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9.3.이스라엘에 대한 회상(호세아9:10-17)
[성경본문] 호세아9:10-17개역개정
10.옛적에 내가 이스라엘을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 같이 하였으며 너희 조상들을 보기를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
11.에브라임의 영광이 새 같이 날아 가리니 해산하는 것이나 아이 배는 것이나 임신하는 것이 없으리라
12.혹 그들이 자식을 기를지라도 내가 그 자식을 없이하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그들을 떠나는 때에는 그들에게 화가 미치리로다
13.내가 보건대 에브라임은 아름다운 곳에 심긴 두로와 같으나 그 자식들을 살인하는 자에게로 끌어내리로다
14.여호와여 그들에게 주소서 무엇을 주시려 하나이까 아이 배지 못하는 태와 젖 없는 유방을 주시옵소서
15.그들의 모든 악이 길갈에 있으므로 내가 거기에서 그들을 미워하였노라 그들의 행위가 악하므로 내 집에서 그들을 쫓아내고 다시는 사랑하지 아니하리라 그들의 지도자들은 다 반역한 자니라
16.에브라임은 매를 맞아 그 뿌리가 말라 열매를 맺지 못하나니 비록 아이를 낳을지라도 내가 그 사랑하는 태의 열매를 죽이리라
17.그들이 듣지 아니하므로 내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시리니 그들이 여러 나라 가운데에 떠도는 자가 되리라제공: 대한성서공회
이스라엘에 대한 회상(호세아9:10-17/2017.9.3.오전)
1. 사람들은 지나간 세월을 반추하면서 옛날이야기 하기를 좋아합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을 키우면서 고생했던 일이나 남자들은 군대 가서 경험했던 일이나, 사업을 처음 시작했을 때의 어려웠던 것들을 세월 속에 차곡차곡 쌓아 두었던 것들을 이야기하기 좋아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과거를 반추하는 습관은 사람들만의 습관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분은 출애굽 이후에 광야에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셨던 40년 동안의 세월을 그리워하고 그 때가 참 좋았다는 식으로 말씀하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부모들이 자식을 낳고 양육하면서 그 아이들이 말을 배우기 시작하고 어렵게 첫 걸음을 떼거나 무의식중에 가진 행동에도 감격하고 굉장한 의미를 부여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너무 어려서 아직은 대소변도 못 가리고 말귀도 알아듣지 못하며, 24시간 부모에게 긴장감을 주고 힘들게 하는 그런 존재로서, 일반 사회의 인간관계에서 생각해 본다면 부모와 자식 간에는 매우 불편한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자식에 대한 관심이나 애정을 멈추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부모 자식이라는 그 관계가 생명을 주고받을 만한 사랑으로 맺어졌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의 광야 40년도 그랬습니다.
그 때 이스라엘의 역사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과 원망과 반항과 우상숭배로 얼룩진 그런 세월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세월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갓난아이처럼 품으셨고 언약의 백성으로, 거룩한 자녀로 키우신 것을 스스로 기뻐하셨습니다.
그 사실이 본문 10절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회개할 줄 모르고 하나님 품으로 돌아올 줄 모르는 그것 때문에 이스라엘이 심판 받고 망하게 된 그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잊지 못하시고, 그들의 형편을 애석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연약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2. 이러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본문 10절에 무엇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까?
"옛적에 내가 이스라엘을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 같이 하였으며, 너희 조상들을 보기를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 같이 하였" 다고 했습니다.
광야에서는 가끔 싯딤 나무나 선인장 같은 것은 만날 수 있어도 포도나무와 그 열매를 본다는 것은 불가능한 사실입니다.
광야는 물 한 방울조차도 구하기 어려운 건조한 지대로 모래 위에서의 농사나 식목은 불가능한 곳입니다. 그런 광야에서 포도나무를 만난다는 것은 한마디로 기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마치 건조한 사막에서 만난 포도처럼 이스라엘을 매우 귀하고 신기한 존재로 여겼던 것입니다.
마치 결혼해서 첫 출산을 경험하는 그런 부부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기뻐하셨습니다.
데이비드 알렌 하버드(David Allan Hubbard)는 이 상황을 표현하기를 이 때의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를 밀월시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광야 40년의 세월을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신혼여행 기간처럼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특히 무화과의 열매는 제대로 된 열매를 맺기까지는 5-6년의 세월이 소요된다고 합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정성으로 가꾸며 열매를 기다렸다가 만나는 첫 열매는, 농부에게 얼마나 기쁨이 되고 감격이 되는지는 누구나가 잘 알 수 있는 그런 상황입니다.
하나님은 그 때의 이스라엘을 무화과나무의 첫 열매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만큼 여호와 하나님에게는 기쁘고 소중하고 감격스러운 세월이었습니다.
3. 제가 하나님을 묵상하면서 느끼는 특별한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말씀을 묵상하면 할수록 누구나 시인이 될 수 있으며,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든지 문학도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를 향한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 세상으로서는 받아들일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 연약한 인생을 홀로 버려두지 않으시는 성령님의 역사하심과 믿음의 선배들의 활동 하나 하나가 다 아름다운 노래가 되고 음악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그 분을 향한 사랑과 변함이 없는 신뢰가 내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연애를 하면 남녀노소 누구나 시인이 되고, 그 사랑의 여정이 순탄치 못하거나 시간이 길어질수록 누구나 소설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굉장히 소중하게 보셨습니다.
이유는 광야라는 환경과 조건이 이스라엘로부터 단 한 순간이라도 눈을 뗄 수 없는 그런 상황이었고, 또한 이스라엘 역시 갓 난 어린아이처럼 매우 연약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도 내가 원하지 않는 어려움을 겪고,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환경에 둘러싸여 있을 때에 나와 동행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뿐만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광야의 시대는 있었고 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광야 시대는 언제입니까?
내가 병들었을 때, 사업에 실패했을 때, 가정이 파탄으로 치달을 때, 버림받았을 때, 인생의 무거운 짐을 감당할 수 없어 무너져 내릴 때, 그런 위기 가운데 우리가 홀로 서 있을 때, 바로 그 때가 우리의 광야시대입니다.
4. 광야는 육체를 가진 생명체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주는 곳입니다.
언제 어떤 상황에 빠질지 모르는 그것이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고 두렵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런 상황이 도리어 하나님의 임재와 도우심을 확실하게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위기가 기회라는 말이 있습니다.
포도나무도 마찬가지로 나무라는 존재는 물이 없으면 말라 죽습니다.
그러므로 나무에게는 물이 생명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나무에게 아무리 물이 소중하고 그것이 없으면 죽는다고 하여도, 나무가 물 가운데 서 있으면 얼마 못가서 썩어 죽게 됩니다.
이것은 나무와 물과의 상관관계입니다.
나무는 물이 없으면 살수 없지만 물이 너무 많아도 살 수 없습니다.
도리어 물이 부족한 지역의 나무들이 태풍에 강한 것은, 물을 구하기 위해 더 깊이 너 넓게 뿌리를 내리기 때문에 웬만한 바람이나 힘에 의해서는 넘어지거나 뽑히지 않습니다.
땅속으로 내린 그 뿌리를 통해 끝없이 물과 영양을 흡수하기 때문에 그래서 생명력이 더욱 강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너무 가난하다고 돈이 없다고 신세를 한탄합니다.
어떤 사람은 질병 때문에, 또 어떤 사람은 남들과 비교하면서 자신의 가진 환경이나 조건 때문에 낙심하고 원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남이 가지지 못하는 강인함과 인내와 고난을 통하여 많은 지혜를 얻도록 하십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살아 보면 성공했다고 하는 사람이나 그렇지 못하다고 하는 사람이나 다 거기서 거기, 즉 오십보 백보입니다.
5.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와서 본 것이 무엇입니까?
사방의 모든 나라에는 왕이 있는데 이스라엘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에게는 불만이었고, 스스로 보기에 뭔가 세련되지 못하고 불편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왕을 구했고, 하나님은 내가 너희의 왕인데 무슨 걱정이 있느냐고 했지만 이스라엘의 고집을 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왕정제도를 허락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이스라엘은 이것 때문에 더 많은 고통과 무거운 짐을 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자업자득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조그만 힘만 있으면 본능적으로 자기의 왕국을 세우려고 합니다.
이것은 정권 잡은 자는 물론이고 사업하는 사람이나 상아탑의 학자들도 마찬가지고, 심지어 목회하는 목사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목회를 빙자해서, 선교를 빙자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자기의 왕국을 세우려고 합니다.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다 보니, 세상 사람들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은 너무 불공평하고 나야말로 그 불공평의 대표적인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원망하고 비판하고 격렬하게 저항하면서 너무 많은 것들을 부정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실상은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잠16:4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 다고 하면서, 심지어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 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우주만물의 모든 것이 하나님이 원래 의도하신대로 알맞게 지으셨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목적을 성취하도록 그 가치와 효능과 기능을 완벽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6. 그러므로 내 인생과 모든 원하는 것을 하나님의 뜻에 맞출 때 우리는 원래 하나님이 계획하신대로 완벽하고 가장 아름다운 존재로서의 가치가 드러나지만,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의 계획과 선하신 뜻을 전연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가치관과 시선에서 판단한다면, 우리 인생은 그야말로 가장 보잘것없는 불쌍한 존재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기울어진 가구를 교정해서 바로 세우는데 얇은 판자를 그 밑에 끼워 넣지 않고 전연 상관이 없는 본드를 그곳에 바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럴 경우에는 아무리 비싼 돈을 주고 산 본드라고 하여도, 이 본드의 가치는 여기 저기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판자 조각보다 가치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도리어 가구를 바로 세우는데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이스라엘의 생각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손길로 애급에서의 구원을 체험하였고, 40년 광야 생활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훈련되어졌고, 그들을 위해서 예비해신 약속의 땅 가나안을 주셨지만, 그것을 하나님의 도우심이나 은혜로 생각할 줄 몰랐습니다.
모든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고, 도리어 가나안 지경의 여러 족속들의 생각과 삶을 닮아가도 보니 이 모든 것이 바알이나 아세라 우상의 도움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가치도 없는 죽은 우상에게 몸도 마치고 재물도 바쳤는데, 나중에는 그 정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나머지 그들이 행한 것이 무엇입니까?
7. 오늘 본문을 보면 마침내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자녀들에 대한 저주를 선언합니다.
본문 11-14절을 아무런 배경에 대한 설명이 없이 읽다보면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가 지나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로 달려가면서 이미 그들은 선민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자신들의 육체를 음란하게 우상의 제물로 드리다가, 이것도 정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가증하고도 충격적인 행동을 시작했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마침내 제 자녀를 몰렉의 제물로 산 채로 불에 태워 바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가증한 행위에 대하여 엄벌하시는 것이 바로 11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가정을 주시고 자녀를 주시며 축복하시는 이유는, 가정이 하나님을 바로 섬김으로 지상의 낙원, 즉 천국의 그림자가 되도록 하셨고, 계속해서 자녀들을 통해서 하나님 중심의 거룩한 제단이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가정에 대한 축복과 자녀에 대한 말씀 교육이 많이 나오는 것입니다.
즉 의인의 가정에서 의인의 자녀를 낳아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가정이 존재하는 목적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런 축복의 가정을 마귀의 소굴로 만들었고, 하나님의 진노의 그릇으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레18:21절에 보면, "너는 결단코 자녀를 몰렉에게 주어 불로 통과하게 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고 하셨습니다.
자녀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요 기업인데 어떻게 축복의 자녀를 우상의 제물로 불태워 죽일 수 있습니까? 그래서 내가 너희들에게 더 이상 자녀를 주지 않겠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솔로몬 시대(왕상11:7)에도 있었고, 렘32:35에 보면 이스라엘이 힌놈의 골짜기에서 여전히 이런 일들을 행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이 주신 가정과 자녀들을 소중하게 생각할 줄 모릅니다.
그래서 자녀를 말씀으로 양육하는 것을 포기하고, 부모와 자식이 함께 세상 사람들처럼 성공과 부귀를 목적으로 하는 21세기의 또 다른 우상숭배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8. 그래서 이스라엘과 오늘날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이 새롭게 행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 어떤 우상에게도 내어주지 않는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를 저주와 고통의 십자가에 대신 내어 주심으로 두 번 다시 사람들이 자기 자녀를 우상에게 내어 주지 않도록 아들을 십자가에서 희생하게 하신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원리원칙대로 한다면, 하나님 앞에 제 자녀는 물론이고 우리 자신을 제물로 내어 불에 태워도 우리가 지은 죄를 단 한 가지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자녀를 수십 명 수백 명을 낳아서 모조리 십자가에 못을 박는다 하여도 우리의 죄는 사할 수 없으며, 우리가 받은 저주를 해결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간이 하나님을 떠남으로 말미암은 온갖 죄악과 고통과 저주에서 구원하는 유일한 구원이요, 잃은 생명을 다시 찾는 유일한 방법인 줄 믿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를 향한 변함없고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녀들을 세상 사람들처럼 살게 할 수는 없습니다.
비록 직장이 변변찮고 가진 것이 없고 결혼이 안 되어도 하나님 중심으로 신앙교육을 하면 하나님이 지금부터 영원까지 책임지시고 세상 사람들이 받을 수 없는 그런 사랑, 그런 은혜로 우리 자녀들을 축복해 주시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말하기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요1:12) 다고 하였으니, 이 권세는 이스라엘이 받은 저주와 심판을 면하게 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이요, 우상숭배로 말미암아 약속의 땅을 빼앗기며 열방에 흩어짐을 면하게 하는 믿음의 능력인 줄 믿습니다.
9. 전도자를 통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 감격할 때가 언제였습니까?
그 날과 그 첫 사랑을 회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혹시 나는 잊어버리고 내 기억 속에 사라졌는지는 몰라도, 주님은 그 때 우리와 나눈 첫 사랑을 기억하고 계시면서 그 때를 그리워하고 계십니다.
고통스럽고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로 말미암아 우리가 흔들릴 때,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 이외에는 세상에 소망이 없는 줄 깨닫고 오직 주님만 의지하고 그 분의 내민 손을 잡고 일어서던 그 때를 기억하면서 함께 그 때로 돌아가기를 원합니다.
오늘 우리를 이 은혜의 자리로 불러 주신 이것도 나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의 증거인 줄 믿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