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6.11.새로운 피조물(갈라디아서6:14-16)

[성경본문] 갈라디아서6:14-16개역개정

1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15.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16.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제공: 대한성서공회

새로운 피조물(갈라디아서6:14-16/2017.6.11.오전)

1. 제가 살고 있는 집이 신축 13년이 되니 여기 저기 계속해서 망가지고, 그래서 수리하고 교체하고 어떤 것은 불편한대로 그냥 참고 살고 있는데, 사람이나 물건이나 특히 기계 같은 것들은 오래 사용하다 보면 고장도 나고 폐기처분을 해야 할 때가옵니다.
암세포라는 것도 죽을 때 죽어야 할 세포가 죽지 않으면 암이 된다고 들었습니다.
어쨌든 인생도 나이를 먹으면 몸이 여기저기 아프고 고장이 나고 그래서 조금만 무리하면 온 몸에 심각한 영향을 받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자고 일어나면서도 기분 좋은 소리가 아닌 아이고! 죽겠다 하면서 일어나는데, 또 어떤 사람들은 시름시름 아프기만 해서 가족들을 피곤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왕에 아프려면 확실하게 아파서 입원이라도 하면 이 사람 저 사람 교대로 문병이라도 오고 기도도 해 주는데, 은근히 아프면 인정도 못 받고 점점 골병만 들어가는 것이 세상 사람사는 모습니다.
제가 한국 갈 때 마다 싫증나도록 듣는 소리가 있는데 경제가 어렵다, 사람 살기 힘들다는 소리를 40년 가까이 들었습니다.
그 소리가 사실이라면 도대체 40년 동안 한국은 세계 경제 10위권의 대단한 나라가 되기까지 한 번도 잘 살아본 적이 없는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요즘은 아이들 소풍 가는 것 보다 더 뻔질나게 비행기 타고 해외여행을 다니시는 분들이 많은데 결국 뭐가 문제입니까? 어디가 잘못된 것입니까?
일본 사람들이나 선진국 사람들은 남을 먼저 배려하면서 살아가는데, 한국 사람들은 자신을 먼저 배려하면서 살기 때문에 평생을 살아도 피곤하고 힘든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2. 인도의 간디가 영국 식민지 시절에 영국 물건 안 쓰기, 영국 차 안 타기 운동을 하면서, 모든 사람들이 걸어 다니자고 했습니다.
어느 할머니가 힘들게 물건을 지고 걸어가는 것을 본 영국 군인이 자기 차에 타라고 했더니, 그 할머니의 말이 내가 영국 차를 타면 우리 자손들이 또 영국 차를 타게 될 것이니 차라리 걸어가 갔다고 했습니다.
차를 타지 않고 걸어가면 얼마나 불편하고 힘이 듭니까? 그래도 그 당시에 나라와 민족이 영국에서 독립해야겠다는 그런 일념으로 살았던 사람들은 고생은 되고 힘은 들어도 행복했고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 사람들의 정서나 생각의 수준을 가지고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해야 잘 사는 것이고, 어떤 것이 행복한 인생이고 성공한 인생입니까?
그의 대부분이 생각하는 것은 돈이 많아야 잘 사는 것이고, 남들보다 우월하고 뛰어나서 사회적으로 인정받아 자랑하는 것이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전 세계를 대상으로 조사한 통계에 의하면 어떤 나라 국민들이 행복하냐 하면, 주로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더 행복하고 삶의 만족도가 높다는 결과가 있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에, 한국 사람들은 자신들의 수준 이상으로 잘 살고 있기 때문에, 이 현실이 감당이 안되기 때문에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생각을 고치고 삶을 고치지 않는 이상, 우리의 경제 수준이 아무리 올라가고, 환경이 좋아진다고 해도 행복은 찾아오지 않습니다.
최근에 사람들이 대한민국을 놓고 이게 나라냐? 면서 비아냥거렸는데, 말이 씨가 된다고 정말 나라꼴이 걱정입니다.
도무지 사람들에게서 감사가 없고 감동을 느낄 줄 모르고,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오는 것이 불평과 불만, 못살겠다는 소리뿐입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어디가 잘못되었습니까?

3. 갈라디아서의 내용은 잘못된 율법의 가르침을 반박하기 위해서 기록한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만이 구원을 얻는다는 신앙을 가진 종교개혁자들에게는 이 갈라디아서가 큰 힘이 되었고, 종교개혁자 루터에게는 큰 도전과 힘이 되었던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의 앞부분을 보아도 갈라디아 교회에 몰래 들어와서 아직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을 미혹하여 믿음을 파선시키려는 자들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편지를 써서 갈라디아 사람들이 이런 잘못된 가르침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를 하고 있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들은 소위 할례당에 속한 사람들로서, 사도바울이 가르치는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을 반대하고, 율법으로, 율법의 가르침을 지키고 행할 때 구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받은 할례나 종교적인 의식들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강조하는 핵심적인 내용이 무엇입니까?
유대인이냐 헬라인이냐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말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이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고대 변증가로 이름을 날린 아리스티테스라는 사람은 기독교인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독교인은 제 3의 인종이다. 이유는 그들이 세상에 살면서도 결코 세상에 빠지지 않았고, 마치 이방 나라를 잠시 거쳐 가는 것처럼 그들은 그렇게 살았다고 했습니다.

4.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지만 세상을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위해 기도는 하지만 세상의 것들을 욕심내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죄인들을 용서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지만, 그들을 이용하거나 그들 때문에 어떤 이익을 얻는 것을 원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용기 있게 살아가지만 세상이 주는 쾌락에 빠지지는 않습니다.
세상에는 거짓과 선동과 위선이 가득하지만 우리는 그런 세상 풍조를 따라가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무엇이 기록되어 있는지 그 말씀을 주의하여 읽어보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의 국적은 세상이 아니요 하늘나라이며, 우리의 시민권이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장차 오는 하나님 아버지의 천국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비록 고단하고 힘든 삶을 살아가도 우리에게는 다시 돌아가야 할 아버지의 집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에게는 항상 이중성이 있습니다. 두 가지의 양면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일본 사람들이 가진 혼네(本音)와 다떼마에(建前) 같은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내가 하면 로멘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에 세상에 있는 법과 질서를 지키는 시민으로서의 의무와 동시에,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는 천국 시민으로서의 법을 지키는 의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이 두 가지의 법에 최선을 다할 때 진정한 그리스도의 향기가 있고, 소망이 있고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5. 그렇다면 사람들이 이런 사실에 의문을 가질 것입니다.
한 가지의 질서를 지키기도 어려운데 어떻게 두 가지의 법을 동시에 지키며 살아갈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는 여기에 의문이 있을 수 있지만,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날 때의 모습 그대로의 자연적인 인생으로서는 도무지 두 가지의 법은커녕, 세상의 질서와 법도 다 지킬 수 없는 그런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도 아니고 이방인인 헬라인도 아닌 천국 시민이 된다면 이것은 누구라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혈통을 따라 세상에서 나오는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을 아브라함 되게 하고,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한 것은 형통이나 세상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변함없이 그 분을 신뢰함으로 된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바울의 고백대로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며,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새롭게 하심으로, 그 분이 지금 내 안에 계시고, 나는 지금 그 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없는 것들을 그 분이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을 그 분이 대신 행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상태를 가리켜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똑같은 목적을 가지고, 똑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그 분이 내 안에 오셨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세상 사람들처럼 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전에는 내 인생의 주인은 내 자신이었고, 내 삶도 내가 기획하고 디자인하면서 내 생각대로 사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고 행복하고 성공한 인생이라고 여겼지만, 그런 내 인생을 그리스도께 맡기고 그 분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게 되었으니, 이처럼 신나고 즐겁고 행복한 인생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6. 사도바울이 본문에서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내 인생에 더 이상 십자가 이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하면서, 자신은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힌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바울의 신앙고백이며 하나님 중심의 인생 선언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손에서 놓지 않고 사용하는 휴대폰은 몇 년 만 사용하면 새 것으로 업그레이드 하게 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마찬가지지만 더 좋은 것이 생기면 이전 것은 시시해지기 마련입니다.
사도바울은 제 인생의 주인으로 살 때의 인생과 예수 그리스도를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 때를 비교해 보니 비교가 안 되도록 감사하고 기쁘고 행복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빌3:8절에 보니,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겼" 다고 하였습니다.
말하기는 쉽지만 생각해 보면 사도바울이 인생을 자랑하며 가지고 있었던 것들이 얼마나 대단한 것들이었습니까?
한국에서 총리나 장관 정도의 자리에 앉으려면 청문회라는 전대미문의 난관을 돌파해야 합니다.
그곳에서 자신의 수치된 것들이 다 드러나면서 온갖 감당하기 어려운 수욕과 공격을 당하기 마련인데,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그 자리에 연연하고 있는 후보자들을 보면서 불쌍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그런 것들을 다 배설물로 여겼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면 누구나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장관 자리뿐만이 아니라 대통령 자리도 그 어떤 것도 배설물처럼 여길 수 있습니다.
  
7. 인생이란 어디에 가치를 두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과 가치, 그리고 영원까지 결정이 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것, 해서는 안되는 짓을 하면서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어제까지도 그렇게 살았지만, 오늘부터 사도바울처럼 모든 것을 내려놓으면서 도리어 감사하며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 믿고 구원받을 때 구원의 확신이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온 몸이 뜨거워지면서 열이 나거나 또는 눈물을 쏟아 졌습니까?
그럴수도 있겠지만, 저의 경우는 시간이 지나면서 아 예수 믿는 사람의 생각과 감정이나 확신이 이런 것이구나 하고 느껴졌습니다.
이전과는 달라진 제 자신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대하면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를 찾아낸 것처럼 기쁘고,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 더 이상 아무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내 가슴이 그 분으로 가득 차게 되고, 사람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능력이 내 삶에 임하게 되니 눈물이 나고 감격하고 감사가 넘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절로 십일조를 시작하고 감사며 선교며 건축 헌금을 자원해서 하게 되고, 전도나 봉사나 구역예배는 참여시켜 주는 것만으로 고맙게 생각하고 감사와 기쁨이 넘치고, 내 것을 다 쏟아 부어도 아깝지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배로 기도하자 하면 더 많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나는 내 소유가 아니라 내 안에 계시는 주님의 소유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8. 사도바울이 원래부터 위대하고 뛰어난 존재라고 인정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그는 주님의 몸된 교회와 성도들에게는 원수같이 행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우리와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한 가지 뿐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내 인생의 주인이 예수님이 아니라 나 자신을 모시고 살아가는데,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모시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란 인간의 구성체가 근본적으로 변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변할 수도 없으면 만일 그렇게 변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닙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란 내 안에 주인이 바뀌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인이 바뀌면 생각이 바뀌고 능력이나 수준이 바뀌기 때문에,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것도 감당할 수 있으며, 내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들도 인정하고 용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다른 종교처럼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부족하고 연약한 그대로, 죄인된 모습 그대로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날 위해 십자가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 은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어떤 공로나 자랑이나 능력이 아니라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내 인생과 영혼의 주인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받아들임으로 해서 이제는 변하여 새 사람이 되는 것을 원하십니다.
    "나 주의 도움 받고자 주 예수님께 빕니다
    그 구원 허락하시사 날 받아 주소서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아 주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아주소서."(214장)

9. 성경에서 말하는 새 사람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변화시킬 수도 없고 구원을 이룰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사함의 은총으로 하나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새사람이 되며, 내 안에 주인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를 이루어 가심으로 우리는 변하여 새 사람되고 축복의 사람, 영원한 영광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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