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0.3.이 교회를 위하여(고린도후서 13:11-13)

[성경본문] 고린도후서13:11-13개역개정

11.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12.모든 성도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13.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제공: 대한성서공회

이 교회를 위하여(고린도후서 13:11-13/2010.10.3.오전)
1. 고린도교회는 받은 은사를 활용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대신에 왜곡된 영적 이해로 말미암아 분쟁과 혼란을 거듭하고 있었습니다.
소위 영적 엘리트들의 교만이 공동체의 화합보다는 분열과 고통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이런 교만은 도덕적인 타락을 가져왔고, 이로 인하여 교회는 더욱 분열되고 말았습니다.
그 사실을 구체적으로 몇 가지 살펴본다면,
음행 등의 성적인 문제로 시작하는 여러 가지의 도덕적인 문제들,
신자간의 소송문제나 결혼과 이혼의 문제,
우상제물의 문제나 성찬식의 오용,
방언을 포함한 은사활용의 문제, 예배와 관련된 문제,
죽은 자의 부활및 종말에 관한 문제들,
그리고 바울의 사도권에 대한 의심의 문제들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 만연한 이러한 수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하나,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구원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인식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의 서두에서「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고 했습니다.
2007년 3월11일 아침에, 고린도전서 1:1-9절의 말씀을 가지고 「교회는 무엇하는 곳인가」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증거하기 시작하여 오늘 고린도후서의 마지막 부분을 설교하기까지 약 3년 반이 흘렀습니다.
그 마지막 설교에 임하여서,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고린도교회의 성도들뿐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며, 과연 교회란 믿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무엇인가 하는 사실입니다.    

2. 고린도교회는 다원화된 세속도시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거울로 삼아야 할 교훈입니다.
고린도는 헬라세계의 동서남북을 이어주는 요충지에 자리잡은 도시로 무역이 왕성한 곳이었기 때문에, 세속적으로 좋은 환경과 더불어 사도바울의 영적으로는 많은 은사로 인하여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많은 문제들을 안고 갈등하며 고통하는 교회였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복음을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으로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믿지 못한다는 말은 결국에는 그들이 멸망하는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교회 다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교회가 전파하는 이 십자가의 복음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의 복음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자신을 위하여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모든 죄, 모든 문제, 모든 고통과 저주에서 유일하게 구원하실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국가는 물론이고 세상의 모든 조직이나 단체들, 회사의 경영에 있어서 그들의 정해진 목적을 이루고, 그 단체가 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가장 뛰어난 사람들을 리더로 세우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지도자를 정점으로 하여 모든 사람들은 유형무형의 경쟁과 전투를 통하여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떻습니까?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이 자니하며 문벌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다」(고전1:26)고 하였습니다.
저는 한 교회에서 26년을 목회하면서 왜 우리 교회는 다른 교회들처럼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 등등의 다방면에서 능력이 있고, 남다른 재주가 있는 사람들이 없을까 생각했습니다.
대부분이 가난하고, 그 가운데는 교회가 도와주어야만 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그만한 힘이 없어서 늘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와 관심을 자기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고린도 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3. 제가 어릴 적에 다닌 교회는 동네 언덕에 천막을 치고 바닥에는 가마니를 깔고 앉아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여름에는 너무 덥고, 겨울에는 너무 추웠고, 비바람이라도 불면 물이 들어오고 텐트 자락이 바람에 펄럭거렸습니다.
어떤 때는 바람에 넘어지기도 해서, 나중에는 언덕을 파서 벽으로 삼고, 그 위에 텐트를 덮었습니다. 그래도 그 때는 교회가 좋았습니다. 교회 청소도 하고, 깔고 앉은 가마니를 막대기로 먼지를 털어내고, 햇볕에 말렸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신자들은 하루 벌어 하루를 살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굶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나중에 어느 교회의 장로님이 헌금을 해서 좀 떨어진 곳에 땅을 사고 어린아이에서 부터 시작하여 노인에 이르기까지 온 교우들이 달라붙어 멋진 성전을 건축 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가 주시는 상도 많이 받았지만, 사십 수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지금도 생각해 보면, 그곳은 주님의 몸 된 교회였고, 그런 교회를 드나들며 신앙생활 했던 그 때가 참으로 보배롭고 아름다웠다는 생각이 듭니다.
교인들은 거의가 가난하고 사회적으로는 힘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교회 신자 중에 유명한 전태일씨의 형제들과 그 모친 이소선씨가 계셨습니다.
교회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모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랑에 굶주리고,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고, 마음에 억울함과 원통함을 가진 자들과 세상에서 짓눌리고 고통당하는 자들이 더 많이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도 분명한 말씀으로 선언하시기를,「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라」(눅19:10)고 하였고,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9:13하)고 하셨습니다.
여기 잃어버린 자란 말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떠난 영적 탕자를 말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떠남으로 그 영과 육신이 죄로 말미암아 고통과 영원한 저주에 빠진 자를 말하는 것이요, 스스로의 힘으로는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자가 되어 절망의 심연에 빠져 있는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와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대신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영원한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해 교회가 이 지상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4. 그러므로 교회는 온갖 문제를 가진 사람들, 가슴에 숨은 상처와 고통을 가진 사람들, 무거운 인생의 짐을 가진 자들이 모이기 마련이기 때문에, 교회에 힘 있는 자들이나 가진 자들이 모여 들기를 기대한다면, 이것은 교회의 본질과 그 기능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거듭 반복하지만, 교회는 주님의 말씀대로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구원하는 곳이요, 이 일을 위해 고통하는 사람들의 삶의 현장에 찾아감으로 교회와 일치되게 하는 곳이요, 주님의 사랑을 값 없이 베풀고 주는 곳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바울은 본문에서 무엇을 강조하고 있습니까?
「온전케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하」며「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고 했습니다.
여기 온전케 된다는 말은, 잘못된 생활을 고치라는 말입니다.
분쟁하는 사람들의 분쟁을 화평함으로 바꾸고, 도덕적으로 문제가 많은 사람들을 깨끗함으로 바꾸고, 교만한 마음들을 그리스도의 온유함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교회의 최대의 목적이지만, 온전한 구원이란 영혼만이 아니라 육신과 그 삶이 근본적으로 변화되는데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있고 성령의 은사를 충만히 받았다고 하여도 그것을 주님의 원하시는 곳에 사용하지 못하거나 잘못 사용하거나,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고 교만히 행한다고 하면, 지혜와 지식의 말씀은 무슨 소용이 있으며, 방언은 무슨 소용이 있으며, 병 고치는 것과 예언하는 능력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사도바울은 그러한 신앙을 시끄럽게 울리는 꽹과리에 비유한 것입니다.
그래서 은사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행동하는 이 고린도교인들을 향하여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비유하였던 것입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인 것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고전12:12)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거짓말을 하면, 내 거짓말과 숨은 범죄로 인하여 온 교회가 고통을 당하고, 나의 분냄과 분쟁이 주님의 몸을 찢는 결과를 만드는 것입니다.
지상의 모든 교회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마음을 같이하며, 한 목적과 뜻을 가지고 같은 말, 같은 뜻 같은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아름다운 교회인 줄 믿습니다.

5. 계속해서 바울은「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고 했습니다.
믿는 자는 예외 없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었기 때문에, 구원의 완성 단계에 이르기까지 주님의 몸된 교회를 통하여 지속적인 변화를 이어가야만 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하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피차에 거룩한 입맞춤, 즉 사랑의 교제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 거룩한 입맞춤이야말로 온갖 갈등과 차별과 다양성을 가진 사람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묶는 사랑의 띠가 되는 것입니다.
문제가 많은 이 고린도교회조차도 바울 혼자 세울 수는 없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같은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아니하고 몸 바쳐 복음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신실한 하나님의 일꾼이 필요하며, 그들에게 말씀을 배운 아볼로 같은 유능한 교사며, 디도와 같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고린도 교회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린 대로, 우리는 모두가 함께 주님의 몸을 세우는 사람들입니다.
혼자 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제가 여러분들을 돕고, 여러분들은 저를 돕고, 우리는 또 서로간에 돕는 그 도움을 통해 주님이 원하시는 하나 된 교회를 이루어 가는 줄 믿습니다.

6. 저는 지난 주간에 목사님 한 분을 만나 식사를 하면서 좋음 말씀을 들었습니다.
한국에 가서 보니 어느 절간에서 사람들이 부처 앞에 모여서 말하기를, 이 부처님은 어디서 모셔 오셨습니까? 저 부처님은 어디서 모셔오셨습니까? 하며 매우 공손한 태도로 말하는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불교도들은 말못하는 부처를 보고도 극진하게 예의를 표시하면서 조심스럽게 대화를 하는데,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님자도 빼버리고 예수가 어쩌구 저쩌구 함부로 말한다는 것입니다.
우상숭배자들은 돌멩이에게도 경외심을 가지는데 왜 우리는 내 대신 죽어주신 예수님에 대하여,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향해서는 그런 태도를 보이지 못하는 것입니까?
교회에 대한 태도는 곧 우리들의 신앙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렇게 말할 수 있느냐 하면, 교회는 주님의 몸이요, 믿는 우리들의 머리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교회의 주인이요 머리임이 확실하다면, 그 어떤 문제를 안고 있는 지상의 어떤 교회라 할지라도 문제는 반드시 해결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이미 일본의 TV뉴스에서도 나왔지만, 우리 몸의 특별히 팔 다리 같은 곳의 상처는 약을 바르는 것 보다 깨끗하게 해서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훨씬 빨리 치료되고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 현상이며, 우리 몸이 가진 회복의 능력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몸된 교회는 반드시 모든 문제를 극복하고 주님의 은혜로 회복되는 줄 믿습니다.
염려하는 대신에 복음의 능력을 믿기 바랍니다.
근심하는 대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온전하신 사랑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7. 우리는 지난 26년 간을 주님의 몸되신 이 교회와 더불어 걸어왔습니다.
젊은 청춘에 만난 사람들은 오륙십 대가 되었고, 노년에 만나신 분들 중에는 상당수가 소천 하셨거나 다른 곳으로 이동하습니다.
갓난아이들은 성인으로 이 사회의 일원이 되었으니 그야말로 한 세대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 동안에 많은 고통과 눈물과 가슴 아픈 사건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이 교회로 말미암아 저와 여러분은 넘어져서 영영 일어설 수 없는 환경 중에서도 다시 일어날 수 있었고, 우리가 엎드려 기도하던 그 자리에서 성령님의 위로와 새 힘을 체험하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나 혼자서는 올 수 없는 길이었습니다.
우리 모두와 함께 걸어오신 주님이 계셨기 때문에 오늘의 우리가 여기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되돌아보면 감사의 눈물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정말 우리가 여기까지 오기까지 교회를 위해서 많은 희생을 치렀지만, 어찌 주님이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그 희생에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수고, 그 희생을 이 세상에서 보상 받을 길이 없습니다.
정부가 그것을 보상할 것입니까? 어떤 기관이나 단체가, 혹은 개인들이 보상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27년 간 선교사로 수고하면서 주위의 선교사들이 여러 기관들과 교회들과 단체들로부터 수고했다고 상을 받고 포상을 받는 것을 많이 보았지만, 저는 아직 까지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섭섭하거나 원하는 것도 없습니다.
이유는 나와 여러분이 받을 영광은 이 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저 영원한 하늘나라에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우리가 세상을 위해 수고했다면 세상 사람들의 박수를 받을 수 있을 것이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희생했다면 정부는 훈장과 포상을 주겠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주님의 은혜에 감격해서 주님을 위해 일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수고는 전부 저 하늘나라에 있는 줄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희생과 눈물은 오직 주님만이 아시고, 그러므로 우리의 상급은 주님만이 갚아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를 위한 희생은 결코 헛된 것이 없으며, 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곧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그러므로 낙심하지 맙시다. 용기를 잃지 맙시다. 주님도 아버지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시고 끝까지 가셨습니다.

8. 어디에 우리의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까?
내 능력입니까? 사람들의 도움입니까? 교회의 조직이나 사람들이 가진 능력입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초점은 사람이나 건물이나 어떤 외형적인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도가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교회라는 존재가 죄인 구원을 위한 유일한 구원의 방주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복음, 하나님의 값없이 베푸신 구원의 은혜에 우리의 삶의 초점을 맞춘다면,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고, 연약하고 무능한 인생이라도 주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으며, 주님의 선하신 뜻을 위해 우리의 삶이 귀하게 쓰임을 받는 줄 믿습니다.

바로 이것이 문제만난 고린도 교회를 주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회복케 함같이, 우리 또한 이 교회를 통하여 장차 받을 영광은 물론이고, 이 세상에서도 인생의 한계를 극복하고 하나님께는 큰 영광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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