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7.4.보리떡에 임한 은총(요한복음 6:5-14)
[성경본문] 요한복음6:5-14개역개정
5.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6.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7.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8.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9.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10.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11.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12.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13.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14.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보리떡에 임한 은총(요한복음 6:5-14/2010.7.4.맥추감사절)
1. 저의 자녀들이 일본에 살면서 어린 시절에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도시락을 가지고 갑니다. 그 때는 몰랐는데 성년이 되어서 하는 말이, 그 때의 도시락이 참으로 부끄러웠다는 것입니다.
일본 아이들의 도시락은 화려하고 먹을거리 종류가 다양했는데, 어머니가 싸 준 도시락은 뚜껑을 열기가 부끄러울 정도로 단순했다는 것입니다. 집안이 너무 가난했기 때문입니다.
저도 신학교를 다니면서 점심을 굶기가 일쑤였습니다.
여유가 조금 있을 때에는 자장면 값으로 가져 간 점심값을 아껴 모은 것으로 헌책방에서 신학서적을 구입하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는 유달리 배가 더 고팠던 기억이 납니다.
오늘 본문에 보리떡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보리떡은 가난한 자의 양식이요, 맛이 없으며 보리떡 자체가 가난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든 사람들 대부분이 이런 보리떡조차도 준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웠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문제는 광야 빈들에서 많은 사람들이 허기를 느끼며 무엇이던지 배를 채워야할 그런 상황이지만, 현실은 가진 것이나 환경이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누구나 행복하고 성공적인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원하는 대로 살아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도 잘 압니다.
오늘 교회의 사대 절기 중에 두 번째인 맥추절을 맞이하여 가난이나 어려운 문제나, 내 뜻대로 살 수 없는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 뜻대로 후회 없는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2. 예수님의 권세 있고 생명력 넘치는 말씀을 들으려고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가고 말씀을 끝내고 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굶주림에 허기져 있었습니다.
이렇게 굶주린 군중을 보신 예수님은 제자들에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물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빌립은 대답하기를, 절약해서 조금씩만 먹어도 200데나리온이라는 재정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당시 은으로 만든 한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으니, 간단하게 생각해보면, 오늘날 노동자의 하루 품삯을 1만 엔으로 친다면, 200만 엔의 돈입니다.
최소한 그 정도의 돈이 있어야 이 사람들의 허기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같은 내용의 말씀이 마14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주님이 제자들에게「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마14:16)고 했습니다. 약간 말이 다르지만, 주님의 의도는 동일합니다.
본문 6절에 보니,「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이런 난제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를 지켜보고자 함이었습니다.
그 중에 안드레는 여기저기 군중 속을 돌아다니다가 한 어린아이의 도시락을 가지고 주님 앞으로 가져 왔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도시락 속에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지만 이 많은 사람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했습니다.
아마 예수님만이라도 식사를 하시는 게 좋을 것이라 생각하고 구해 온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것을 보시고,「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식사할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3. 6절을 보면, 이미 예수님에게는 이 군중들을 먹이실 방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그 해결책이 한 어린아이가 가진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예수님의 손에 들려 졌을 때 구체적으로 나타났다는 사실입니다.
비록 가난의 상징인 보리떡이라도 주님의 손에 옮겨졌을 때 주님의 계획이 현실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를 만나고 고통을 만나고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을 때에 주님은 반드시 우리에게 물어 보시는 분입니다.
너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네게 있는 방법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이 때 우리는 환경을 바라보거나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위해 주위를 바라보거나, 혹은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다른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기 전에 먼저 주님의 손을 주목해야만 합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은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신 능력과 기적의 장본인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손길은 죽은 자를 일으키시고, 병든 자를 치료하여 건강을 회복케 하시는 분이며, 귀신을 물리쳐 사람을 온전하게 하시며,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사 축복해 주시는 자비의 손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문제도, 인간의 힘으로는 도무지 해결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14:18절에,「그것을 내게로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4. 주님은 적은 것을 가지고도 그것을 적다고 하지 않으시고 귀하게 받으셨습니다.
주님은 가난의 상징인 보리떡이라도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귀하게 여기시는 주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불평하고 낙심할만한 일이요, 부끄럽게 여길만한 일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날 뭘로 알고 이따위 것을 가져 오냐고 할 것입니다.
서민들이 월급을 받거나 어떤 목돈이 생기면 감사하기 보다는 불평하고 낙심하기를 잘 합니다.
이유는 정해진 지출은 많은데, 들어온 돈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지출하고 남는 것이 있으면 좋은데, 여전히 빚은 늘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에게 근본적으로 무엇이 문제입니까?
빚이 문제가 아니고, 적은 수입이 문제가 아니라 감사가 없는 것입니다.
소유하고도 감사할 줄 모르고, 은혜를 입고도 감사할 줄 모르고 도리어 불평합니다.
5. 그러나 우리 주님은 적은 것, 보잘 것 없는 것을 가지고도 제일 먼저 하늘 아버지께 감사를 올렸습니다.
이 감사하는 마음이 잘 사는 비결이고, 감사하는 삶이 행복의 비결입니다.
보리떡 다섯 개라도 그것을 놓고 하나님께 감사해 보시기 바랍니다.
물고기 두 마리 위에 손을 얹고 축복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모자랄 수밖에 없는 것도 모자라지 않게 해 주실 것입니다.
사람들이 우습게 여기는 아주 적은 것에서도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오늘 맥추감사절인데, 헌금이란 계산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빌립은 200데나리온의 떡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무엇입니까?
돈이 있다고 떡을 구할 수 있는 그런 상황이 아닙니다.
우리가 먹고 사는 문제나, 장래에 대한 염려에 빠지는 것은 문제가 해결되지도 않으며, 도리어 하나님 앞에 인색한 자가 될 뿐이고, 살면 살수록 불평 불만은 늘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적은 것을 가지고도 감사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 마음속에서 먼저 풍성함이 넘쳐 날 것입니다.
나도 힘들고 어렵지만 더 어려운 남을 생각하고, 자신을 먼저 희생하는 그런 마음에서 기적과 능력은 일어나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십 명씩 백 명씩 앉혀놓으시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붙잡고 축복 기도 하셨던 것입니다.
6. 그리고는 그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아끼지 아니하시고 떼어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 결과 어린 아이 한 사람의 배를 겨우 채울 수 있는 양의 음식이, 여자와 어린아이를 제외한 성인 남자만 세어서 5천명이 먹고도 12광주리가 남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지성이나 그 어떤 능력이나 경험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어떤 것이며, 그의 베푸시는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가를 나타내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주님과 우리와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계산이나 하고, 어떤 인위적으로 꾸며진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이 어찌 계산이 될 수 있으며,
주님이 우리를 위해 치르신 그 십자가의 희생이 어찌 값으로 계산되어 질 수 있으며,
주님이 이루어 놓으신 이 복음의 역사가 어찌 사람의 생각과 계산으로 판단되어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된 이 구원이 어찌 물질적인 가치로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주님과의 사이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베푸신 은총에 대한 오직 감사 뿐인 줄 믿습니다.
주님은 축사하신 그 보리떡과 물고기를 모든 사람들이 배를 불릴 때까지 계속 떼어 주셨습니다.
어느 정도까지 입니까? 「저희의 원대로 주셨」다고 했습니다.
주님께 헌신되어진 한 어린아이의 희생이 주님의 능력의 손에 붙잡힐 때,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풍성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들이 배 터지도록 나누어 먹었는데도 12광주리가 남았다고 했습니다.
7. 사람은 부족함을 느낄 때, 유혹 받기 쉬운 존재입니다.
그래서 도적질, 사기, 거짓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번에 한국 탈렌트 박영하의 죽음은, 그 자신에게도 문제가 있지만, 믿었던 사람들의 배신의 결과인 것 같습니다.
자신의 문제라고 한다면, 사업할 수 있는 능력과 수단이 없는데도 무조건 벌려 놓고 사람에게 맡기면 돈이 벌릴 줄 알았던 것이 문제입니다.
주님은 이런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중요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내게로 가져오라」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작은 정성과 희생이라도 그것을 붙잡은 주님의 손길은 모든 사람들을 배불리고 만족시킬 만한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맥추감사절은 단순한 감사나 정기적인 행사가 아닙니다.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헌신을 요구하시는 감사절입니다.
우리 자신들을 주님의 손에 올려놓으라는 것입니다.
그 때, 약한 자는 강한 자가 되고, 가난한 자는 부한 자가 되며,
불만이 변하여 만족이 되고, 낙심이 변하여 기쁨이 될 것입니다.
8. 벳세다 광야에서 수많은 군중들을 향해 말씀을 증거하신 이후에, 보리떡을 떼서 저들로 배불리게 하신 주님의 그 보리떡을 떼시던 그 모습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자신의 몸을 찢어 우리에게 영생의 떡으로 나누어 주시는 십자가의 사건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죄로 말미암아 고통하고, 많은 문제로 방황하는 우리 인생에게 자신을 보리떡처럼 그렇게 찢어 나누어 주셨습니다.
살을 찢고 모든 피를 흘리시던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가 맞이하는 맥추감사절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기독교는 이 벳세다 광야에서 보리떡이 찢어져 모든 사람들을 배불림 같이 사랑과 구원을 나누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위해 스스로 가난하게 되셨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세상을 향하여, 아니 먼저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자신을 이 보리떡처럼 찢어 나누는 그런 은혜가 풍성하기를 소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