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2.6.용서 받을 수 없는 사람(마태복음 18:21-35)
[성경본문] 마태복음18:21-35개역개정
21.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23.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26.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32.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35.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용서 받을 수 없는 사람(마태복음 18:21-35/2009.12.6.오전)
1. 신앙생활 하면서도 힘들고 피곤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 믿으면서 삶이 힘들고 신앙생활이 권태로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복음을 주셨습니다. 자유를 주셨습니다.
사명을 주시고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약하고 흔들리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변화를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리와 창녀와 많은 죄인들, 그리고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이 사람들, 환경이 달라진 것도 아니고,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진 것 도 아닌데, 생활 속에 감사가 있고, 기쁨이 있고, 감격이 있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내 자신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인생이 불행하고 삶이 힘든 이유는, 내 자신은 변화되지 않으면서 내 주위의 모든 것이 변화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은, 그 순간부터 주님을 나의 주, 나의 왕으로 섬기고, 주님을 내 인생의 목자로 따르게 될 때, 바로 여기서 진정한 자유와 평화, 기쁨과 행복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에베소 2:10절에 보면,「우리는 그의 만드신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인생의 가치가 가장 위대하신 하나님의 손에 의해 지음 받았기 때문이며, 그리고 그 분의 뜻을 행하도록 함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선한 일을 위해 지음 받았고, 그래서 이 선한 일을 행함으로 우리의 존재 가치가 드러나고, 이 선행 속에서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고 우리에게는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2. 그렇다면, 우리의 할 일, 우리의 선행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한 가지는 바로 남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지난 번, 부산 사격장의 화재로 일본 사람들이 10명이나 떼 죽음을 당했습니다.
제가 27년 간을 일본에 살면서, 일본 사람들이 외국에 나가서 한꺼번에 이렇게 많이 죽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요 별로 보지 못한 일입니다.
3년에 한 번씩 초등학교 동창들이 모여 여행을 하는데, 이번이 외국으로서는 처음 여행이라고 하는데, 그 첫 번째 여행지가 한국이고 여기서 대부분이 몰살했습니다.
그런데 자식이 죽고, 남편이 타 죽은 현장에 일본 사람들이 달려갔습니다.
한국 사람들 같으면, 당연히 자식 살려내라 내 남편 돌려 달라고 아우성치고, 난장판을 치며, 생떼를 쓸 것인데, 이 일본 사람들은 너무 조용합니다.
울고 슬퍼하는데도 너무 조용합니다. 억울한 일을 당해 가족이 생명을 잃었는데도 한국 사람들 하고는 다릅니다.
텔레비전에 비쳐진 이 같은 일본 사람들의 모습을 본 한국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안됐다, 잘해 줘라, 보상을 충분히 해줘라, 선진국 수준에 맞게 보상하라고 했다 합니다.
한국 사람들, 문제 생기면 시끄럽고 골치 아프기는 하지만, 정이 얼마나 많습니까?
한 번 감동 받으면 있는 것 없는 것 다 내어줍니다.
이런 한국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일본 사람들도 감동 받고, 사건 해결이 원만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불에 타 죽은 사람은 안됐지만, 이런 모습을 통해 한일 관계가 더욱 좋은 관계로 발전한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3. 본문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7번까지 하면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대답도 듣기 전에 스스로 먼저 답을 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한국사람 감정에서 말한다면, 저 혼자 잘난 척 하려는 것입니다.
왜냐면, 유대사회에서는 남을 용서할 때 3번까지만 합니다.
그 이상은 용서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베드로는 스스로 7번이라고 말함으로 예수님의 칭찬을 듣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3번까지 용서하고, 이후에는 용서를 하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도리어 3번까지 인내하면서 용서했던 사람의 인격이 올라갈 것입니다.
여기에 4번을 더 보태었으니 베드로야 말로 이스라엘에서 가장 자비롭고, 가장 사랑이 많은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의외였습니다.
베드로를 향한 칭찬이 아니라, 지금까지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던 말씀을 하셨습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 일곱 번의 일흔 번은 무제한의 용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용서할 줄 모르는 왕의 무자비한 종의 이야기를 합니다.
임금이 회계를 하다 보니 일만 달란트의 빚을 진 종의 행태가 발각이 되었습니다.
끌고 와서 심문을 하는데, 종이 너무 불쌍하게 보여 왕이 그냥 그 자리에서 탕감해 주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종이 그 길로 나가서 자기에게 100데나리온의 빚을 진 친구를 만났습니다.
28절에 보니,「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했습니다.
멱살을 붙잡고 흔들고 분을 참지 못해 숨도 못 쉬도록 목을 조였을 것입니다.
이 친구가 조금만 기다려 주면 갚겠다고 하는데도 지금 당장 내 놓으라는 겁니다.
그리고는 빚을 갚을 때까지 옥에 넣고 말았습니다.
빚을 갚으라고 독촉하는 사람이, 상대방을 옥에 넣는다는 것은 빚을 갚지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4. 그래서 이 사람이 도대체 얼마의 빚을 졌기에 옥에까지 가두는가 궁금했는데, 조사를 해보니 1데나리온은 당시의 노동자가 받는 하루 품삯이었으니, 100일분의 노동력에 해당하는 돈이었습니다. 오늘날로 생각하면 서민에게는 적은 돈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갚을 수 없는 돈도 아닙니다. 마음만 먹으면 갚을 수 있는 금액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친구의 멱살을 붙잡고 돈 갚으라고 흔들어 대던 이 친구가 왕에게 탕감 받은 1만 달란트는 얼마나 될까 궁금해지기 시작합니다.
당시 갈릴리와 베뢰아 지역에서 일 년에 거두어들이는 세금액이 200달란트고, 유대와 이두메와 사마리아 전체에서 거두어들이는 세금은 600달란트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 종이 임금에게 빚진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값을 길이 없는 금액입니다.
참고로 신약시대의 1달란트는 20.4킬로그램의 금이나 은이었고, 6천 데나리온입니다.
100데나리온은 가난한 사람도 값아 나갈 만한 돈이지만, 1만달란트는 임금도 해결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천문학적인 숫자입니다.
왜 예수님은 현실에 맞는 비슷한 이야기를 하시지 않고, 상상을 초월하는 비현실적인 금액을 탕감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여기 왕과 종의 관계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종이 임금에게 빚진 것처럼, 우리의 죄가 얼마나 크고 무겁고,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를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5. 인간의 그 어떤 힘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죄 문제입니다.
25절에 보면, 왕이 진노하여「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고했습니다.
당시 최고가를 부르는 노예는 1달란트 값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종이 자기 몸을 팔면 얼마를 받을 수 있을겠습니까?
보통의 경우에는 0.2달란트, 가장 적게는 0.05달란트라고 합니다.
그러니 자기 식구를 다 팔아도 1달란트도 안됩니다.
이것은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지은 죗값을 치르기에는 너무 연약하고 무능하고 너무 불쌍한 존재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내 생명 내 육체를 다 팔아도 조금 전에 한 번 뱉은 거짓말도 속전할 수 없습니다.
하물며 평생 살면서 얼마나 많은 죄를 쏟아내면서 살았습니까?
분명히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롬6:23)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과연 누가 지은 죄를 스스로 탕감하고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겠습니까?
죄인이 죄인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죄인 스스로는 더더욱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죄의 문제입니다.
이런 불쌍한 인생들이, 왕이 종의 부채를 탕감해 준 것처럼, 불쌍한 인생들끼리 서로 사랑하고 도우며, 용서해 주며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니 비참할 정도인 것은, 서로가 서로를 용서할 줄도 모르고, 이웃을 적으로 만들고, 친구도 벼랑으로 밀어버리는 살인자와 같은 무자비한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우리 생각으로는, 내가 1만 달란트의 부채를 탕감 받았으면, 적어도 친구의 100데나리온 정도는 탕감해줘도 되는 것 아닙니까?
6.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촌은 그런 자비가 별로 없다는데에서 우리 모두의 미래가 불투명한 것입니다.
우리가 나는 용서받기를 원하면서도, 결코 남을 용서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안에 예외 없이 율법주의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율법주의적 삶은, 왕의 은총을 입어도 변화될 줄 몰랐습니다.
내가 매일 남에게 용서를 받으며 산다고 해도, 내 안에 율법적인 요소를 제거하지 못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이 율법주의를 극복하지 못하면 용서가 안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고, 스스로의 힘으로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인생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그 분이 죄로 말미암아 신음하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탕감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7번만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용서하며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용서받을 자격도 없는 우리를 위해 예수님이 대신 죽임을 당하신 것은 너희도 이같이 자신의 희생을 두려워 말고 남을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란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7. 왜 우리는 용서 받고 살면서도 남을 용서할 수 없습니까?
내 안에 자리 잡은 탐욕 때문입니다.
욕심이 많은 사람일수록 남을 용서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왕 앞에서는 가장 큰 자비와 은혜를 입으면서도, 나보다 약한 남들 앞에 서면 용서 대신에 무자비한 율법주의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탐욕이 욕심이 잔인하게 남을 응징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결과 이 어리석은 종에게 남은 길이 무엇입니까?
자신에게 용서받지 못한 자가 옥에 갇힘같이, 이 종도 진노한 왕에 의해서 1만 달란트를 다 갚을 때까지 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요즘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옛날 하고는 매우 다른 대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날 용서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옛날에는 죽어가는 순간에도 용서를 비는 모습이었는데, 요즘은 당당하게 자신을 절대 용서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용서 받았으면 남도 용서해 줘야합니다.
주님께 은혜를 입었으면 나도 남을 도와주고, 은혜를 베풀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용서가 되면 그 때부터 내 안에 자리잡은 율법주의도, 탐욕도 힘을 잃게 되고, 용서하면서 사는 세월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8. 주님은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리라」(마6:14)고 하셨고, 오늘 본문에서도,「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같이 하시리라」(35)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용서를 위해 가장 귀한 자신을 십자가에서 희생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번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람에서, 이제는 용서받고 용서함으로 시작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풍성해지기를 소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