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7.16.새로운 길(호세아5:8-15)

[성경본문] 호세아5:8-15개역개정

8.너희가 기브아에서 뿔나팔을 불며 라마에서 나팔을 불며 벧아웬에서 외치기를 베냐민아 네 뒤를 쫓는다 할지어다

9.벌하는 날에 에브라임이 황폐할 것이라 내가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반드시 있을 일을 보였노라

10.유다 지도자들은 경계표를 옮기는 자 같으니 내가 나의 진노를 그들에게 물 같이 부으리라

11.에브라임은 사람의 명령 뒤따르기를 좋아하므로 학대를 받고 재판의 압제를 받는도다

12.그러므로 내가 에브라임에게는 좀 같으며 유다 족속에게는 썩이는 것 같도다

13.에브라임이 자기의 병을 깨달으며 유다가 자기의 상처를 깨달았고 에브라임은 앗수르로 가서 야렙 왕에게 사람을 보내었으나 그가 능히 너희를 고치지 못하겠고 너희 상처를 낫게 하지 못하리라

14.내가 에브라임에게는 사자 같고 유다 족속에게는 젊은 사자 같으니 바로 내가 움켜갈지라 내가 탈취하여 갈지라도 건져낼 자가 없으리라

15.그들이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리라 그들이 고난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리라제공: 대한성서공회

새로운 길(호세아5:8-15/2017.7.16.오전)
1.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모든 것을 알고 이해하고 완전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도시생활을 하고 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사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이웃이나 친구를 만들기도 하고 동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휴대폰과 같은 것도 처음에는 사용하는 기능을 몰라도, 일단 구입하여 하나하나 배우면서 알아가게 되고 나중에는 아는 만큼 더욱 편리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과의 만남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그 사람에 대하여 아는 것이 그의 없어도, 자꾸 만나보고 대화하고 사귀면서 그 사람을 알아가다 보면 형제보다 더 친밀한 친구나 동료나 이웃도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법치사회 속에서 살면서 법에 대하여 얼마나 잘 알고 있습니까?
밥만 먹으면 법을 가지고 씨름하는 전문가들도 다 모르는 것이 법의 세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법의 보호를 받으며 법이 정한 질서나 규율 속에서 통치를 받으며 민주주의 체제 안에서 안전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사람들이 그렇게 복잡한 자동차의 메커니즘을 거의 알지 못해도, 아주 기초적인 것 몇 가지만 알아도 안심하고 운전을 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의 세계는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며 그 분이 나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에 대하여  잘 알기 때문에 이곳에 나와서 예배하고 그 분에게 기도와 찬송을 올리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성경에 대하여 박사가 되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하여도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이나 종교적 경험들은 너무 유치하고 보잘것없는 것뿐입니다.

2.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나 능력이나, 또는 천국에 대하여 우리가 알고 경험하는 것은 0.1%도 안되는 그런 수준일 뿐입니다.
그러나 신기하고 감사하게도 우리가 지식으로나 경험으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그런 하나님의 존재를 우리가 믿고 인정하고 나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일 때, 성령께서는 그 분을 우리 안에 충만하도록 채워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우리를 향하신 그 분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 분을 향한 참 사랑의 고백도 하게 되고, 하늘나라에 대한 변함없는 소망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의 호세아 선지자의 시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선지자 호세아는 우리처럼 부족한 것이 많고 연약한 존재였지만, 그 당시의 사람들과는 다르게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그 분에 대한 사랑의 열정이 있었기 때문에, 고멜 같은 부도덕한 여인을 데려다가 결혼을 하고 그 자녀들의 이름을 부르기조차 부끄러운 그런 자식을 낳고 양육하는 일에도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그는 말도 안 되는 하나님의 명령에도 순종하여 자신에게 부여된 수치스럽고 고난에 가득한 그런 삶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믿음의 조상들, 믿음의 영웅들의 모습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성과 지성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그런 세계나 그런 명령에도 그들은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한 가지,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변함없는 확신과 그 분을 향한 뜨거운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3. 아브라함의 믿음이 하나님께 인정받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무엇입니까?
백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제물로 바치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 때 이러한 아브라함의 행동을 보신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22:12)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자기 생명보다 자식의 생명보다 귀중하게 여기며 언약의 말씀을 믿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호세아서를 보면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약 2,800여년 전의 세계가 마치 오늘의 우리 시대를 보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여로보암 2세의 통치는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번영과 같은 수준이었습니다.
남왕국 유다나라와의 관계도 좋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국가의 번영은 제일 먼저 지도자들의 교만이나 방종, 타락을 불러왔습니다.
권력자들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라지 않았고, 여러 가지의 유언비어와 음모들, 그리고 강도 살인과 약탈과 같은 범죄가 심화되어 갔습니다.
그래서 여로보암 2세가 죽자 이스라엘 안에서는 20여 년 동안 피비린내 나는 쿠데타가 이어지면서 국가는 대 혼란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권세잡은 자들이 이스라엘의 진정한 통치자인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외세를 의지하여 조공을 바치며 정권을 유지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4. 나라를 망치고 하나님을 노엽게 만드는 것은 종교지도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의 부패는 하나님 부재의 인본주의적 신앙을 양산했고, 겉으로는 그럴듯한 감동을 주었지만, 그 속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결함이었습니다(4:1,6).
그래서 종교는 혼합주의, 형식주의에 빠져들었고 이런 것이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무차별적으로 타락하게 만들었습니다.
제사장들의 무식과 교만함과 부패는, 그들이 아무리 종교적인 열심을 내어도 그 열심히 도리어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들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교회가 부흥할수록 사회는 더욱 부패해지고, 신앙인들이 열심을 낼수록 세상은 더욱 혼란스러워지는 것과 일반입니다.
회개의 메시지는 사라지고, 책망은 사라지고 군중들의 잘못된 요구에 편향함으로 교회 강단은 흔들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호세아서를 읽으면서 강력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심정이 어떤 것인지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이스라엘 때문에 맛보는 하나님의 비통함입니다.
그런데 호세아는 어떻게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알게 되었습니까?
집을 나간 아내 고멜을 기다리면서 자기의 이 마음과 이 모습이, 지금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과 동일하다는 것을 느낀 것입니다.
선지자 호세아는 아내 때문에 속이 상했고, 마음이 찢어지도록 아팠으며 그녀를 기다리면서 감당하기 어려운 비통한 마음을 가지면서 문득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은 선지자 호세아에게 고멜과의 결혼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5. 그 때 이스라엘에게 내려 주신 구체적인 은혜가 무엇입니까?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 간의 분쟁입니다. 그것이 본문 8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이웃과 전쟁이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일 수 있느냐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사실을 본문 15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리라 그들이 고난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리라" 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좋은 것만 생각합니다마는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시편기자는 고백하기를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119:67) 고 하면서, 그래서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71)고 했습니다.
우리가 욥이나 에스더 등의 이야기를 자세히 말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고난이 연약한 인생에게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되며 힘이 되며, 새로운 기회가 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새롭게 만드시고 우리를 축보의 그릇으로 삼으실 때 반드시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을 가져다주시는 것은, 그 고난을 통하여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소망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6. 이런 경우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면서 인류 구원이라는 큰 역사를 이루시도록 하셨는데 그 때 그 많은 천군천사를 붙여서 보내신 것이 아니라 가난한 요셉이라는 목수의 가정에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것도 자기 집이 아닌 남의 마구간에서 태어나게 하셨고, 헤롯왕의 음모와 그 진노를 피해 애급으로 피난 가도록 만드셨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예수 그리스도의 33년의 생애 전체는 마지막까지 고난의 삶이었고 그 마지막에 지신 십자가는 고난과 저주와 부끄러움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런 아들을 통해 죄인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은 고난을 통한 축복입니다.
이것은 고난을 통한 구원이요 화해요 고난을 통해서 열리는 영원한 승리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선언하기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고 하였습니다.
애급 땅에서 자유를 얻어 출애급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고자 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단시일 만에 들어가도록 하지 않았습니다.
무려 40년간 광야에서 고난을 통해 훈련받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약속의 땅 가난안에 들어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들어가려면 싸우고 스스로 쟁취하지 않으면, 어렵게 정복하고 얻은 땅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우리의 연약함을 강하게 하시고, 우리의 어리석음을 지혜롭게 하시고,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참사랑과 큰 은혜를 체험하게 하시는 줄 믿습니다.

7. 지금 우리의 현실을 보면, 경제는 좋아지고 삶의 환경은 선진국 수준인지는 몰라도, 국민으로서 혹은 시민으로서의 의식 주순은 형편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상태는 이미 공의와 정의는 땅에 짓밟히고 거짓말쟁이 정치꾼들과 한 입에 두 말하는 사기꾼들과 소명 의식이 없이 밥벌이 하는 종교인들의 천국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런 현실 앞에 침묵하고 있지만, 선지자 호세아는 이런 현실을 보고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세상을 향해 외친 것이 무엇입니까?
범죄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었고, 회개의 부르짖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선지자의 외침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 호세아가 피를 토하듯이 외친 그것이 무엇입니까?
너희를 벌하는 날에 "내가 나의 진노를 그들에게 물 같이 부으리라"(9) 는 말씀이요, "그러므로 내가 에브라임에는 좀 같으며 유다 족속에게는 썩이는 것 같도다"(12) 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범죄로 인하여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개인과 국가가 서서히 멸망해 가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더디거나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이미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은 시작되고 있음을 선언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13절에 보면, 유다나 이스라엘이나 자신들이 병들고 상처가 난 것을 알아도 그것을 능히 고칠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고칠 수 없는 병은 경제적인 어려움을 말하는 것이고, 여기서 말하는 상처는 열방으로 인하여 당하는 국가가 받는 위협이나 위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이러한 이스라엘의 범죄는 같은 죄에 빠진 유다에게도 임하고, 그들의 받을 심판 역시 이웃나라인 유다에게도 함께 임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은 하나님을 떠나 범죄한 이스라엘에게 허락하신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8. 오늘날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흘러넘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경제적인 풍요이며, 그것은 지식과 정보의 홍수이며, 그것은 지나친 자유로 인한 방종입니다.
최근에 느끼는 것은 이 세상이 결국에는 지나친 인권 때문에 망하고 과도한 평등 때문에 망하겠구나 하는 생각입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납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을 때,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종교지도자도 백성도 통치자도 국가 전체가 이스라엘처럼 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그 공간에는 고난과 수치와 환란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상황을 두고 망했다고 말하겠지만 믿음의 눈으로 보면 이것은 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새로운 길을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어리석음과 교만은 고난을 통과하지 않고는 사라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부요하고 풍요로움을 통해 얻어지는 부패와 도덕적 타락은 고난을 통과하지 않고는 치료될 수 없는 큰 질병인 것입니다.
제사장이나 백성들에게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을 때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고난뿐이지만, 하나님은 그 고난을 통해서 자신의 백성된 이스라엘을 새롭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왜 고난이 이스라엘을 새롭게 하는 새로운 길이 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그들이 만난 고난을 통해 인생의 연약함을 깨닫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만난 그 고난을 통해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그동안 잘못된 것들이 무엇인지 돌아보도록 하시기 때문입니다.

9. 서두에서 말씀드린 여로보암 2세는 이스라엘을 그토록 영화롭게 만든 임금이었지만, 그가 죽은 후에 온 이스라엘의 긴 혼란과 고통은 무엇이며, 성경은 그의 인생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습니까?
인간적으로 보면 위대한 왕이었지만 하나님은 부패하고 타락한 우상숭배자로 평가했으며, 하나님 없는 인간의 삶이 죽음 이후에 어떤 열매로 어떻게 나타나는지 잘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에게 고난이 풀무불처럼 그들을 연단하고 새롭게 만들며, 결국에는 이스라엘을 향한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마음이며, 여호와 하나님 이외에는 구원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심으로 마침내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만나는 교회의 위기나 개인의 고난에는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사람이 병들면 누구나 그 병을 고치려고 식생활을 개선하고, 생활 습관을 바꾸고 또한 의사 선생님의 지시를 따르기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당면한 고난이나 위기는 더 이상 과거의 모습이 아닌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또한 하나님의 나라로 새롭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인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당하면 지금까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잘못 살았구나 생각하고 회개하며 자신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믿고 행동할 때, 이 고난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축복으로 향하는 새로운 길이 되는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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