니다.
확신이 생기고 믿음의 능력으로 담대함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전도가 저절로 되고 하나님께 크게 쓰임을 받는 줄 믿습니다.
그 사실이 본문 3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저희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저희가 예수를 좇으니라” 고 했기 때문입니다.
마치 갈릴리 바다에서 그물을 던지며 하루하루를 연명하던 어부들이 예수님을 만나 사도의 길을 간 것처럼, 이 소경들도 눈이 열리자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7. 오늘 예수님이 우리에게도 묻고 계십니다.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이 때 우리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우리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입니다.
영안이 열릴 때 제일 먼저 불신앙의 남편들과 식구들이 불쌍해 보이고, 그래서 그들의 장래를 위해 기도하게 되고 영혼 구원을 위해 눈물로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천의 어느 여집사님은 사업하면서 친구들과 술만 마시고 돌아다니는 남편을 위해 교회 가서 혼자 철야기도 하면서 그 영혼의 구원에 매달렸다고 합니다.
나중에는 아침금식 40일을 시작했는데 36일째 되는 날 아침에 남편이 갑자기 피를 토하기 시작했고 이 일을 계기로 남편이 교회 나오면서 술 담배를 끊고 새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내가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나의 선행이나 감언이설에 사람들이 새로워 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소경들의 눈을 뜨게 하신 것처럼, 예수님이 우리의 잠자는 영혼도 깨우시고, 우리의 어둡던 눈도 밝히시고, 밝아진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과 사람들을 예수님은 새롭게 하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가 눈 뜨기를 원한다면 우리의 눈이 밝아지기를 간절히 원한다면, 이 시간에도 예수님은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어두워졌던 우리의 눈은 늘 문제만 보고, 우리를 고통케 하는 사건만 바라봄으로 낙심과 근심과 불평을 하도록 하였지만, 밝아진 눈으로 모든 고통과 문제를 넉넉히 해결하시는 사랑과 은혜의 주님을 바라보게 함으로, 그 분을 통해 우리의 영육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줄 믿습니다.
우리의 눈이 밝아지면 어두운 내 심령뿐만 아니라 이 어두운 세상도 밝아질 것입니다.
밝은 눈 열린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귀하게 쓰임받기를 소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