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3.10.세상을 향한 주님의 마음(마가복음 6:30-44)

[성경본문] 마가복음6:30-44개역개정

30.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31.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32.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새

33.그들이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그들인 줄 안지라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 곳에 달려와 그들보다 먼저 갔더라

34.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35.때가 저물어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날도 저물어가니

36.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37.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38.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이르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

39.제자들에게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40.떼로 백 명씩 또는 오십 명씩 앉은지라

41.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시매

42.다 배불리 먹고

43.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44.떡을 먹은 남자는 오천 명이었더라제공: 대한성서공회

세상을 향한 주님의 마음(마가복음 6:30-44/2019.3.10.오전)


1. 건축가 유현준씨가 쓴,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라는 책에 보면, 지난 50년 동안 미국 중산층 가정의 주택의 크기는 두 배 가까이 커졌다고 합니다.
그 사이에 사람의 몸이 두 배로 커진 것도 아니고, 오히려 가족 구성원의 숫자가 줄었음에도 불구하고 집은 계속 커져야만 하는지, 그기에 대한 대답은 이렇습니다.
집 안에는 계속해서 여러 가지의 물건으로 채워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의 많은 물건을 소유해야 행복해지는 줄 생각하고, 그래서 좁은 집 안에 많은 물건으로 채워야 했고, 그러다 보니 점점 주택의 평수는 넓어지고 넓어진 만큼 더 많은 물건으로 채우고, 이런 것을 장만하기 위해서 더 많이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이런 상황을 가리켜 인간의 삶과 자연을 수탈하는 악순환이라고 표현하면서, 이대로 간다면 우리 자녀들의 삶을 더 힘들어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결국에는 만족을 모르는 탐욕이 개인의 삶과 사회적 환경을 파괴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가 얼마만큼 더 많은 것으로 우리의 삶을 채워야 만족할 수 있으며, 남들보다 얼마만큼 더 소유해야 행복해 질 수 있겠습니까?
제가 일본에 처음 왔을 때에는 슈퍼에서 물건을 사고 바깥 자전거에 물건을 실어 놓아도 가져가는 사람이 없었고, 잃어버린 물건은 며칠 지나서도 그 자리에 가면 누군가가 눈에 띄기 쉬운 안전한 장소에 올려놓기도 했습니다.
물론 일본이라고 옛날에는 끔찍하고 무서운 사건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도시의 생활도 일반적으로 평온하고 안심감을 가질 수 있는 그런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하루가 멀게 끔찍한 사건들이 일어나고, 내 소유의 물건이라도 한눈을 팔고 있으면 어디로 사라지는지 모를 그런 상황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2.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고 더 나은 삶의 질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귀하고 당연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잘못된 방법이나 지나친 탐욕을 통해 추구되어진다면, 그것은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빼앗고 질서를 파괴하는 범죄가 되며, 마침내 그런 행위는 자신에게도 파멸을 가져 오기 마련입니다.
성경은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환경이나 어떤 조건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한"(막7:21-23) 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마음의 상태는 매우 불안정한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의 마음이 어떤 상태에 있으며, 또 어떤 방향으로 폭주할지도 알 수 없습니다.
인간은 죄 가운데서 출생하였기 때문에 보고 경험하는 것이 전부 죄 뿐이며, 그래서 매일 죄를 먹고 마시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에는 온갖 악하고 더러운 것으로 오염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루를 살면서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집안의 식구이던지 이웃이든지 직장의 동료이든지, 그들을 대하는 우리의 말과 행동이 곧 우리 안에 있는 마음을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사도바울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빌2:5)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한 생명을 귀하게 여기시는 예수님이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고 계시며, 또한 그들을 위해 무엇을 행하셨는지 살펴보면서, 우리도 믿음 안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고, 예수님의 심정으로 사람들을 만나면서 주님이 이 땅에서 우리를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그 뜻을 이루어가는 복되고 아름다운 사람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3. 본문의 내용은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많은 사역으로 인하여 피곤하고 지쳐 있는 상태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거나, 혹은 병든 육신을 치료하거나, 또는 무엇인가를 얻기를 원해서 몰려들고 있는 상황입니다.
오래 전에 큰 인기를 얻었던 전광열씨가 열연한 드라마 「허준」 은 일본에서도 대단했습니다.
벌써 2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마는,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올라 가는 도중에 한 두 사람을 치료했더니 끝도 없이 밀려오는 환자들로 인해 결국 한양에 올라가지도 못하고, 계속된 진료로 인해 본인도 지쳐 쓰러지는 모습이 있었습니다.
이 드라마에서도 보여주고 있는 핵심은 병자를 향한 허준의 마음이었습니다.
병이 들고 몸과 마음이 다 망가져도 그 몸을 의탁할 의원이나 약도 구할 수 없는 불쌍한 사람들에 대한 그의 마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보신 것이 무엇입니까?
34절에 보니,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 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사람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신 것은, 그들이 가난하거나 병들었거나 의지할 곳이 없는 힘이 없는 것을 보시기도 하였지만, 예수님이 주목하신 것은 남다른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이 목자가 없는 양 같았다는 것입니다.

4. 소나 말 같은 가축들은 크고 강하기 때문에 저들끼리 풀을 뜯거나 쉬기도 하지만, 양의 경우는 목자가 없으면 안 되는 것은, 제 스스로를 지킬 만한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양에 대하여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다윗입니다.
어려서부터 양치기 소년으로 살았는데, 그의 주된 임무는 푸른 초장과 맑은 물 있는 곳으로 인도하여 양들을 먹이는 것과, 맹수들로부터 그들의 생명을 지키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자나 곰을 만나도 두려워하지 않고 싸워 그들을 이겼습니다(삼상17:34-35).
이것은 목자가 양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는, 혹은 아들로서 아버지께 속한 생명이나 재산을 지키려고 하는 사명감이 없이는 할 수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다윗은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비록 양을 치는 목동이었지만 생명을 걸로 지켰고,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가운데는 자기 백성들을 돌보고 지킬 만한 그런 목자가 없었습니다.
물론 왕을 비롯한 정치가들이나 제사장을 비롯한 많은 종교지도자들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백성들의 생명과 영혼을 돌보는 그런 지도자들이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그 당시에도 많은 목자들이 있었지만 그러나 그들은 참 목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누구의 보호나 인도함을 받지 못하는 육신적으로는 궁핍하였고 영적으로는 병든 상태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향해 떼를 지어 몰려들고 있는 이 사람들을 보시고 마치 목자 없는 양들 같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 당시의 정치 지도자들과 종교지도자들의 공통점은, 그들에게 지식은 있어도 자비는 없었으며, 그들에게 능력은 있어도 사랑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는 오늘 우리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똑똑하고 유능한 지도자들도 많고 경험이 풍부한 리더들도 많지만, 이들에게는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나 연민이나 동정심이나, 그들을 돌본다는 개념이 부족한 것입니다.

5. 본문을 보면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 자신도 매우 피곤한 상태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몰려드는 사람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고, 그들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첫째로 34절 끝에 보니,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셨" 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길 때, 무엇을 제일 먼저 보고 불쌍하다고 생각합니까?
제일 많은 경우는 경제적인 궁핍을 보고 불쌍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헐벗고 굶주린 것뿐만 아니라 병들어 육신이 망가진 것을 볼 때 그런 감정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그것은 우리와 같은 인성을 가지고 계시는 예수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제일 먼저 주목하신 것은 영적인 궁핍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들을 보시자마자 목자 없는 양과 같다고 표현 하신 것은, 그들의 육신 보다는 영적인 돌봄과 인도를 받지 못한 상태의 심각함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여러 가지로 가르치셨다고 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가르침, 즉 영적인 공급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누가는 9장11절에서 같은 사건을 놓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셨" 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6.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인생관이나 가치관은 각각 다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육신의 편안함을 인생이 추구하는 최고의 선이라 생각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가난해도 명예나 자기가 속한 어떤 공동체의 이념이나 가치관을 제일로 추구하며,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가족이나 이성에 대한 사랑을 지키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군인들도 나라와 민족을 위해 자기 생명을 바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돈이나 남다른 성공이 인생의 가치를 말해준다고 생각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것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생명을 걸고 그것을 지키려고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눅19장10절에,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고 하였고, 마18장14절에, "이와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고 하셨으니, 예수님의 목적은 한 영혼이라도 더 많은 영생을 구원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기독교는 영적인 양식과 육신의 양식을 회복시켜줍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를 충족시킬 때, 예수님은 항상 영적인 양식을 우선하셨습니다.
이유는 우리의 주린 심령을 여호와의 말씀으로 먼저 채울 때 위로부터 내리는 새 힘을 얻을 수 있으며, 말씀되신 주께서 내 안에 임하시면 생각이 먼저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먹고 배부르면 누구든지 그것으로 안심하고 만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게을러지고 집중력이 떨어지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주린 심령의 배를 말씀으로 채우고, 갈한 영혼에 말씀의 생수를 부울 때 변화가 일어나고 전인격적으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7. 둘째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심으로, 그들의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행간을 읽을 수 있습니다.
35절의 내용을 유추해 보면, 예수님이 시간 가는 줄 모르시고 계속 가르치다 보니, 이제는 해가 서산으로 기울기 시작하였고,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시장기를 느낀 것 같습니다.
이제나 저제나 끝나기를 기다리던 제자들이 지친 나머지 그들이 먼저 예수님에게 제안을 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렇다면 너희가 먹을 것을 주면 될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제자들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빈들이기 때문이고, 날이 저물기 시작했고,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이백 데나리온의 돈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상황을 보면 제자들의 말에 틀린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도리어 예수님이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이 말은 조금 지나친 요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과연 그들이 무슨 수로 남자 장정만 세어서 5천이나 되는 이 많은 군중들의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보아도 지나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는데, 여러분 같으면 이런 환경과 조건 속에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8. 본문 속에서 예수님이 보신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군중들의 영적, 육신적인 빈곤상태를 보신 것입니다.
둘째는 이런 군중들의 문제를 다루는 제자들의 반응을 보신 것입니다.
처음부터 이런 문제는 우리도 마찬가지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기껏 생각해 낸 것이 그들 스스로가 동네로 흩어져 가서 사먹는 것이었습니다.
군중 한 사람 한 사람이 스스로 해결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기대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을 의지하여 그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지만, 그들은 그것을 행할 능력이 도무지 없었습니다.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도 무슨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먼저 돈 문제로 걱정을 합니다.
교회 일을 하면서도 돈 걱정부터 하고, 환경과 조건을 탓하면서 결국 아무것도 못합니다.
분명히 우리 앞에는 그런 문제들이 항상 앞을 가로 막고 있으며 우리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고 했습니다.나는 무능하지만 주님은 불가능이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누구에게 능력을 주시고 어떤 사람을 사용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9. 최근 묵상한 말씀 중에 히4장15절의,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라는 말씀 중에 「동정하다」 라는 이 단어가 동정심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동정받을 대상을 위해 언제든지 도울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는 상태를 포함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실 때에는, 이미 예수님은 제자들을 포함한 이 모든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가지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제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간단합니다.
우리는 할 수 없으니 예수님이 도와주세요,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생각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런 상황에서 제자들이 주님만 의지하기를 원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38절에 보니,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고 하신 것입니다.
세상을 향한 주님의 마음은 무엇입니까?
그들이 스스로의 무능함과 연약함과 가련함을 깨닫고, 주님을 찾고, 주님을 의지하며, 주님으로 인한 충만을 얻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 결과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에 불과했지만, 오천 명이 먹고 열 두 광주리가 남을 정도로 풍성함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우리 스스로는 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와서 나의 연약함을 고백하고 그 분의 도움을 구하고, 그를 의지할 때, 불신앙도 물러가고 가난도 질병도 물러가고 복되고 풍성하고 감사가 넘치는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임하는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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