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6.9.나를 누구라 하느냐(마가복음8:30-33)
[성경본문] 마가복음8:30-33개역개정
30.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고하시고
31.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32.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33.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제공: 대한성서공회
|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가복음8:30-33/2019.6.9.오전) 1. 이 세상에는 인생이 가는 길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며 닮아가는 길이 있고, 둘째는 예수님과는 상관없이 제 인생만을 믿고 의지하며 가는 길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배우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 분을 섬김으로 그 분의 거룩한 영광을 위해 우리 자신을 드리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다른 길을 가는 인생은 전부 제 자신을 위해 세속의 욕망을 채우면서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살면 살수록 육신의 문제가 쌓여 고통이 넘치고, 세상 욕망을 채우려고 하면 할수록 육신의 목마름과 영적인 기갈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길은 처음부터 잘못된 길이요 파멸의 길이요 영원한 부끄러움이 될 뿐입니다. 처음에는 넓은 길로 가니 편하고 좋은 것 같지만, 갈수록 그 길은 좁아지고 험한 길이 되며, 벗어버릴 수 없는 인생의 죄 짐과 고통으로 신음하다가 죽음에 이르러서야 더 이상 갈 길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절망하고 후회하지만 때는 늦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배우고 그를 본받으며 가는 길은 그렇지 않습니다. 받은 귀한 은사와 능력으로 주님을 섬기고, 그 섬김을 통해서 구원받은 자의 감격과 확신 속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비록 가난하고 몸의 연약함이나 질병을 벗어버리지 못해도 위로부터 내려오는 아버지 하나님의 베푸시는 위로와 신령한 은혜와 축복으로 인하여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들으면 새 힘이 솟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기쁘고, 그래서 찬송이 넘치고 찬송을 한곡 불러도 온 힘을 다해 최고의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지금 온 세상은 급속한 변화의 물결 속에 떠내려가면서 그야말로 한 치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그런 상황에 빠져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모든 것이 다 뒤집히는 세상입니다. 유럽에서는 이슬람 이민자들이 그 나라의 법을 무시하면서 원래 가지고 있는 종교법을 내세우면서, 말도 안 되는 질서와 권리를 주장하고 있지만 그런 것을 저지할만한 힘이 없습니다. 대부분의 언론들이 자유니 평등이니 차별에 관한 것을 내세우면서 그들의 말도 안 되는 언행을 지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 세계가 제4차 산업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정치, 경제, 문화, 교육 등이 하루가 다르게 변화되고 있는데, 이런 변화를 보면서 느끼는 것은 과연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변화는 누구를 위한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변화는 예수님을 따르고 그를 닮아가며 그 분을 섬기는 사람들을 위한 변화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확실한 것은 세월이 갈수록 이 세상은 예수님의 제자된 우리가 살아가기에는 매우 어려운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변화 속에서 우리는 지금부터 무엇을 해야 합니까? 또한 이와 같은 급속한 변화의 한가운데서 어떻게 하면 내 믿음을 지킬 수 있습니까? 3. 카메라도 초점을 제대로 맞추면 선명한 영상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믿음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초점을 제대로 맞추면 내가 나아갈 길이 보이고, 신앙의 정체성을 바로 잡으면 내가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답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열심히 믿기만 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신다는 기복신앙의 영향을 받으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이나 삶의 모습이 환란이나 박해나 변화하는 세상 앞에서 너무 허약하다는 사실입니다. 영적으로 지나치도록 무지함으로 인해 강한 군사가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우리의 믿음은 바람 앞의 촛불처럼 힘없이 꺼져버릴지 모를 정도로 그렇게 연약한 상태에 있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현실입니다. 국가 대표 축구팀이 국제 시합에 나가서 공격의 좋은 찬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때마다 결정적인 골을 넣지 못하게 되면, 반드시 역공을 받게 되고 결국 우리가 넣어야 할 골을 상대방에 의해 골을 먹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변해야 할 때, 그리고 변해야 할 부분이 변하지 못하면 반드시 위기가 오며 고통이 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개인이던 어떤 단체나 교회는 물론이고 국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가 바로 그 좋은 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변하지 못하면 더 깊은 세계로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복음을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의 뜻도 헤아릴 수 없으며, 결국 우리가 열심을 내어도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다른 곳을 향해 열심을 내기 때문에 헛고생만 하는 것입니다. 4. 오늘 본문의 내용이 강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실 그리스도, 즉 메시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시고 나를 따르라고 하시면서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동행하는 제자들은 그 분이 베푸시는 기적과 수많은 능력을 보고 체험하면서도 그 사건들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 분이 행하시는 기적이며 능력들을 보면서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일본에 와서 여러 번 느끼는 것은, 일본교회를 가보면 모든 것이 질서 정연하고 교회 건축물도 깔끔하게 관리되어 있고, 구석구석 사람의 손이 가지 않는 곳이 없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교인들도 정중하고 예의가 바르며 품위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그 교회의 목회자의 모습입니다. 속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겉으로 보면 너무 초라하고 힘이 없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어보면, 목사님이 자신들보다 더 나은 옷차림을 하거나 좋은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는 것은 용납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 자체의 재정적인 문제나 성도들의 생활의 수준 탓도 있겠지만, 아무리 청렴하고 검소한 모습이 감동을 줄 수 있는지는 몰라도, 자신들의 육신보다 더 소중한 하나 밖에 없는 영혼을 책임지고 있는 목회자에 대한 배려가 결코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고전9장에 보면 사도의 권리, 즉 복음을 소유한 자의 권리에 대한 기록을 볼 수 있는데, 11절에 보면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고 하였고, 13절에도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에서 섬기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고 하였습니다. 물론 사도바울의 고백대로 스스로 이런 권리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더욱 아름다운 일이지만, 그러나 내 영혼을 책임지고 있는 영적 스승에게 대한 대우와 태도는 좀 더 성경적인 방향으로 바뀌어야 함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5.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우리에게 영혼의 양식을 먹이고 있는 영적 스승의 존재 가치를 몰라보는 것처럼,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영적인 안목도 이 시대와 별 차이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28절을 보면 예수님을 디다스케, 즉 선생님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헤롯 안티파스가 생각하는 것처럼 죽은 세례요한이 살아 돌아왔다고 하였고, 어떤 사람들은 엘리야 선지자가 다시 나타났다고 하며, 사람들 마다 예수님에 대한 생각과 평가는 각각이었습니다.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알지 못한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알지 못하면 누구라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지런히 예수님을 배우고 그 분과 우리가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늘 반복해서 학습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요12:45) 고 하셨고, 나를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요11:40)이라고 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배워 알아갈수록 복음의 능력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고, 저절로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소원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키워갈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종교 의식으로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었는지는 몰라도 진리와 생명에 관해서는 빈 깡통과 같은 존재였는데,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죽하면 예수님도 내가 다시 올 때 믿는 자를 보겠느냐고 부정적인 말씀을 하신 이유는 그들이나 우리나 하나님의 아들을 눈앞에서도 알아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6. 지지난 주간에는 가와사키에서 초등학교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대량 살육의 범죄가 있었고, 또한 고령자에 의한 자동차 폭주 사건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을 보면서 세상이 무섭게 변화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이런 현상은 갈수록 심화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지구촌 단위로 변화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나 환경을 보면서 느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런 변화는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분명 영적인 배경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요8:44절의 살인자요 거짓말쟁이인 마귀의 흉계가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표현대로 세상 풍조와 공중의 권세를 잡고 있으면서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엡2:2)인 마귀가 하는 일입니다. 마귀는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인간의 존재가치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를 추종하는 어둠의 세력들의 언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럴 때는 이렇게 말하고 저럴 때는 저렇게 말하는 일관성 없이 거짓말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각성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 내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구나.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엡5:16절에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는 말씀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시점에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믿고 따르는 이 예수님은 누구신가 하는 것인데, 그 답을 어디서 찾아야 합니까? 7. 본문 29절에 보니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가 말하기를 "주는 그리스도" 라고 하였습니다. 똑같은 사건을 두고 마태복음에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마16:16) 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타락하고 어두워져도 그래도 예수 믿는 사람들은 무언가 다르다는 말들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똑같은 예수님을 두고서 세상 사람들과 예수님의 제자가 보는 견해가 다른 것인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늘 보고 듣고 배우는 것이 세상 사람들하고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교회를 비방하고 예수님의 제자들을 욕해도 우리는 서로 믿어야 하고 불쌍히 여겨서 용서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을 눈앞에 두고서도 알아보지 못하고 다른 말을 하는 이 세상을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유는 이미 말씀드린 대로 그들을 통치하고 다스리는 또 다른 세력 마귀가 있으며, 그들은 그 악한 세력에게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원문에 보면 29절의 시작 부분에 "그러나 너희는" 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이 나를 어떻게 보던지 상관,이 없고 신경 쓸 일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미 나의 제자가 된 너희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러나 너희는" 이라는 이 말씀을 기억할 때, 우리는 세상과 상관이 없이 예수님의 제자로서 천국 시민으로서 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8. 그런데 베드로의 이런 고백을 들은 예수님의 반응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칭찬하기 보다는 꾸짖어 책망하셨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31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무엇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으며 그 일을 위해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으셔야 하는지 말씀하심으로, 베드로가 강하게 반항하였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이런 모습에서 오늘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은, 신앙고백은 너무 잘해서 백점짜리였지만, 생각이나 행동은 그야말로 사탄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16:13-17절을 보면 사실 베드로의 놀라운 이 고백은 자기 실력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가 알게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힘써 배워서 알고 믿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는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한국에서 건국신화에 나오는 단군을 예수님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중국의 공자를 예수라고 하고 인도의 석가 또한 예수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70년대 이후에는 기독교 토착화를 외치면서 엉뚱하게 남미의 해방 신학을 가져와서 이상한 소리를 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말하는 단군도 석가도 공자 맹자도 아니고, 남미의 해방신학이 말하는 민중의 가난과 인권을 위해 오신 혁명가도 아닙니다. 그는 오직 인류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십자가에 희생 제물로 내어주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일 뿐입니다. 9. 또한 엘리야나 세례요한이나 다른 선지자가 될 수 없는 것은 그들이 하는 일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이 전연 다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가지고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의 무엇이며 그는 과연 누구이신가? 여기에 대한 분명한 답을 얻을 때, 우리는 진정한 진리의 길을 걸을 수 있으며, 이 어두움에 싸여 고통하는 세상에 생명을 주는 복음의 증인으로서 사명을 완수 할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모두의 죄를 대신하여 대속물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온 인류의 구주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이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