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3.두려워하지 말라(마가복음4:33-41)

[성경본문] 마가복음4:33-41개역개정

33.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그들이 알아 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되

34.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

35.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36.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37.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38.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39.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40.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41.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제공: 대한성서공회

두려워하지 말라(마가복음4:33-41/2019.1.13.오전)

1. 12세기, 몽골이 중국을 침략하면서 2천 년 이상 내려온 중국의 모든 문화를 파괴하려고 했습니다.정복자 징기스칸이 보는 중국은, 말을 사육할만한 목초지도 제대로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차라리 중국인들을 다 죽이고 그 땅에서 풀이 자라나게 하는 것이 훨씬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을 위기에서 구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엘루 추사이라는 사람으로 그는 중국인도 아니고 왕이나 장군이나 병사도 아닌 일반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중국의 문화를 높이 평가하며 보존할만한 가치 있는 문화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징기스칸의 측근이 되고 난 후에, 중국을 파괴하여 없애는 것 보다는 그들에게서 세금을 거두는 것이 좋겠다고 설득함으로 중국을 위기에서 구했다고 합니다.
한 번은 오랜 시간이 걸려 개봉을 점령한 후에는 분노한 징기스칸이 그곳 주민을 전부 말살하기로 했지만, 엘루 추사이는 말하기를, 중국 최고의 장인과 기술자들이 이곳 개봉에 다 모여 있기 때문에 그들을 죽이는 것 보다는 이용하는 것이 훨씬 낫다고 하였고, 덕분에 개봉 사람들은 까까스로 위기를 모면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징기스칸이 자신에게 저항하는 세력에게는 절대로 자비를 베푼 적이 없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야만적인 징기스칸의 자비가 아니라, 그의 심리를 너무 잘 알고 있는 추사이의 지혜 덕분이었습니다.
그가 징기스칸을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탐욕스러운 마음을 이용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익을 따라 움직이고 자신의 욕구가 충족이 된다고 생각하면 상대방의 요구를 뿌리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손자병법에도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말입니다.
일상생활에서도 모르면 어렵고 지치고 싫지만, 알고 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2.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갈릴리 호수의 건너편으로 배를 타고 가시다가 갑자기 만난 풍랑으로 인해 위기를 만나는 장면입니다.
일본 최대의 면적과 담수능력을 자랑하는 비와꼬(琵琶湖) 호수가 약 670 평방 킬로에 비하면, 갈릴리 호수는 166평방 킬로임으로, 1/4 정도로 규모가 작습니다.
그러나 비와꼬는 해면 보다 84미터 정도 낮지만, 갈릴리 호수는 지중해 수면보다 무려 213미터나 낮기 때문에 헬몬산의 차가운 공기와 갈릴리의 따뜻한 공기가 만나면서 급격한 기류 변화로 큰 풍랑이 일어나기 때문에 경력이 풍부한 어부라도 기후변화를 예측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갈릴리에서 평생 어부로 살았던 제자들과 예수님이 타신 배도 예외가 없이 풍랑으로 인하여 사경을 헤매게 되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배 안에까지 물이 가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위기를 만난 상황은 예수님이 타고 계신 배만이 아니라, 36절을 보면, 다른 배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계속해서 37절을 보면, "물결이 배에 부딪혀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 다고 했습니다.
항해 하는 배에 물이 들어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제자들이 주무시고 계시는 예수님을 깨우면서 하는 말이, 우리가 죽게 되었다고 했는데, 이 말의 의미는 모든 것이 파괴되고 끝장이 났다는 뜻입니다.
침몰과 사경을 헤메는 사투가 시작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살다보면 이런 위기를 몇 번 만나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위기는 개인만이 아니라 국가, 회사, 어떤 단체며 교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3. 이런 상황 앞에서의 늘 인간의 모습은 연약함 그 자체입니다.
갈릴리 호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어부 출신의 제자들도 두려움과 공포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수단으로서 주무시고 계시는 예수님을 깨운 것입니다.
그런데 38절에서 제자들의 말투를 보면 우리가 죽게 된 상황에 까지 이르게 되었는데 어찌하여 당신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주무시고 계시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잠에서 깨어나신 예수님의 반응은 의외였습니다.
바람을 꾸짖어 바다를 잔잔하게 만드신 것은 예수님의 능력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후에 40절에 보면,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고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을 엄하게 책망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바다를 무서워하는 사람은 배를 탈 수 없습니다.
갈릴리 호수의 건너편으로 돌아가려면 멀고 험한 길을 돌아가야 합니다.
자연에 대한 두려움이나, 인간의 연약함으로 인한 여러 가지의 상황에서 겪는 두려움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바람과 파도를 헤쳐 나가려는 제자들의 수고와 용기는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두려움에 빠진 제자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아마 제자 중에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신성한 능력이 그 안에 계시니 무엇이 두렵겠느냐고, 바람과 바다도 한 마디의 말씀으로 잠잠케 하시는 그런 분이시니 무슨 문제가 있겠느냐고, 그러나 우리는 연약한 인간이니 당연한 것 아니겠느냐고.

4.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두려움에 빠진 제자들이 문제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신성의 위대한 능력을 소유하신 분과 함께 동행 하면서도, 바람 때문에 일어나는 파도로 인하여 우리가 죽게 되었다고 공포에 빠져 절망적이고 소망 없는 말을 뱉어내는 제자들이 문제였습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분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줄 믿는다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처음에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는 말씀입니다.
저녁 어두움이 찾아오기 시작할 때, 처음부터 예수님이 배타고 건너편으로 가기를 원하셨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바다는 원래 사람에게 두려움을 주는 장소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목적을 가지고 항해를 하려면 위험을 각오해야 합니다.
이스라엘도 가나안을 향해 출애굽 할 때, 가로막힌 홍해를 열고 길 없는 사막과 광야를 지나가야 했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아말렉과 무수한 대적들의 칼날을 각오하지 않고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는 길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의 땅이 이스라엘을 향해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곳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이스라엘이 걸었던 신앙의 여정이었고, 또한 오늘 우리가 나아가야 할 믿음의 길입니다. 이스라엘이 40년의 광야 세월을 통과하지 않고는 그들이 축복의 땅 가나안의 주인공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5. 이스라엘의 역사는 고난의 역사였습니다.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이 예비하신 축복을 받을 만한 그릇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일류 요리사가 되면 손님의 입맛을 맞추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일류 요리사가 될 때까지의 나아가는 과정은 많은 난관과 좌절과 장애물을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겉으로 볼 때, 세상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제일 편한 인생이 어떤 사람입니까?
움직일 수 없는 누워있는 환자입니다.
그들은 자기가 할 일을 사람들이 대신해서 다 해줍니다.
심지어 대소변을 다 받아주고, 먹을 것, 입을 것,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항상 누군가가 곁에서 돌봐주며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줍니다.
그렇다면 이 환자가 행복하고 성공한 인생이고 편안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중증환자요 안타깝게도 병마에 사로잡혀 쓰러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누워있는 환자처럼 하나부터 열까지 주위 사람들이 다 책임져 주는 그런 인생을 살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도리어 나보다 더 연약한 사람을 도와주고,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세워주며, 낙심하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들의 위로가 되고 힘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되려면 두려움의 바다를 건너가야 합니다.
건너가면서 예기치 못한 풍랑을 만나고, 인간의 힘과 지혜로는 감당할 수 없는 위기 상황 가운데 빠져 보기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6. 시66:12절에 보면, "사람들이 우리 머리를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물과 불을 통과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말로 표현하기도 어려운 비천함과 고난과 죽음의 골짜기에 떨어져서 마치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은 민족처럼 그런 고난의 길을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경험하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광야에서 단련 받고 많은 민족들의 멸시를 받으면서 걸어 나가는 그 과정을 통하여 그들이 새로워지고 강해지고, 하나님 중심의 믿음의 사람들로 세워지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축복의 가나안 땅의 손님이 아니라 그 땅의 주인공이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자고 하신 것은 어떤 의미에서 과거 모세와 함께 했던 이스라엘의 출애굽 과정의 재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라 지구 반대편까지 갈 수 있는 것은, 과학의 힘 이전에 우리의 믿음입니다.
이 세상은 서로 간의 신뢰와 합리적인 이성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사회생활을 안전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동차도 선박도 살고 있는 집조차 우리에게 믿음이 있을 때 안심이 되고, 우리에게 믿음이 있을 때 위로가 되고, 우리에게 믿음이 있을 때 없던 힘도 솟아나는 것입니다.
비행기의 안전성과 기장의 능력을 신뢰하기 때문에 아무 염려 없이 원하는 목적지에 갈 수 있듯이, 나와 함께 동행하고 계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나와 어떤 관계를 가지고 계시는 분인지 알고 있다면, 그 어떤 풍랑으로 인하여 배가 뒤집히고 깨어질 것 같은 상황에라도 두려워하거나 염려하지 않을 것입니다.

7. 인생을 살면서 내 뜻대로 되지 않고, 그래서 너무 심각한 위기를 만나고, 감당할 수 없는 풍랑이 불어올 때, 두려워하고 염려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일입니다.
문제는 두려움과 염려로 무너지는 그런 인생이 아니라, 우리와 동행하시는 주님을 기억하고 그 분의 도움의 손길을 구하는 것입니다.
요14:1에 보면 두려움과 근심에 빠져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고 하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두려워하고 염려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물질입니까? 건강입니까? 가정이나 자녀 문제입니까? 회사나 사업입니까? 미래문제입니까?
이런 것은 혼자서 감당하고 해결하려고 하면 정말 그것은 우리에게 두려움이 되고 시간이 갈수록 더 큰 고통이 될 것입니다.
세상은 살면 살수록 우리에게 두려움을 가져다주지만, 우리와 동행하시는 주님을 의지하고 그 분을 알고 나면 우리에게서 두려움은 사라지고, 염려와 근심은 물러갈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것 자체가 축복이고 능력이지만, 또한 훈련의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저 편으로 건너가자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를 의지하고 나아갈 때, 지금까지 우리를 괴롭히던 모든 두려움과 고통은 물러가고, 세상은 우리로 인하여 변화됨으로 우리는 2019년 한 해를 통해 축복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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