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7.5.임금 요아스의 마음(열왕기하12:1-16)
[성경본문] 열왕기하12:1-16개역개정
1.예후의 제칠년에 요아스가 왕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사십 년간 통치하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시비아라 브엘세바 사람이더라
2.요아스는 제사장 여호야다가 그를 교훈하는 모든 날 동안에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되
3.다만 산당들을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여전히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였더라
4.요아스가 제사장들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성전에 거룩하게 하여 드리는 모든 은 곧 사람이 통용하는 은이나 각 사람의 몸값으로 드리는 은이나 자원하여 여호와의 성전에 드리는 모든 은을
5.제사장들이 각각 아는 자에게서 받아들여 성전의 어느 곳이든지 파손된 것을 보거든 그것으로 수리하라 하였으나
6.요아스 왕 제이십삼년에 이르도록 제사장들이 성전의 파손한 데를 수리하지 아니하였는지라
7.요아스 왕이 대제사장 여호야다와 제사장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성전의 파손한 데를 수리하지 아니하였느냐 이제부터는 너희가 아는 사람에게서 은을 받지 말고 그들이 성전의 파손한 데를 위하여 드리게 하라
8.제사장들이 다시는 백성에게 은을 받지도 아니하고 성전 파손한 것을 수리하지도 아니하기로 동의하니라
9.제사장 여호야다가 한 궤를 가져다가 그것의 뚜껑에 구멍을 뚫어 여호와의 전문 어귀 오른쪽 곧 제단 옆에 두매 여호와의 성전에 가져 오는 모든 은을 다 문을 지키는 제사장들이 그 궤에 넣더라
10.이에 그 궤 가운데 은이 많은 것을 보면 왕의 서기와 대제사장이 올라와서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대로 그 은을 계산하여 봉하고
11.그 달아본 은을 일하는 자 곧 여호와의 성전을 맡은 자의 손에 넘기면 그들은 또 여호와의 성전을 수리하는 목수와 건축하는 자들에게 주고
12.또 미장이와 석수에게 주고 또 여호와의 성전 파손한 데를 수리할 재목과 다듬은 돌을 사게 하며 그 성전을 수리할 모든 물건을 위하여 쓰게 하였으되
13.여호와의 성전에 드린 그 은으로 그 성전의 은 대접이나 불집게나 주발이나 나팔이나 아무 금 그릇이나 은 그릇도 만들지 아니하고
14.그 은을 일하는 자에게 주어 그것으로 여호와의 성전을 수리하게 하였으며
15.또 그 은을 받아 일꾼에게 주는 사람들과 회계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성실히 일을 하였음이라
16.속건제의 은과 속죄제의 은은 여호와의 성전에 드리지 아니하고 제사장에게 돌렸더라제공: 대한성서공회
임금 요아스의 마음(열왕기하12:1-16/2015.7.5.오전)
1. 옛날에 강가에서 고기를 잡으며 살던 어부가 날아오는 해오라기와 친하게 지내다 보니 어깨 위에 앉기도 하고 사이가 매우 좋았다고 합니다.
그 사실을 아내에게 말했더니 한 마리를 잡아오라고 했고, 그 다음날 강가에 나가보니 그렇게 많이 날아오던 해오라기가 한 마리도 가까이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가리켜 기심(機心)이라고 합니다.
말 그대로 기회를 엿보는 마음입니다.
사전을 찾아보면 비슷한 말로 기계지심(機械之心)이 있는데, 이것은 간교하게 속이거나 책략을 꾸미는 마음을 말합니다.
어부가 해오라기를 잡으려는 것을 숨기고 겉으로는 평상시처럼 행세했지만, 기심은 숨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중국의 장자는 말하기를, 새나 야생 동물들이 사람을 멀리하고 피하는 것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기심 때문이며, 기심을 갖지 않는다면 금수와도 친하게 지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조선의 명종 때에 정승 박순(朴淳) 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벼슬도 버리고 세상의 모든 욕심을 버리고 지리산에 들어갔더니 산길을 걸을 때 마다 그의 지팡이 짚는 소리를 듣고 산새들이 몰려들었고, 바위에서 낮잠을 자면 다람쥐들이 소매나 바지가랑이 속을 들락거렸다고 합니다.
기심이 없는 그의 마음을 짐승들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삼상 20장에 보면 목동 다윗과 왕자 요나단은 서로 어울릴 수 없는 그런 불편한 관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우정을 나눌 수 있었던 것은, 이 두 사람에게는 기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잠언26:24-25절에 보면, “원수는 입술로는 꾸미고 속으로는 속임을 품나니, 그 말이 좋을지라도 믿지 말 것은 그 마음에 일곱 가지 가증한 것이 있음이니라” 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고 했습니다.
2.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요아스가 왕이 된지 23년 만에 성전 수리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동안에 유다 나라는 여호사밧 이후로 하나님 중심의 훌륭한 왕이 없었습니다.
여호람이나 아하시야 왕은 악했고, 여왕 아달랴의 경우는 악마적인 존재였습니다.
이 아달랴의 손에서 극적인 구원을 받아 왕 위에 오른 이가 바로 요아스 임금이고, 요아스의 생명을 구하고, 마침내 그를 왕위에 올려놓은 사람이 대제사장인 여호야다였습니다.
그 결과 이 요아스 왕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는 대부분 좋았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성경은 어떻게 평가하고 있습니까?
본문 2절에 보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 다고 했습니다.
성경도 그를 좋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구절의 앞쪽으로 보면 무엇이 어떻게 기록되어 있습니까?
“요아스는 제사장 여호야다가 그를 교훈하는 모든 날 동안에는”, 이라고 했습니다.이것은 그가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한 왕이라고 평가를 받고는 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한시적이고 조건부적인 사항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고모부에 해당하는 여호야다가 살아 있을 동안에는 그의 교훈을 따랐기 때문에 정직한 왕으로 평가를 받았지만, 여호야다의 사후에는 상황이 달라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기록을 보면 여호야다는 요아스가 왕이 된 지 23년이 지나면서 13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것으로(대하24:15) 되어 있고, 이 때의 요아스는 나이가 30세이며, 이 때 요아스는 성전을 수리하는데 많은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3. 객관적인 시각으로 보면 국가의 중심적인 신전의 관리는 왕이 책임을 지고 있었고, 그곳은 또한 왕실의 예배당이기도 했기 때문에 당연히 왕은 성전 관리의 책임자였습니다.
그러나 요아스의 시대적인 배경을 보면 왕권 보다는 제사장들의 권한이 더 큰 것 같았고, 그래서 왕은 성전 수리를 명하고 오랜 세월 동안 그들의 눈치만 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또한 대하24:7절에 보면, 여왕 아달랴와 그의 아들들이 의도적으로 성전을 파괴하였고, 그 안의 성물들을 훔쳐 바알 신을 섬기는데 사용했기 때문에 성전 수리는 불가피한 일이었습니다.
이 때의 성전은 건축된 지 124년이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아스의 일생과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그가 성전 수리에 힘을 쏟은 것은 또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요아스가 왕위에 올라 23년의 세월이 지나도록 유다 나라를 실질적으로 통치한 사람은 여호야다 였습니다.
대하24:3절에 보면 요아스가 결혼할 때, 신부가 될 결혼 대상자까지 여호야다가 선택하였고, 그가 정직한 왕이 되기까지는 여호야다의 지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사실을 놓고 보면, 여호야다의 권력은 절대적인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젊은 요아스는 연약한 왕권에 대한 불만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모부인 여호야다의 고령으로 인하여, 죽음이 임박한 시점을 이용해서 요아스는 왕권을 강화하고, 통치 능력을 극대화 하는 수단으로서 성전 수리에 착수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뒷받침할 만한 내용이 여호야다의 아들인 제사장 스가랴의 책망을 듣자 왕이 신복들을 시켜 그를 돌로 쳐 죽인 사건입니다(대하24:20-22).
한 마디로 말해서 은혜를 잊은 배신적 살인입니다.
요아스는 자신이 선한 왕이요 능력 있는 왕이라는 사실을 백성들에게 인식 시키기 위해서 라면 성전 수리만큼 좋은 방법은 없었던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성전수리는 23년 동안 자신을 억눌러 왔던 여호야다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4. 우리는 이러한 요아스의 행적을 통해 무엇을 볼 수 있습니까?
요아스가 정직한 왕이라는 평가를 받은 것은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여호야다의 공로라는 사실입니다. 왜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말씀 중심의 제사장 여호야다의 가르침과 인도를 받을 때에는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요아스는 정직하고 선한 왕이 될 수 있었지만, 여호야다의 죽음을 통해서 그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순간, 요아스는 전연 다른 모습으로 변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자녀들에게도 해당되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자녀들이 어릴 때에는 부모가 하자는 대로 순종하고 따르면서, 교회도 열심히 나오지만, 성장하면서 부모의 뜻을 거역하고 교회를 멀리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놓고 부모가 문제냐 교회가 문제냐 하고 따지기 전에, 하나님 중심의 신앙은 항상 개인적인 문제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의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영영 교회를 떠나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요아스의 경우에도 어린 시절에는 여호야다에게 의존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선한 왕이 될 수 있었지만, 그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순간에, 자신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기심(機心), 즉 기회를 엿보고 있는 마음이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요아스의 마음속에 있는 기심이 바로 우리 자녀들에게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5. 인간이라는 존재는 참으로 연약하고 간사하기 짝이 없습니다.
요아스가 악마와 같은 아달랴의 손에서 여호야다의 부부에게 구원받을 때가 1살 이었고, 그리고 여호야다의 혁명에 의해 아달랴가 살해되고, 요아스가 임금의 자리에 오른 것이 7살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30살이 되도록 23년 동안 여호야다의 지도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저가 평생을 섬기던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 신을 숭배하는 임금으로 변신하고 말았습니다.
23년 동안 여호야다에게 신세진 것은 간 곳이 없고, 결국 남은 것은 요아스의 손에 그 아들 제사장 스가랴가 무참히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3년 동안 동거동락하면서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입으며 제자의 길을 걸었지만, 정작 십자가의 고난 앞에서는 하나같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결국 요아스의 성전 수리도 순수하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런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요아스의 속에 숨어 있던 권력의 욕심인 왕권 강화의 수단으로 성전 수리라는 방법이 동원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면, 요아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성전은 남다른 특별한 장소입니다.
그 속에서 악마와 같은 아달랴의 눈을 피해 6년 간 숨어 있었기 때문에 성전을 사랑하는 마음은 당연히 남들과는 달라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날로 말하자면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요 예수님의 몸 된 존재요, 그 분의 통치가 있으며, 언약의 말씀이 성취되는 곳이 성전이요 교회입니다.
그런데 요아스는 이러한 하나님의 성전을 자신의 인간적인 목적에 대한 수단으로 삼은 것입니다.
6. 또 한 가지의 문제는 본문의 서두에 나오는 산당에 대한 태도입니다.
3절에 “다만 산당들을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여전히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였더라”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산당이라면 본문에서도 그렇게 밝히고 있지만 매우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유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올 때 이미 이곳에는 이방신을 섬기는 산당들이 있었으며, 구약 성경도 산당을 이방 종교의 신을 섬기는 장소로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모세에게 가나안의 산당들을 다 헐어버리라고 명령했습니다(민33:52).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서 이 산당은 없어지지 아니하고, 때로는 이방신을 섬기는 오점을 남기는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여러 왕들이 지방에 산재해 있는 많은 산당을 헐어 버리려고 했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이스라엘의 초기 역사에서 성전이 아직 건축되기 전에는 임금까지 산당에서 제사를 드린 기록이 있으며, 솔로몬도 기브온 산당에서 일천 번제를 올렸고, 하나님께 전무후무한 지혜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습이 성전 건축 이후에도 이어지면서 산당은 이스라엘에게는 이방신을 섬기는 잘못된 원인을 제공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지방에 산재한 산당은 이방신을 섬기는 곳으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때때로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하는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기 때문에, 지방 사람들의 반발로 인하여 산당을 뿌리 뽑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7. 문제는 이런 배경으로 인해서 왕들은 산당을 허물어 버리는 것이 쉽지 않았으며, 자칫 잘못하면 지방 세력의 반발을 살 수도 있었기 때문에, 요아스 임금도 산당에서 백성들이 이방신에게 분향하는 것을 묵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우유부단한 행동이 부메랑이 되어서 자신이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 신을 섬기는 어리석음에 빠질 줄은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요아스 임금이 어떤 기심을 가지고 성전을 수리했다고 하여도, 결과적으로 보면 그것은 잘 된 일입니다.
첫째로 제사장들의 게으름과 직무 태만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들은 오래 전에 성전수리의 왕명을 받았지만, 권력과 밀착된 제사장들의 행태가 하나님의 집에 대한 잘못된 태도가 드러나고 만 것입니다.
성전의 수입에 관해서는 십일조 외에 백성들이 제사하며 매일 드리는 예물이 있으며, 호적에 등록된 성인 남자 한 사람 당 바치는 반 세켈의 인두세가 있었고, 서원자가 드리는 예물과 자발적으로 드리는 예물이 있었습니다.
일부 기록에 의하면 이런 예물이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생활에 충당하면서 동시에 성전을 수리하는데 사용하기는 부족했기 때문에 성전 수리가 지체되었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원인이 어디에 있었던지 그 결과는 그들이 성전 수리라는 귀한 사명에서 제외가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에도 받은바 은사와 능력들, 그리고 직분에 충성하지 못하면 하나님은 그것을 거두어 가신다는 사실입니다.
도리어 이 제사장들 처럼 책망을 받고, 가장 중요한 사명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둘째는 15절에 보니 성전 수리를 통해서 성실하고 훌륭한 일꾼들의 헌신이 많이 있었는데, 이것은 이스라엘 전체에게 복된 일이었습니다.
신실하고 충성된 일꾼은 그냥 만들어 지거나 우연히 나오지 않습니다.
교회가 어려운 일을 당하고, 성도들에게 문제가 생길 때, 그 때 그런 일을 통해서 도망가고 숨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제 자신의 일처럼 돌보며 헌신하는 사람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8. 오늘날 우리는 하루를 자고 나면 세상이 어제의 세상이 아니라고 말할 정도로 이 세상은 급변하고 있습니다.
그 위에 우리 육신에 자리 잡고 있는 죄의 세력이 언제 우리를 요아스 임금처럼 변심하게 만들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새로운 마음과 더 큰 믿음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시편 기자가 고백한 대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51:10) 하고 그 분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일시적으로 조건부로 착하고 충성된 종이 아니라, 일평생 주님 앞에 서는 그 날 까지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교회 중심으로 우리의 마음이 변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강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어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빌2:5)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 어떤 마음입니까?
겸손한 마음,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로 나타나 종의 모습으로 사람들을 섬기되 십자가 위에서 죽기 까지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처럼 그런 마음을 가진 자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기심을 가진 자는 도중에 무너지고 꺾이고 실패하는 그런 인생이지만, 예수님 처럼 겸손한 자의 마음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리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과 영원한 영광인 줄 믿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