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6.3.사르키노스(고린도전서3:1-9)

[성경본문] 고린도전서3:1-9개역개정

1.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2.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3.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4.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

5.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6.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7.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8.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9.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사르키노스(고린도전서3:1-9/2007.6.3.오전)
1. 기원전 3백년 경에 일본사람들이 벼농사를 시작하고, 금속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이 시기부터 서기 3세기까지의 6백년간을 일본역사는 야요이(弥生) 시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동경대의 인류학과 교수인 하니하라 가즈오(埴原和郎) 의하면 기원전 3백년의 일본열도의 인구가 7만5천8백명쯤이었고, 서기 700년경에는 540만명으로 증가했다고 합니다.
이 숫자는 다른 지역의 초기 농경사회의 인구증가률인 0.1%에 비해 4배가 넘는 인구증가를 보이고 있는데, 이것은 다른 지역에서 일본으로의 대규모 인구이동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으며, 이 시대에 일본열도로 사람들이 이주를 하려면 반드시 한반도를 거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한반도에서 건너온 귀화인들과 도래인들은 길다란 일본열도를 놓고 한반도와 가장 가까우면서도 농경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규우슈우 지방을 택하여, 청동기 문화를 배경으로 일본을 실제적으로 지배하기 시작하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전도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사도바울이 소아시아를 다니면서 여기 저기 전도하였지만, 어떤 곳은 옥토처럼 복음을 잘 받아들여 교회가 성장해 가는 곳이 있는가 하면 어떤 곳은 박토처럼 너무 어려운 환경과 조건 속에서 전도의 어려움을 겪는 곳도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지역의 특성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바로 고린도교회 같은 곳이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는 국제적인 상업도시로 번성하면서 로마제국의 각 지역의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다양한 이주자들로 인해 혼합주의가 성행하며, 특히 사랑의 여신이라 불리는 아프로디테의 신전에는 1천 여명의 여사제들이 매춘부역할을 하면서 이방신에게 제사를 드림으로 고린도 시민들은 성적으로 매우 부패하고 타락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지역적 특성과 기질은 고린도교회 안에까지 심각한 영향을 주었던 것입니다.

2. 오늘 본문을 보면 「육신에 속한 자」라는 말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여기 「육체적」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사르키노스」라고 하는데, 이것은 육신으로 이루어 진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사르키노스」를 「사르키코스」라고 변형해서 사용하고 있는데, 이 경우에는 육신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의 의미하고 있다고 합니다.
곧 「사르키노스」는 말 그대로 육신에 속한 자를 말하는데 반하여 「사르키코스」는 육정적인 사람 곧, 충분히 영적인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옛날의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육신의 죄된 욕심의 지배를 받고 있는 사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의 기록에 자주 등장하는 「육신」이라는 말은 도덕적, 윤리적인 의미에서 취급되어 지며, 이것은 주로 세속적이 인간성이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는 상태를 나타낼 때 사용되어졌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오묘한 지혜를 말하려고 했지만, 고린도교인들은 지나치게 그 수준이 낮은 관계로 바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할뿐더러, 서로 다투고 시기하고, 매우 부도덕한 상태에 있으면서 이런 것을 오히려 자랑거리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그들을 신령한 자로 대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은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상과 죄의 심각한 영향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늘 그들은 신앙이 자라지 못하고 어린아이와 같은 유치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3. 바로 이런 부분들이 교회의 지도자들을 실망시키며, 때때로 심각한 타격을 주고 있습니다.
처음 믿을 때에는 누구나가 연약하고 어린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어린아이가 자라나듯이, 하나님의 백성들도 자라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언제까지 자라지 못하는 것은, 옛 습성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르키노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이미 영적으로는 구원받았지만, 여전히 죄성의 지배를 받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하고 있는, 육신의 욕심이 강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 1절에도「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라고 했습니다.
어린아이는 성숙되지 못한 인격이 특징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주장이 강하고, 불건전한 라이벌 의식이 강합니다.
그리고 도덕이나 윤리적인 수준이 낮으며, 세속에 대한 호기심이 강합니다.
그 결과 성인으로서의 지혜가 부족합니다.
왜 교회 안에서 분쟁과 시기와 질투가 일어납니까?
한마디로 신앙이 유치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수준을 높이 생각했다가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신자들의 수준이 매우 유치한 것을 알았습니다.
그 결과, 바울의 대책은
첫째로 그들을 신령한 자로 취급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둘째는 그들을 영적으로 어린아이라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셋째는 그러므로 젖으로 양육하고 밥이나 단단한 식물을 공급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4. 육체는 어른인데 초등학교 수준의 용돈만 받는다면 이 사람이 무슨 일을 제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밥 먹어야 할 사람이, 젖이나 먹으면 절대로 영적인 파워가 나오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변화 산에 올라가신 후, 산아래 남은 제자들에게 귀신들린 아이를 데리고와서 낮게 해 달라고 했지만 제자들은 고생만 죽도록 하고 고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산에서 내려오신 주님은 간단히 귀신을 쫓아내었고, 의아하게 생각한 제자들이 왜 우리는 안되는가 하고 묻자, 「기도와 금식이 아니면 이런 유가 나가지 아니하느니라」(마17:21)고 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부르짖는 똑같은 기도라고 기도에는 수준이 있습니다.
10분 기도와 1시간 기도는 전연 다르고, 철야기도와 금식기도가 다르며, 혼자 기도하는 것과 함께 부르짖는 기도가 다릅니다.
하만의 궤계에 빠져 모든 히브리민족이 몰살을 당할 것을 왕후 에스더가 알고는 모든 히브리민족에게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밤낮으로 삼일을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 기도가 민족을 구원하였고, 이스라엘은 지금까지 부림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왜 우리가 제자훈련이니 목적이 이끄는 삶에 심혈을 기울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도 신앙의 초보에 해당하는 젖먹이 신자들에게 적당한 수준이 있고, 군사처럼 훈련받아 능력으로 무장한 신령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단단한 식물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훈련 도중에 탈락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결론은 젖먹이 신자이기 때문입니다.
훈련에 생명을 걸어야 생명을 건 전투장에 나갈 수 있으며, 영적 싸움에서도 승리하는 줄 믿습니다.

5.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강력하게 사모한다면, 영성이 발달되고, 「사르키노스」라고 불리는 육신에 속한 자가 신령한 사람으로 변하며, 기도응답이 쏟아지고, 능력 있는 믿음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를 향한 바울의 안타까운 심정을 본문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2절에 「지금도」라고 했고, 3절에는「아직도」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쯤에는 고린도교회가 많이 성장하여 신령하고 거룩하며 능력있는 교회가 되었을 것으로 기대했는데, 현실은 그 때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것이 없음을 바울은 알고 속으로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냥 자라지 못하였다면 그래도 위로가 되겠는데,「사르키노스」답게 그들은 3절 이하에 기록된대로 서로가 서로에게서 분리되어 싸우고 있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교회들 중에 가장 문제가 많은 교회가 고린도 교회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교회의 구성원들인 성도라 불리우는 사람들의 영적인 지능이 발달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영적인 미숙아들의 모임입니다. 그래서 모이면 싸우고 만나면 분쟁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천국의 그림자요 상징입니다.
예수 십자가의 복음은 분쟁을 그치고 화목하고 하나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과 분리하여 성도들의 거룩함을 지키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모든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도우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신령한 사람은 성령의 인도와 감화아래에서 말씀에 복종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한 마디의 말도 조심합니다. 사람들의 오해를 받지 않도록 표정도 잘 관리할 줄 압니다.

6. 그렇습니다. 우리는 변화되어야 합니다. 지금 세상도 변화되지 못하면 도태하는 시대입니다.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늘 어린아이의 수순에 머물러 있으면, 구원은 받을 수 있지만, 늘 마귀의 밥이 될 뿐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하였을 때, 사방에 대적이 많았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그 많은 대적들과 싸워 이겼고, 마침내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고 요단 물을 밟고 건너갔습니다.
그러나 연약하여 뒤쳐진 사람은 전부 아말렉 족속의 밥이 되어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바울이 2절에서「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고린도교회가 큰 소리로 싸움은 잘해도 그들의 수준이 아직도 멀었다는 것입니다.
「사르키노스」즉 육신은 우리를 분쟁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게 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영적인 싸움입니다. 우리는 하루하루를 영적으로 전투하는 군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과 조건이 고린도 교회와 비슷합니다.
항구도시 오사카에 우리는 이방인들입니다. 그것도 말이 많고 문제도 많은 학다리(鶴橋) 시장 가까이 있습니다.

7. 어제 아침 신문에 보니, 제가 좋아하는 안도 다다오(安籐忠雄)라는 세계적인 건축가의 인터뷰가 실려 있었습니다. 그는 오사카에서 나서 오사카에서 자랐지만, 이대로는 오사카에 미래가 없다는 것입니다. 날로 이미지는 악화되고 기업들은 떠나가고 사람들의 공중도덕심은 사라지고 마음은 불안과 우울증에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시민이 앞장을 서서 오사카의 좋은 전통을 이어가고 아름답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도시대에 상인들이 자기 재물을 쏟아서 헌신적으로 오사카의 다리들을 놓고 마을들을 만들었던 그런 전통, 명치 대정 시대만 해도 오사카는 많은 기업들과 거부들의 헌신으로 일본에서 최고의 도시, 아름다운 도시를 만들었습니다.
안도 다다오의 의도는 한마디로 오사카 사람들이 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공공의 힘이 아니라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힘으로 새로운 오사카를 만들자는 것입니다.
사실 10수년 전부터 동경지역의 자본들이 앞을 다투듯이 오사카에 들어와 번 돈을 재투자 않고 동경으로 다 가져가고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대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무섭게 변화되고 있는 이 시대로부터 버림당할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도하게 하신 줄 믿습니다.
무너져 가는 우리 자신을 다시 세우고, 고통 하는 한 시대를 살리려면 먼저 우리 자신이 바뀌어야 합니다.
한 번의 주일예배로는 아무런 힘도 없는 명목상의 크리스챤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젖이 아니라 단단하고 신령한 양식인 말씀으로 훈련받아야 합니다.

이 훈련을 통해 「사르키노스」노 아니고 「사르키코스」도 아닌, 신령한 자가 되어 일본을 변화시키는 신령한 자 되시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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