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2.3.우리의 사귐은(요한일서1:1-4)
[성경본문] 요한Ⅰ서1:1-4개역개정
1.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2.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3.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4.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제공: 대한성서공회
| 우리의 사귐은(요한일서1:1-4/2017.12.3.오전) 1. 요즘은 12월에 들어서기도 전에 벌써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물론 사업하시는 분들이 미리 분위기를 띄워서 연말의 대목을 노리는 이유도 있겠지만, 일 년 동안 일에만 메여 살던 사람들이 무언가 환상적인 분위기를 통해서 좀 더 자유롭고 풍성한 느낌을 맛보려는 그런 감성이 이런 분위기에 한 몫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비록 내 마음이 어둡고 발걸음이 무겁게 느껴져도, 일단 거리에 크리스마스 케롤이 울려 퍼지고 그리고 흰 눈이라도 내리면, 뭔가 밝고 풍성하고 따뜻한 느낌을 주는 것이 크리스마스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이미 오래 전부터 성탄절을 기점으로 4주 전부터 강림절, 혹은 대강절로 지키면서, 우리 가운데 오신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동유럽과 소아시를 중심으로 퍼져있는 동방교회(정교회)의 경우는 이 기간을 11월 중순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크리스마스의 기간이 훨씬 길어집니다. 그런데 크리스마스라고 하면 아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는 절기이고, 이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절정이요 본질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에 대하여 자타가 공인하는 사실은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인식하게 된 원인은, 크리스마스 때문이거나 성도들이 서로 사랑으로 행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그가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공생애를 통하여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이며, 그 사랑의 위대함과 아름다움과 영원함이 바로 이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2. 사실 인간은 사랑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피투성이로 이 세상에 태어난 그 때부터 지금 내가 살고 있다는 이 자체만으로도 우리는 누군가의 사랑과 은혜를 입고 있기 때문에 오늘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나누는 이 사랑은 너무 제한적이고 불완전하고 연약하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우리 자신이 연약한 질그릇이고 부족하고 유한한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부모가 병들어 고통하고 움직이지 못한다면, 아무리 마음으로 자식을 사랑한다고 하여도 그 사랑하는 자식을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또한 죽음이나 이산가족들처럼 어쩔 수 없는 환경 때문에 사랑이 깨어지고 통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감정들은 너무나 작은 것들 때문에 흔들리고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질투나 분노나 섭섭함 때문에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사랑의 감정들이 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불완전하고 제한적이고 연약한 사랑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도리어 상처를 입거나 버림을 당하거나 학대와 미움의 대상으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완전한 사랑입니다. 나 혼자만 사랑해주고 나 혼자서 독점할 수 있는 그런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나를 복되고 아름다운 존재로 만들어 주고, 그 사랑이 나를 완벽한 존재로 만들어 주는 그런 절대적인 사랑을 사람들은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그런 사랑을 만나보셨습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그렇게 갈급해 하며 찾던 완벽한 사랑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3. 요한1서는 당시 이단들로부터 심각하게 도전을 받고 있는 지상교회를 향해 생명과 진리에 대하여 핵심적인 문제를 다루면서, 이 문제를 보다 쉽게 접근하고 있는 방법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사도요한은 우리 가운데 나타난 이 하나님의 사랑을 한 단어로 반복하면서 표현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사귐이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원어로「코이노니아」로 친교, 교제, 함께 나눈다는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실 때, 그 목적이 아들을 통하여 우리와 함께 교제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 사귐을 통해서 평생에 사랑에 목말라 하던 우리에게 영원하고 완벽한 사랑을 주시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2절에서는 이 사귐을 위해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영원한 생명이라고 하였고, 3절에서는 "우리와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생명을, 그것도 영원한 생명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이 사귐을 통해 얻는 사랑이 생명이 끝나는 순간 모든 것이 사라지는 그런 제한적인 사랑이 아니라, 완벽하고 영원한 사랑이 변함없이 지속되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나"(마16:26) 고 하셨으니, 아무리 나만 위해 주고 나를 위해 생명까지 희생하는 그런 완벽한 사랑을 받아도, 내가 죽는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전한 사랑을 그것도 영원히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그 분과의 사귐을 통해서 완벽한 사랑을 그것도 영원히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4.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을 아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 가운데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사랑과 영원한 생명에 관하여 들은 것이 많기 때문에 지식은 많아도, 그 받은 사랑으로 인하여 행하는 사랑은 너무 부족한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얼마나 많은 갈등과 분열과 고통이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그 분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그 은혜가 무엇이며, 구원받은 자의 누리는 영원한 은총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받은바 사랑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받은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 없는 사랑인데, 우리는 그 사랑으로 행한다고 하면서 너무도 많은 대가를 요구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는 사랑인데, 우리는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너무나 많은 조건을 달고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고 슬프게 만들어도 우리를 향한 사랑은 변함이 없으시고, 허물이 많은 그런 우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쉽게 포기하고 의심하고 물러서고 말았습니다. 이러고도 과연 우리가 사랑의 사귐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것도 영원토록 누릴 수 있는 소망을 가질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이 완벽하고 영원하다면 어째서 우리는 그런 사랑을 행할 수 없으며, 어째서 우리는 완벽한 사랑을 원하면서도 그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까? 5. 그기에 대한 분명한 사실이 본문 3절에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이유는, 아버지와 아들간의 영원한 사귐을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더불어 코이노니아를 원하고 계시는데,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이 코이노니아 즉, 사귀고 나누고 교제하는 대상을 하나님이 아닌 다른 곳에 맞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가난하다 보니 먹고 살기 바빠서, 어떤 사람들은 세상을 엔조이 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피곤하기 때문에, 또 어떤 사람들은 질병이나 세상의 여러 가지 문제에 사로잡혀서 도무지 하나님과 사귀는 것은 물론이고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는 것조차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대로, 사랑이라는 것은 아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도 사랑도 행함이 없는 것은 죽은 것입니다. 교회를 흔들고 성도들의 신앙을 파선시키는 이단들의 특징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이론적으로는 완전하게 무장했을지는 몰라도, 그 안에 사랑으로 행하는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구원과 영생과 사랑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고 하면서도 행함이 없습니다. 이것은 사도요한의 시대뿐 아니라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6.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이며 어떻게 해야 뜨거운 사랑을 회복하고, 참 사랑으로 행할 수 있습니까? 사도요한은 이 사실에 대하여 본문 1절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태초부터 있는 생명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손으로 만진바라" 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체험적인 신앙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론적이고 탁상공론의 신앙이 아니라 감각적인 경험을 가진 체험적인 신앙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은 물론이고 1장 전체를 통해서, 들었다, 전한다, 사귄다는 단어가 반복되고 있는데, 이것은 체험적인 신앙을 말하며, 동시에 체험적인 사랑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우리가 사랑으로 행하지 못하는 이유는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과의 사귐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사귐을 원하시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원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2장에 가 보면 그 원인을 알 수 있습니다. 15-16절에 보면,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고 하였습니다. 제가 텔레비전을 통해서 좀 충격적인 영화 한 편을 보았습니다. 제목도 배우도 어느 나라 영화인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내용은 선명합니다. 7. 임신을 한 어느 부부가 사는 아래층에 새로 세를 든 부부가 있는데, 이 사람들도 임신을 해서 출산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2층 주인집에 저녁 초대를 받았다가 돌아가는데, 복도 계단의 전구가 나간데다가 갑자기 고양이가 나타나서 놀란 나머지 임신부가 계단에서 굴러 유산되고 말았습니다. 화가 난 이 여인이 나중에 하는 말이 당신이 출산하는 것을 그냥 둘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염려 속에 남자 아이가 태어났고, 아래층 사람들도 그동안 화가 풀려서 다시 사이가 좋아졌고, 나중에는 바쁠 때에는 아이를 맡기고 외출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들이 계속 일어나고 육아에 지치고 밤에 잠을 잘 수 없게 되니, 신경쇠약에 부부 싸움이 잦아지고 상황이 심각해졌습니다. 어느 날 아이의 엄마는 배달 온 우유를 마시고 실신했고, 아이와 고양이가 사라졌습니다. 남편이 집에 와 보니 아내가 약을 먹고 목욕탕에서 자결했습니다. 남편도 집을 정리하고 떠나고, 아래층 사람들도 자기 나라로 돌아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아이의 엄마는 자살로 위장해서 죽이고 아이는 자신들의 자녀로 키우고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는 제 부모의 원수 손에서 자라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생각나는 것이, 사람들이 사랑에 목말라 있다고 하지만, 우리에게는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랑이 있으며, 받아서도 주어서도 안 될 사랑도 있다는 것입니다. 8. 그러나 우리를 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하며 완벽하며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연약한 우리를 강하게 세워주고, 병든 우리의 몸과 마음을 치료하여 새 힘을 주시는 사랑이요, 사랑에 목말라 울고 있는 자들에게 영원한 사랑으로 품어줌으로 평안과 감사와 기쁨이 넘치게 하는 사랑입니다. 이전에 제가 향기 나는 지우개 예화를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문지를수록 그 속에서 향기가 올라오듯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사귐에 집중한다면, 우리 가운데서 하나님의 참 사랑이 향기가 되어 진동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가짜 사랑에 울었고, 엉터리 사랑에 속았고, 불완전한 사랑으로 깨어져 버렸던 병든 심령을 치료하여, 받는 사랑이 아니라 베풀고 나누고 주는 사랑으로 충만하게 하는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힘들고 어려울수록 하나님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내 뜻대로 안되고, 병들고 지치고 눈물 나면 그리스도의 품안으로 들어오시기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러한 우리와 함께 오늘 이 예배를 통해서 사귐을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입술의 찬양과 감사를 통해 향기 나는 우리의 사랑을 원하고 계십니다. 기도로 올리는 사랑의 고백과 말씀을 통해서 얻는 구원의 감격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와 사귐을 원하고 계십니다. 열심히 교회로 나와서, 그리고 모인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함께 손을 잡고, 함께 이 사랑을 전하고 간증한다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 코이노니아는 4절에 기록된 말씀처럼 영원토록 "우리의 기쁨이 충만" 한 영원한 사랑 안에 거하게 될 것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