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8.16.형제를 사랑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요한일서 2:7-11)
[성경본문] 요한Ⅰ서2:7-11개역개정
7.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
8.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침이니라
9.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10.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11.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
형제를 사랑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요한일서 2:7-11/2006.8.16)
1.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이 사랑을 예수님을 통하여 알며, 그의 십자가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체험하게 합니다. 그래서 제자의 삶이란 예수님처럼 되며, 예수님처럼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만일, 기독교가, 아니 우리의 교회가 이 사랑의 힘을 잃어버린다면, 교회는 사실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형제 사랑이란 어떤 것이며,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2. 사랑이란 새 계명이 아니라 신구약 전체를 흐르는 하나님의 일관된 명령이며 기독교의 중심 사상입니다.
구약에도, 같은 유대인을 향한 형제 사랑의 계명들이 있습니다.
신명기 15장에, 진 빚을 값을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빚을 탕감해 주는 법이 있으며, 종 되었던 사람을 해방시키는 법과, 신명기 24장에는 고아와 과부를 보호하는 이웃 사랑의 명령들과 심지어 나그네를 선대하는 내용들이 많이 있습니다.
모세의 십계명이야말로, 하나님 사랑과 더불어 이웃 사랑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새롭게 주어진 명령이 아니라, 이미 있었던 계명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도요한이 본문 7절에서 구 계명이라고 했다가, 8절에서는 새 계명이라고 말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모세의 계명에는, 「이웃사랑」을 말했지만, 예수님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심으로, 그 사랑의 영역과 심도가 다르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3. 또한 하나님의 명령인 이 사랑의 계명이 예수님이 오시기까지는 불완전하게 시행되어져 왔던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서 이 불완전한 사랑이 완전하게 시행되어졌기 때문에 「새계명」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주님도 마5:17절에서, 이 모든 율법을「완전케」하기 위해 오셨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았으며,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까?
모세의 이웃 사랑으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셨기 때문에, 「원수까지도 사랑」하시는 이 사랑 때문에 우리가 용서받고,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십자가에서 이 사랑을 완성하심으로 사도요한은 이것을 새 계명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 놀라운 사랑을 받음과 동시에, 형제 사랑에 대한 명령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4. 그렇다면 형제 사랑의 증거는 무엇입니까?
10절에 보니,「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다고 했습니다.
곧 사랑을 행함에 있어서는 자신에게 양심의 가책이 없는 것입니다.
거리낀다는 말은 헬라어로「스칸달론」으로, 짐승이나 새를 잡기 위해서 만든 구덩이나 올무, 그리고 거물을 말하는데, 이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할 때에는 실족하게 하거나 죄짓도록 만드는 여러 가지의 조건들을 말합니다.
이것은 「양심의 가책」으로 번역할 수 있으며, 영어의 스캔들도 이 단어에서 온 것입니다. 아뭏튼 형제를 사랑하는데 있어서, 자신의 신앙과 양심에 거리낌이 있느냐 없느냐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경우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됩니까?
형제 사랑에 최선을 다하지 못했을 때
계산적으로 베풀 때
사랑이 잘못되어 상대방이 실족하게 되었을 때 등의 경우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의 사랑의 행위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대체적으로 사랑이란 주는 쪽 보다 받는 쪽이 일반적으로 약한 존재일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 사랑은, 실족하는 일도 없으며, 양심에 가책 받을 일도 없을 것입니다.
5. 그러나,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11절에서,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이유는, 스스로 어두움 속에 있으며, 그러므로 또한 소경이 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왜? 그리스도께서 33년 동안 육신을 입으시고 몸으로 보여주신 그 사랑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켄터키의 멤머드 동굴 안에는 에코라고 불리는 작은 강이 있는데, 이 어두움 속에 있는 물고기들은 눈구멍은 있어도 눈동자가 없다고 합니다. 물고기 장님들입니다.
이 물고기들처럼, 예수님 시대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볼 수 있는 눈이 없었습니다.
이유는 빛 가운데 거하며 행하는 것을 버리고, 스스로 어두움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선행을 나팔불고 다니며, 조그만 선행도 의무적으로 행하면서 하나님께 자랑하며, 스스로는 아무 짐도 지지 않으려 하면서 남들에게는 많은 짐을 지우려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스스로 어두움 속에 거함을 증거 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6. 그런데 11절의 「눈을 멀게 하였다」는 말씀은, 소경 되었다는 것으로, 이것은 고후4:4절에서 같은 어형을 사용하는 「튈로스」에서 온 단어로, 이는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도록 막는 이 세상의 신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체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곧 어두움의 신인 이 세상 마귀가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여 세상을 향하여 비취는 하나님의 사랑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눈이 면 것에 대하여 이사야는,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6:10)고 했습니다.
하나님 스스로도 범죄 하여 어두움에 갇힌 사람들을 빛으로 돌아오지 못하도록 귀와 눈과 마음을 소경 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상황은 곧 하나님의 심판을 말하는 것입니다.
7. 증오와 미움과 시기는 어두움의 신인 마귀가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그 결과, 자신은 물론이고 사랑 받아야 할 대상마저도 함께 길을 잃고 방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마치 「소경이 소경을 인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마15:14)는 말씀 그대로의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추운 겨울에 눈 덮인 산을 넘는데, 친구가 쓰러지자 다른 사람은 혼자 살려가 친구를 내버려두고 갔고, 다른 사람은 쓰러진 친구를 엎고 산을 넘었는데, 혼자 간 사람은 얼어죽었고, 친구를 살리려고 엎고 넘어간 사람은 서로의 체온을 통하여 두 사람이 다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랑이 없는 곳에는 모두가 고통이고 모두에게 죽음뿐이나, 형제 사랑은 나도 살고 남도 살게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은 우리를 죄와 영원한 저주에서 구원받아 하나님 자녀되게 하였고, 주님 자신은 모든 것 위에 뛰어난 이름과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곧 형제사랑의 행함이 있다는 말입니다.
빛 가운데 있다는 말은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가 계속되고 있다는 증거이며, 동시에 그 가 사랑의 사람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모든 사람들과 나눔으로 우리의 영육이 더욱 풍성하고 아름다워지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