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2.24.우리와 함께 하시는 자(마태복음1:23-25)
[성경본문] 마태복음1:23-25개역개정
23.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24.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25.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제공: 대한성서공회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자(마태복음1:23-25/2017.12.24.오전)
1. 고대 헬라 사람들의 삶에 대하여 철학자 플라톤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먼저 재물에 관해서는 내가 하고 싶은 수준보다 조금 못다 쓰고, 못다 입고 못다 사는 정도의 수준이면 행복한 삶이라고 했습니다.
외모 지상주의의 현대사회와는 다르게, 아내의 품성과 외모는 사람들이 칭찬하기에 약간 모자라는 정도면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만하고 있는 것의 절반 정도만 알아주는 명예, 두 사람에게 이기고 한 사람에게 지는 정도의 건강, 1/2 정도의 청중들이 손뻑을 쳐 주는 정도의 웅변술이면 이 사람의 인생은 행복한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이든지 완벽하기를 바라고, 남들보다 뛰어나야 성공이고 남들보다 더 많이 가져야만 그것이 행복인 줄 생각합니다.
성경에도 유사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만(마14:44), 우리나라의 경우도 외국의 침략과 국난이 많았던 터라 부자들이 피난을 갈 때에 재산을 금은 보물로 바꾸고는 그것을 가마솥에 넣어 땅에 묻어 두고 피난을 갔다가 돌아오지 못하고 죽으면, 후세 사람들이 우연히 그것을 발견하여 대박이 터지기도 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의 학자 김학성의 모친은 과부로 어린 형제를 삯바느질을 하면서 근근히 키웠는데, 우연히 사는 집 마당에서 그 보물 솥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도 몰래 그 솥은 묻어버리고 아이들을 데리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다고 합니다.
이유는 사람이 살면서 모자라는 것이 있어야 올바른 인격자가 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2. 저는 젊은 시절에 자취를 하면서 적지 않은 세월을 혼자서 보낸 경험이 있는데, 날씨도 춥고 연말이 되면 가족이 그리워지고 어머니가 차려 주시는 따뜻한 밥상이 생각날 때가 많았습니다.
안데르센의 동화 성냥팔이 소녀의 스토리에 공감하여 가슴이 사무치기도 했는데, 내가 외롭고 힘든 만큼 이 소녀에게 누군가가 함께 있어만 주었어도 이런 외로움과 불쌍한 죽음은 면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힘들고 어려울 때, 누군가가 내 곁에 있으면서 위로가 되는 말 한 마디라도, 손이라도 한 번 잡아 준다면, 식사라도 같이 할 수 있다면, 그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습니다.
겉으로 보면 누구나 대단해 보이고 능력이 있고 잘난 것 같지만, 결국에는 대수롭잖은 말 한마디에도 무너지고, 별것 아닌 것에 넘어져서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그런 사람들이 많은 이유는 단 한 가지, 인간은 연약한 질그릇과 같은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2017년의 끝자락을 향해 나아가면서, 나와 함께 할 수 있는 가족이나 동료나 친구나 이웃이 곁에 있다는 것은 값으로 살 수 없는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하나가 된 형제와 자매들과 함께, 아기 예수 탄생을 축하하는 축복의 시간을 나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남다른 은총인 줄 믿습니다.
3. 오늘 본문의 핵심은 23절의 임마누엘이라는 단어입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의미의 히브리어입니다.
물론 구약시대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역사는 계속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마태복음의 저자는 이 사실을 마치 새로운 사건처럼 그렇게 소개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깨닫고 알았더라도 그들은 속히 이 사실을 잊어버리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시대마다 타나나서 이스라엘을 향해 외친 메시지가 너희는 혼자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거의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신 일은 스스로가 인간의 몸을 입고 사람들과 똑같은 모양으로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존재로 이 땅에 오시기로 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약 2천여 년 전에 요셉과 마리아의 가정을 통해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의 탄생입니다.
그런데 임마누엘의 이 사건은 인간의 이성과 경험으로서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신비의 사건이었습니다.
천상에 계시면서 전능과 거룩함으로 옷 입으신 신적인 존재가 어떻게 연약하고 추하고 유한한 인간을 통해서 태어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4.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상식적인 인간으로서 생각할 때, 성탄절을 분석해 보면 이해하기 불가능한 내용들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남자를 알지 못하는 여자에게서 어떻게 아이가 태어날 수 있으며, 또한 사람이 성령으로 잉태되는 것을 누가 믿을 것이며, 누가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7:14) 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시기 약 7백 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신 말씀입니다.
이것은 갑자기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이미 태초부터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 연약한 인간으로서 겪어야하는 온갖 고초와 시험과 죽음까지 다 맛보심으로, 인간으로서의 우리의 모든 것을 다 경험하심으로 영원한 임마누엘, 즉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계시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
한 집에 살고 한 솥밥을 먹어도 마음이나 생각의 거리가 너무 먼 부부들도 있습니다.
형식적으로는 같이 살고 있지만, 하나가 되지 못하고 있는 그런 부부나 형제나 가족들이 많습니다.
여기서 과연 무슨 사랑을 느낄 수 있으며, 여기사 무슨 희생이나 감동을 줄 수 있겠습니까?
참 사랑은 내 고집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보고, 상대방을 이해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남편이 가장으로서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직장이나 사회에서 얼마나 수고하는지, 아내가 가정의 모든 일과 아이들의 양육까지 책임지고 있는 그 일들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와 똑같은 모습의 인간으로 오신 것입니다.
5. 문제는 지성과 인격과 육체의 유한성을 가진 인간이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와 우리를 향하신 그 분의 사랑과 은혜를 어떻게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우상숭배 하는 자들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주순의 존재가 아닙니다.
그는 우리를 사랑하시되 십자가에서 자신의 살을 찢고 한 방울의 피도 남김없이 우리를 위해서 다 쏟으실 정도로 그렇게 사랑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희생을 치루서라도 우리를 죄와 영원한 저주 가운데서 구원하시고, 최고의 축복과 은혜를 부어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이유는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시고, 한 영혼이라도 자기 죄로 인해서 멸망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겔18:32절에, "죽을 자가 죽는 것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 고 하였고, 계속해서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겔33:11) 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불쌍한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간절한 사랑의 부르짖음이요, 부모가 병들고 망가진 자식이라고 버리지 않고 다시 찾아 품에 안고자 하는, 애타게 찾는 사랑의 손짓과 같은 것입니다.
6. 우리의 믿음이 언제 자라납니까?
내가 믿고 따르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깨닫고, 나를 향한 그 분의 마음을 조금씩이라도 이해하기 시작할 때 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했던 그런 사랑과 그런 희생을 맛보아 알 때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병들고 시들고 무너져 내리고 있었던 나를 먼저 찾아오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깨달을 때에 우리의 믿음이 자라는 것입니다.
룻기에 보면, 베들레헴에 살던 나오미가 흉년으로 인해 모압지방으로 피난을 갔다가 1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남편이 죽고, 두 아들이 이방여인들과 결혼하고, 그리고 후사도 없이 두 아들이 모두 죽고, 과부 3사람만 남았습니다.
그들의 형편이 얼마나 비참하고 어려운지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흉년으로 어렵다고 떠나서 이방 땅에서 얹혀 살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이 없는 그런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연속적으로 다가오는 고난 속에서 깨닫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두 며느리와 더불어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떠나게 됩니다. 사람은 고난이 올 때 깨달음도 찾아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흉년이라고 남의 나라에 피난 온 것도 잘못이지만, 두 아들을 이방여인들과 결혼 시킨 것도 잘못이었는데, 남편과 자식을 다 잃은 후에 깨닫기 시작한 것입니다.
오르바는 도중에 시어머니의 권고를 받아들여 친정으로 돌아가지만, 룻은 끝까지 따라가며 시어머니를 모시다가 보아스를 만나 다윗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7. 중요한 사실은 내 인생에서 이해가 되지 않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알 수 없는 것들을 무조건 내 인생에서 밀어내려고 하지 말고, 고난 속에서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찾고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야 새로운 길이 열리고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했던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그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서 수태고지, 즉 성령으로 잉태되는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설명이 있었기 때문에,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1:38) 고 순종할 수 있었지만, 요셉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많은 생각을 했고 고민을 하면서, 처음에는 그는 하나님의 뜻이 과연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육체적인 접촉도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아이를 가진 마리아와 조용히 관계를 끊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이 요셉을 가리켜 의로운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할 때에라도 그는 최선을 다해서 범죄하지 않고, 상대방을 배려하면서 이 문제를 믿음으로 해결하려고 했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문제가 생기면, 그것도 인간관계에서 오는 상처나 문제를 앞에 두게 되면, 제일 먼저 감정이 앞서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감정에 사로잡히기 시작하면, 우리의 인격이나 행동에 조절이 안됩니다.
그래서 더 큰 문제가 발생하고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는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숙고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먼저 생각하면서 모든 문제를 믿음으로 풀려고 합니다.
말씀을 통해서 자신을 새롭게 비추어 보면서 새롭게 성장하는 기회로 삼게 됩니다.
8. 우리가 서로 알고 이해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해하기 보다는 오해가 앞서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문제를 풀 수 있는 키가 있다면 그것은 사랑입니다.
사랑하게 되면 관심을 가지게 되고 문제가 무엇인지 알게 되고, 그래서 이해하고 용서하고 더 좋은 관계로 성숙을 이루어갈 수 있습니다.
요셉의 경우도 당시 유대인의 법이나 풍습대로 하면, 간음한 여인은 돌로 쳐 죽입니다.
그러나 요셉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아무리 배신자요 상처를 준 사람이라도 심판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고, 모든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을 우선으로 생각한 사람입니다.
우리의 생각이나 믿음의 수준이 일반적인 사고의 수준을 넘어갈 때 기적도 일어나고 능력도 일어나고 생각지도 못한 축복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우리가 의롭기 때문에 대신 희생하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바울은 고백하기를 내가 죄인 중의 괴수와 같은 존재라고 했습니다.
죄인 중에 괴수와 같은 사람이라도 먼저 용서하고 살리는 것이 예수님의 뜻이고, 이것이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이유인 것입니다.
죄와 불의에 대한 심판이나 분노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죄인이라도 불쌍히 여기고 생명을 살리고 그 생명을 새롭게 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9. 손양원 목사님은 일제 시대의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해방 후에는 동인, 동신의 두 아들이 전국학생연맹에서 활동하다가 빨치산에 납치되어 무참하게 죽임을 당했는데, 나중에 안재선이라는 범인이 잡혔을 때, 그를 용서하고 그가 반란죄에 살인자로 처형당하게 될 때, 그의 생명을 살리려고 양아들로 삼았습니다.
온 가족과 주위 사람들이 반대했지만 그의 뜻을 굽히지 않았는데, 나중에 이 안재선의 아들인 안경선씨가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손양원 목사님이 하신 일이 아니라, 그를 통해 성령께서 하신 일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인의 괴수라도 우리를 위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면 누구라고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 안에는 하나님이 보내신 성령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감동을 주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며, 그것을 행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천사를 통해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되자 마리아를 아내로 데려 왔습니다.
바로 이런 순종의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역사가 새롭게 시작된 것입니다.
10. 인간의 행복은 물질이나 남다른 성공이나 좋은 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사랑하되 자기의 생명도 아끼지 아니할 정도로 그렇게 사랑해 주는 분이 함께 할 때, 여기서 남이 빼앗을 수 없는 기쁨이 나오고, 감화가 있으며, 미래에 대한 소망으로 넘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사랑을 맛보고 그런 사랑의 사람이 되도록, 이 성탄절에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되는 그런 방법으로 우리에게 아기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지금 그 분이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줄 믿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사도요한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