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9.17.두려워하는 마음(호세아10:1-8)

[성경본문] 호세아10:1-8개역개정

1.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라 그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을 많게 하며 그 땅이 번영할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하도다

2.그들이 두 마음을 품었으니 이제 벌을 받을 것이라 하나님이 그 제단을 쳐서 깨뜨리시며 그 주상을 허시리라

3.그들이 이제 이르기를 우리가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므로 우리에게 왕이 없거니와 왕이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리요 하리로다

4.그들이 헛된 말을 내며 거짓 맹세로 언약을 세우니 그 재판이 밭이랑에 돋는 독초 같으리로다

5.사마리아 주민이 벧아웬의 송아지로 말미암아 두려워할 것이라 그 백성이 슬퍼하며 그것을 기뻐하던 제사장들도 슬퍼하리니 이는 그의 영광이 떠나감이며

6.그 송아지는 앗수르로 옮겨다가 예물로 야렙 왕에게 드리리니 에브라임은 수치를 받을 것이요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계책을 부끄러워할 것이며

7.사마리아 왕은 물 위에 있는 거품 같이 멸망할 것이며

8.이스라엘의 죄 곧 아웬의 산당은 파괴되어 가시와 찔레가 그 제단 위에 날 것이니 그 때에 그들이 산더러 우리를 가리라 할 것이요 작은 산더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리라제공: 대한성서공회

두려워하는 마음(호세아10:1-8/2017.9.17.오전)
1. 지난 8월의 월간조선에 편집장이 쓴 글을 보면 중국 청나라 말기에 영국에서 건조한 순양함 한 척을 놓고 흥정을 하다가 결국에는 일본 소유가 되었다는 내용의 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한 척의 배를 둘러싸고 일어난 당시의 중국과 일본의 정치적 배경이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원래 이 배는 중국의 권력자 이홍장이 사기로 했지만, 원래 낭비와 사치가 극심한 서태후가 해군의 군비확장을 위해 준비했던 자금을 빼돌려 자신의 환갑을 축하하기 위해서 이화원이라는 정원에 쏟아 붓는 바람에 결국은 이 배를 일본이 사갔다는 것입니다.
이 때 일본의 메이지 천황은 스스로 근검절약하면서 이 순양함을 사들이는데 필요한 자금을 모으는데 앞장을 섰고, 관리들도 월급의 10분의 1을 내어놓으면서 일본 해군의 발전기금으로 쓰게 만들었고, 일본은 이 배를 가지고 1894년에 청나라의 북양함대를 침몰시키면서 청일전쟁에서 승리를 하였는데, 문제는 그 후에 패배한 중국이 일본에 치룬 대가는 당시의 청나라 재정수입의 3년 치에 해당하는 엄청난 배상금이었다고 합니다.
서태후가 막대한 국고를 낭비하면서 공을 들인 이화원이라는 정원은 의화단 사건으로 불에 타버린 것은 말할 것도 없으며, 반대로 일본은 패전한 중국으로부터 받은 배상금을 가지고 아시아 제1의 군사강국과 아시아 제1의 경제대국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모든 것에는 우연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성공이며 행복이라는 것도 내 인생을 내가 어떻게 꿈꾸고 설계하며 이 일을 위해 지금 내가 어떤 자세로 살아가느냐가 관건입니다.
개인이나 국가의 재앙이라는 것도 어떻게 하면 미래에 다가올 고통을 막거나 완화시킬 수 있을지 그것을 미리 준비하고 대비한다면, 그 재앙도 막아낼 길이 있을 수 있으며, 최소한으로 그 재앙을 축소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하기를 오늘을 보면 내일이 보인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북왕국 이스라엘의 230여년의 역사의 종말은 왕조와 그 백성들의 모습에서 얼마든지 처음부터 내다 볼 수 있었던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호세아 10장에 들어와서 우리의 관심을 끌고 있는 문장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않는" 다는 내용입니다.
성경에는 두려움에 대한 내용이 끝도 없이 이어질 정도로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대적이나 사람에 대한 두려움에서 시작하여 자연이나 환경에 대한 두려움, 재앙이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 지옥이나 심판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생명을 주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가져다주는 것들 중에 어떠한 것들이 있습니까?
제일 먼저 가장 많은 두려움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일 것입니다.
이것은 생명을 소유한 존재가 소멸되고 사라지는 것에 대한 공포감입니다.
둘째는 상실에 대한 두려움일 것입니다.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하여 접근을 제한 당하거나, 신체의 일부나 소유를 빼앗기고 잃어버린다거나, 소중한 자유를 박탈당하거나 어떤 권리로부터 분리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에 들어오는 이 두려움은 어디서 시작되는 것입니까?
스스로 약하다고 느끼거나 인간이 근본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그런 욕구에 대하여 만족감을 얻지 못했을 때 대부분 불안이나 두려움이나 긴장감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3. 그렇다면 반대로 사람의 마음속에서 이러한 두려움이 언제 사라지는 것입니까?
원하는 욕구가 충족될 때 두려움이 사라질 수 있습니다.
또한 내가 믿고 의지할 만한 도움을 주는 그런 존재가 나타날 때에 두려움이 사라질 것입니다.
그 외에도 제 스스로 강하다고 느낄 때 환경에 대한 두려움은 소멸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두려움을 느끼지 못할 때가 있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지나치게 무지하거나 지혜가 없어서 어리석을 때,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말처럼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을 때 사람은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청나라 말기의 중국이나 호세아서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마10:28에 보면,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자를 두려워하고,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경계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계명을 버리고 자기 마음에 원하는 대로 행하는 이스라엘이 그랬습니다.
그 증거로 본문 2절은 기록하기를 "그들이 두 마음을 품었" 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두 마음을 품었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한 편으로는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다른 한 편으로는 바알과 아세라를 자신들의 하나님으로 섬겼다는 의미입니다.

4. 하나님과 겸하여 우상을 섬기는 것은 도덕적으로 보면 한 여인이 동시에 두 남자를 남편으로 섬기는 것과 같은 행위였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까? 하나님 두려워할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를 때 이스라엘 가운데 일어난 구체적인 일들이 무엇입니까?
본문 1절에 보니 그 땅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베푸신 축복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들은 우상 섬기는 제단을 여기 저기 늘려갔으며, 그들의 환경이 아름다워지고 복을 받으면 받을수록 바알이나 아세라 여신상을 더욱 아름답게 치장하고 지성을 다해 섬겼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종교적으로 보면 혼합종교요 귀신에 사로잡힌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뻔뻔스럽게 하나님의 축복을 남용하며, 그 받은 복에 대한 영광과 감사를 전부 우상에게로 돌렸던 것입니다.
본문 1절을 세심하게 읽어보면 이스라엘이 받은 축복은 하나님이 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번성하고 잘되면 잘될수록 하나님을 배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롬2장에서 밝히기를, 사람이 무슨 일을 행하던지 그기에 대한 상당한 보응이 반드시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란과 곤고가 있으리"(9)라고 했으니,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두 마음을 품은 이스라엘이 받을 보응이었습니다.

5. 문제는 하나님을 떠나 그 마음이 어리석음에 사로잡힌 이스라엘이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내린 결단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고, 이제는 그들의 지도자, 곧 그들 스스로 원했던 왕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 찼고, 그의 말에 청종하기도 거절했습니다.
그들이 왕으로부터 구한 것이 무엇입니까?
자신들을 사방 대적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보호해 줄 것을 원했습니다.
그리고 왕들은 이스라엘을 하나로 묶는 지도력과 공평한 재판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왕들은 대부분의 경우에 개인의 이익과 영광에 집착하면서 백성들을 속이고 탄압하고 무자비하게 갈취하면서 부끄러운 줄 모르고 공의를 무참하게 짓밟았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왕의 권력이 백성들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백성들과 왕의 권력 사이에는 불신과 대립의 담을 쌓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고 사회 구석구석에 불신과 대립으로 가득 찼을 때,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무엇입니까?
6절 이하에 보니 이스라엘 가운데 무서운 심판이 임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가며, 스스로의 지혜로 말미암아 열방에 부끄러움을 당하도록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웃 강대국들과 동맹을 맺으면 그들에게 평화가 임할 줄 알았습니다.
국제적인 조약을 맺으면 그 약속들이 지켜질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도리어 그들이 믿었던 곳에 발등이 찍히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의지하고 사람들과의 조약이나 믿으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몰랐던 이스라엘을 그들에게 좋은 먹잇감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상황 앞에서 이스라엘이 당하는 고통이 본문 8절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6. 그들이 평화의 조약을 맺은 대가로 이웃 강대국에게 드린 조공은 비웃음거리가 되었고, 일말의 기대감을 가지고 믿었던 왕의 권력은 물 위에 떠다니는 거품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눈앞에 닥친 재앙에 몸서리를 치면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참으로 놀랍고 가증스러운 것은 6절에 보니 그들이 하나님으로 섬기던 송아지 우상까지 앗수르 왕에게 바치면서 그들의 호의를 바라고 있는 것이 황당함을 더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지식과 노력으로 쌓아 올린 모든 공든 탑은 완성을 보기도 전에 바벨탑처럼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 이스라엘이 마지막으로 소망을 가지고 입으로 내 뱉은 소원이 무엇입니까?
"그 때에 그들이 산더러 우리를 가리라 할 것이요 작은 산더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리라" 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만난 재앙,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하면서 자기 죄를 양식으로 삼아 먹고 마시던 사람들이 결과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 두려워할 줄 모르는 우상숭배자들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그들이 만난 이 재앙이 너무 크고 두렵고 고통스러워서 사는 것 보다 1초라도 빨리 죽는 것이 더 낫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뿐만이 아니라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님 보다 세상을 더 의지하고 하나님 보다 사람을 더 신뢰하고 우상을 더 믿고 의지한 사람들의 종말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이스라엘의 멸망의 시대를 똑같은 모습으로 재현하고 있었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눅23:30)고 하셨고, 사도요한도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향하여 동일하게 말하고 있습니다.(계6:16-17)
머리만 숨기는 꿩이라는 말 그대로 성질이 급한 꿩은 위기가 닥치면 제 머리만 숨기고는 안전하게 숨었다고 생각하는데, 어찌 우리의 죄를 산이 덮을 수 있으며, 어찌 우리가 하나님 두려워할 줄 모르고 살았던 죄악의 세월을 태산이 다 덮을 수 있겠습니까?

7. 이 시대의 문제점은 거짓말을 하고 속이고 미워하며 폭력을 일삼으면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면서도, 공의를 짓밟고 불의를 진리처럼 위장하면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야 말로 평화를 파괴하는 자들이 평화를 울부짖으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일수록 정의의 깃발로 위장하고, 후안무치한 도적들이야말로 법을 내세우고 인권을 부르짖고 있는 시대입니다.
그래도 이스라엘은 6절에 보니 "에브라임은 수치를 받을 것이요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계책을 부끄러워할 것" 이라 하였는데,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그런 부끄러움도 없습니다.
자신들이 수치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과연 하나님이 살아계시는데 어찌 이런 곳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호세아서를 읽으면서 느낄 수 있는 것은, 결국 이스라엘의 문제는 관계의 문제입니다.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었으며, 그 관계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도 모를 때에 그 관계를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함부로 다룰 때, 그 관계는 깨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들끼리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랜 세월을 통해 쌓아 올린 신뢰 관계라도 그것이 한 번 금이 가기 시작하면 회복하기기 쉽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그 관계를 방치하게 되면 사회적인 모든 관계도 함께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입었던 온갖 은총들이, 그들이 그것을 함부로 다루었을 때 언약도 은총도 축복과 영광도 다 무너지고 빼앗기고 사라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할 줄 몰랐고, 두려워할 필요로 없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8. 오늘 우리는 호세아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보다 더 세상을 사랑하고 돈을 좋아하며, 죽을 때 까지 쾌락을 즐기면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선악을 분간할 줄 모르는 무지한 인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과 우리는 다른 것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두려워 할 줄 모르는 우리에게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이 오셔서 십자가를 통해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며, 이 불쌍한 죄인을 위해 가장 소중한 것을 희생하신 그 사랑을 통해 우리에게 소망을 주셨고,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는 3년의 공생애를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된 모습인지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그 분의 순종하시는 모습, 자신을 십자가에 희생하심으로 우리에게 보여 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사도요한은 "사랑은 여기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일요4:10)다고 했습니다.
그 사랑이 지금까지 우리 안에 있는 세상으로 말미암은 온갖 두려움과 고통을 몰아내고, 이제는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또한 그 분만을 경외하며 섬기도록 하셨습니다.
이 사랑을 믿고 확신할 때 우리는 온갖 두려움에서 해방되며, 이 은혜에 감사할 때 우리의 모든 연약함과 고통은 물러가는 줄 믿습니다.
 
9. 가끔 길을 가다보면 복권 사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일본의 다까라구지(宝くじ)는 1천만 장을 1유니드로 판매하고 있는데, 여기서 1등에 당첨될 확률이 그야말로 천만분의 1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통사고로 사망할 확률이 만분의 1이라고 하니, 복권에 당첨되는 확률이 그야말로 교통사고를 만나 450번을 죽어야 당첨이 될 그런 확률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기대감을 가지고 줄을 서서 복권을 사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볼 때 마다 느끼는 것은 나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복권을 사는 사람들만큼의 믿음도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인생의 성공이나 행복은 소유나 어떤 결과가 아니라 신뢰관계입니다.
세상에서의 두려움은 약함을 의미하고 부족함을 의미하고 패배를 의미할 수 있지만,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서 오는 두려움은 정 반대의 결과를 가져옵니다.
이 두려움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며 사랑하는 마음에서만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그런 마음을 갖고 산다면, 그 두려움은 우리를 많은 죄와 세상의 유혹으로부터 우리를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이런 두려움이 없었기 때문에 심판과 고통과 멸망을 자초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그가 큰 음성으로 이르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계14:7) 고 지금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コメントを残す

メールアドレスが公開されることはありません。 が付いている欄は必須項目で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