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2.10.예수님과 군중들(마태복음21:1-11)

[성경본문] 마태복음21:1-11개역개정

1.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2.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3.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4.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5.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6.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7.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8.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9.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0.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

11.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예수님과 군중들(마태복음21:1-11/2013.2.10.오전)
1. 오늘이 구정인데 뉴스를 보니 사람들이 명절만 되면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합니다.
며느리들은 음식을 장만하는 일과 시모의 잔소리에, 남편들은 불만인 아내들을 달래느라고, 노총각 노처녀들은 왜 결혼하지 않느냐고 만나는 사람마다 이런 질문 공세로, 심지어 대학 시험에 떨어져 재수하는 학생까지 오랜만에 만나는 친지들에게 시달리기 때문에 다들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합니다.
여기에 대한 여러 가지의 이유나 변명이 있겠지만 결론적인 것은 우리가 그만큼 외부에서 오는 충격과 변화에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할 정도로 약해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구정에 받는 스트레스는 이전에도 있었지만 옛날 사람들은 당연한 것으로 여겼고 주위 사람들이 내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을 정으로 알고 그것을 고맙게 생각했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라도 인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즘 우리는 이러한 인내심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유는 우리가 그만큼 몸과 마음이 여유를 잃어버렸고 여유를 잃어버린 만큼 연약해졌기 때문입니다.

2. 세상은 혼자 살아갈 수 없는 것은, 내가 원하던 원치 않던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함께 살아가야 하는 곳이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강해지면 모든 것을 이길 수 있고 인내할 수 있고 수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약해지면 모든 것이 나를 괴롭히고 불편하게 만들고 고통을 주는 것이 세상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무엇을 먹어도 맛있고 즐거운 마음으로 잘 소화할 수 있지만, 몸이 약한 사람은 몸에 좋으라고 먹는 음식이나 약도 다 제 몸을 해롭게 만드는 것들 뿐입니다.
마음이 건강한 사람은 누구에게 무슨 말을 들어도 그 말을 고맙게 받을 수 있고 섭섭한 말이나 대우를 받아도 돌아서면 잊을 수 있지만 마음이 약한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모든 것이 다 나를 해롭게 만드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탓하며 남의 탓으로 돌리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미래가 없습니다. 왜?
문제는 다 내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바깥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문제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고통이 있고 문제가 있을 때, 바깥에서 문제점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을 들여다보고 내 안에 있는 죄의 세력과 내 안에 있는 문제점을 발견하고 그것과 싸워 이김으로 내 스스로를 말씀 위에 바로 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명절은 나를 피곤하게 만들고, 스트레스를 줘서 나를 약한자로 만드는 그런 시간이 아니라, 인격으로나 육체적으로 성숙하고 성장한 나의 새로운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좋은 기회로 만들고, 더 많은 사람들과 더 좋은 관계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복된 기회로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3.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성에 들어가시면서 군중들이 그를 메시야로 영접하며 열광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전체는 예수님의 33년의 생애를 기록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서 공생애 3년간의 기록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21장에서 27장까지의 그 많은 내용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가시고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시기까지의 마지막 일주일간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 일주일간의 첫 번째 내용은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시는 예수님과 그를 환영하는 군중들과의 만남입니다.
이 당시의 사람들은 국가와 민족은 로마에 속국되어 자유를 잃고, 왕정정치는 부패하고, 종교는 부패와 무능으로, 많은 지도자들이 타락한 가운데 대부분의 백성들은 매일의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사람들은 그 어느 곳에서도 소망과 기대를 가질 수 없었고, 아무런 위안을 얻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로마 군병들과 유대 관원들의 수탈은 날이 갈수록 극심해졌고, 거리에는 병든 자들과 가난한 자들로 넘쳤고, 성전 안에는 장사꾼들과 타락한 종교지도자들의 야합으로 가득했습니다.
그 때 사람들은 갈릴리로부터 들려오는 예수님에 대한 기적과 능력이며, 권위 있는 말씀의 가르침으로 이미 예루살렘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의심 없이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환호와 찬송은 얼마나 메시야를 기다렸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4. 그런데 보십시오.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던 과거의 왕들이나 개선장군들은 말을 타고 번득이는 창칼로 무장한 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수많은 깃발을 흔들면서 들어왔지만, 예수님은 키나 몸집이 너무 작고 보잘 것 없는 작은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더구나 그 곁에는 연약할 대로 연약한 어린 나귀새끼가 어미 나귀의 뒤를 따르고 있었으니, 이런 모습에서 백성들은 예수님을 향해 더욱 환호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자발적으로 자신들의 겉옷과 종려나무의 가지를 베어 길에 깔아 드림으로 메시아로 오시는 예수님을 환영했던 것입니다.
9절의 말씀을 오는 날의 표현으로 하면 메시야 만만세 입니다.
10절에 보니 이 일에 온 예루살렘성이 시끄러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사람들의 환성과 대대적인 환영은 그날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행동을 주목하던 군중들은 시간이 갈수록 이내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기껏 성전에 들어가 장사치들의 상을 엎으시고 그들을 성전에서 쫓아내시고 하나님의 집을 깨끗하게 하신 것뿐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을 만나는 일도, 로마군의 대장을 만나는 일도, 헤롯 임금을 만나거나 그들을 좇아내는 일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예루살렘의 중심 광장에서 서서 유창한 웅변으로 혁명을 위해 일어서라고 백성을 충동하는 일도 없었습니다.
결국 예수님께 실망한 이 사람들은 며칠 후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고함을 지르는 사람들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5. 그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하던 그 외침의 목적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자신들의 정치적인 목적을 이루고 가난과 질병과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원했던 외침이었습니다.
"호산나" 라는 말은 아람어로 "우리를 구원 하소서" 라는 의미입니다.
문제는 이 "호산나" 라는 외침이 하나님의 뜻과는 전연 상관이 없는 오직 육신의 원하는 것을 얻기 원했던 육체주의자들의 불쌍하고 어리석은 자들의 외침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민주주의 세상입니다.
물론 제 개인적으로는 일본이 과연 민주주의 국가인가에 대한 의문은 있지만, 한국을 포함한 절대다수의 세상 사람들은 민주주의의 체재 아래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완벽한 제도는 아니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특히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신정통치를 원하는 하나님 중심의 신앙인들에게는 민주주의는 많은 모순을 않고 있는 제도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문제 있는 이 민주주의 제도를 수호하는 이유는 인류가 역사를 통해서 경험한 수많은 통치방법 중에서 가장 타당하다고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민주주의의 제도를 말하는 이유는, 이 절대다수의 군중들이 예수님을 향해 호산나를 외치고 있지만, 이 외침 속에서 우리는 몇 가지의 문제점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6. 첫째는 군중이라는 다수가 결정하고 따라가는 길이라도 그것이 늘 바른 길이고 진리이고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도리어 다수라는 개체가 잘못된 결정을 내리거나, 잘못된 소수의 선동에 다수가 속아 넘어갈 때에는 엄청난 재앙을 자초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민주주의의 최대의 장점은 다수결에 있지만, 그 다수가 도리어 민주주의 제도에 최대의 약점일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역사를 통해서 알고 있는 사실은, 다수가 진리의 편에 서는 경우도 많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았다는 사실입니다.
한주먹감도 안 되는 소수가 진리와 정의의 편에 서서 목숨을 걸고 다수와 싸우며 역사를 새롭게 만들었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대부분의 경우에 소수의 사람들이 진리의 말씀에 서서 회개를 부르짖었고, 예레미야 같이 소수의 사람들이 하나님 편에 서서 다수의 죄악을 드러내고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일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흔히 절대 다수인 군중들이나 백성들이 다수라는 또 다른 권력을 손에 넣었을 때 스스로를 정의의 편에 서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 다수를 충동하여 잘못된 결정을 내리고 옳지 못한 길로 가도록 만드는 선동하는 무리가 반드시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정치는 부패하고 백성들은 또 다시 고통 하는 것입니다.
일본에서 "赤信号も皆で渡れば怖くない(빨간 신호도 다 같이 건너면 무서울 것이 없다)" 는 말이 있는데, 바로 이것이 다수의 행포이며 바로 이것이 다수의 정치적인 행태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특히 한국에서는 떼거리로 모여서 법이나 질서보다는 자신들의 권리나 이익을 위해 항의하고 반항하면 그것이 정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이 민주주의의 다수결이 가져오는 문제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7. 민주주의는 인류가 경험한 가장 합리적인 통치 방식이지만,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할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왕 중의 왕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랑과 은혜로 통치하시는 의로운 왕국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의와 진리를 가장한 사이비 정치가도 없으며, 다수결에 의한 횡포도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로 충만한 나라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 속에서 영원히 해같이 빛나는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우리를 그 나라의 영원한 백성으로 삼기 위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후에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는 민주주의를 완성하기 위함도 아니요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완벽한 공산주의를 이루기 위함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신정통치의 나라, 천국을 우리의 유업으로 주시기 위해 오신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세상에 살고 있고 세상의 법으로 통치를 받고 있지만, 장차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영원한 나라를 사모하고 사는 줄 믿습니다.

8. 둘째로는 군중들이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을 환영했지만, 예수님은 결코 그들의 환호에 흔들리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외친 호산나는 무엇입니까?
시오니즘의 성취입니다. 이스라엘이 열방을 통치하는 나라에서 자유롭게, 행복하게, 잘 먹고 잘살도록 해 달라는 것입니다.
로마군을 유대 땅에서 몰아내고 썩어빠진 권력과 정치를 개혁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과 요구를 가진 그들의 외침은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어리석고 공허한 찬양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이 환호하고 찬양하며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는 그 입술이 며칠이 못되어 예수님에게 저주와 폭언을 쏟아 부을 입술임을 미리 아셨습니다.
겉옷을 길에 펴며 종려가지를 깔아 드리는 그 손길이 며칠이 못되어 예수님의 손과 발에 대못을 박을 손임을 아셨습니다.
나중에는 침을 뱉고 조롱하며 뺨을 칠 뿐 아니라, 고통하며 피 흘리시는 예수님의 몸에서 마지막 겉옷 까지도 탈취하고야 마는 도적놈의 손길이 될 것을 미리 아셨습니다.

9. 열왕기하 9장에 보면, 예후가 왕이 될 때, 사람들이 자신들의 겉옷을 벗어 예후의 발밑에 깔아 그를 환영하는 뜻을 표시했습니다.
그는 타락한 아합 왕가를 멸하고 종교적 개혁을 위해 선지자 엘리사를 통해 기름부음을 받아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하나님을 향해 열심을 내었지만 그 목적은 자신의 영광에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하나님을 이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은 후에는 하나님을 버리고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않고 우상을 섬겼습니다(왕하10:29).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말씀 중심에 서지 않는다면 우리는 세상을 바로 보고 판단할 수 없으며, 심지어 우리의 찬송과 기도와 헌물들이 과연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드리는 것 같은 그런 것인지,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만한 것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면 12절 이하에 보면 성전에서 장사하는 양아치 같은 이 사람들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성전 안에서 좌판을 벌려 놓은 것입니다.
우리가 입으로는 하나님 중심의 삶을 외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를 올리면서 삶 속에서는 세상 사람들과 별로 다르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면, 여기서 우리 자녀들이 무엇을 배우며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선지자들이 시대마다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그들이 다수의 군중들 편에 선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 섰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던지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열광하면서 자신을 원했지만 예수님은 결코 그들에게 자신을 의탁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17절에 보니 오히려 한적한 베다니로 물러가셨다고 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군중들의 환호에 결코 속지 않는 것은, 찬송가의 가사처럼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 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10. 셋째는 군중들의 찬양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임을 드러내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그가 십자가에서 못 박히실 때, 그 머리에 "유대인의 왕 예수" (27:37)이라는 그 죄패를 예수님을 조롱하기 위해 붙였지만, 그러나 그 팻말은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인류에게 참되고 영원한 왕 중의 왕이 되심을 사람들이 스스로 선언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호산나" 의 외침은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구원자가 되심을 증거한 귀한 찬송이 된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고전1:18) 이라고 선언한 사도바울의 말대로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이 볼 때 미련한 방법으로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군중들은 예수님을 환영하고 "호산나"를 외쳤지만 예수님과 그들은 생각이 달랐고 그래서 가는 길이 달랐습니다.
그들은 유대인 지상주의인 시오니즘을 원했고, 무력을 통한 혁명을 원했고, 세상 행복과 영광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원했고, 죽기까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길을 원했습니다.
군중은 예수 그리스도를 환호했지만 불행하게도 서로가 가는 길이 달랐고, 생각이 달랐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마지막까지 흔들림이 없이 십자가의 길을 갈 수가 있었습니다.

11. 오늘 우리들도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걷기를 원합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세상의 영광과 행복과 나의 뜻이 아니라 고난을 각오하면서 아버지의 뜻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이 길을 먼저 가셨기 때문입니다.
이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며, 이 일을 위해 우리가 오늘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의 참된 사명자라면 어떤 유혹과 고난 속에서도 흔들림이 없이 이 길을 걸어야 할 것입니다.
소아시아의 빌레델비아 교회는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다”(계3:8)고 주님이 칭찬하셨습니다.
목적이 분명하고 주어진 사명이 절대적인 것이라면 아무리 약한 사람이라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군중들의 환호나 다수의 일방적인 결정에 따라 흔들리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이 무엇이라고 말하던지 우리를 어떻게 대우하던지 우리의 왕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제 십자가를 지고 충성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희생하고 우리를 영원히 살리셨으니, 오늘 우리는 그 분의 십자가를 붙들고, 이 복음을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몸 바쳐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충성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인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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