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7.20.엘리사를 세우시는 하나님(열왕기하 2:15-25)

[성경본문] 열왕기하2:15-25개역개정

15.맞은편 여리고에 있는 선지자의 제자들이 그를 보며 말하기를 엘리야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엘리사 위에 머물렀다 하고 가서 그에게로 나아가 땅에 엎드려 그에게 경배하고

16.그에게 이르되 당신의 종들에게 용감한 사람 오십 명이 있으니 청하건대 그들이 가서 당신의 주인을 찾게 하소서 염려하건대 여호와의 성령이 그를 들고 가다가 어느 산에나 어느 골짜기에 던지셨을까 하나이다 하니라 엘리사가 이르되 보내지 말라 하나

17.무리가 그로 부끄러워하도록 강청하매 보내라 한지라 그들이 오십 명을 보냈더니 사흘 동안을 찾되 발견하지 못하고

18.엘리사가 여리고에 머무는 중에 무리가 그에게 돌아오니 엘리사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가지 말라고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였느냐 하였더라

19.그 성읍 사람들이 엘리사에게 말하되 우리 주인께서 보시는 바와 같이 이 성읍의 위치는 좋으나 물이 나쁘므로 토산이 익지 못하

20.엘리사가 이르되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내게로 가져오라 하매 곧 가져온지라

21.엘리사가 물 근원으로 나아가서 소금을 그 가운데에 던지며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이로부터 다시는 죽음이나 열매 맺지 못함이 없을지니라 하셨느니라 하니

22.그 물이 엘리사가 한 말과 같이 고쳐져서 오늘에 이르렀더라

23.엘리사가 거기서 벧엘로 올라가더니 그가 길에서 올라갈 때에 작은 아이들이 성읍에서 나와 그를 조롱하여 이르되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하는지라

24.엘리사가 뒤로 돌이켜 그들을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곧 수풀에서 암곰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의 사십이 명을 찢었더라

25.엘리사가 거기서부터 갈멜 산으로 가고 거기서 사마리아로 돌아왔더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엘리사를 세우시는 하나님(열왕기하 2:15-25/2014.7.20.오전)


1. 남미의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국경에 있는 안데스 산 정상에는 예수님의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동상이 이곳에 세워진 이유는 서로 마주 대하는 국경이 길어서 자주 분쟁이 일어나기 때문에 자신들의 무기를 녹여서 예수님의 동상을 세웠고, 그 이후로 두 나라 간에 분쟁이 일어나려고 하면 이 예수님의 동상을 보면서 화해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칠레 사람들이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는데, 왜 예수님의 동상이 칠레를 등지고 아르헨티나만 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상을 다시 만들어 예수님의 얼굴을 칠레 쪽으로 돌리자고 했습니다.
만일에 그렇게 한다면 아르헨티나 사람들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사태가 점점 험악해지고 있을 그 때에 칠레의 존경받는 언론인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직도 아르헨티나에는 구원 받아야 할 죄인이 많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 나라를 바라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말에 칠레 사람들의 감정도 여론도 잠잠해졌다고 합니다.
이런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건과 사실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우리의 생각에 따라 아무것도 아닌 것 때문에 분쟁이 일어나고 평화로운 환경이 변하여 파멸을 가져올 수도 있으며, 반대로 한 마디의 지혜로운 말 때문에 고통과 위기가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불 말과 불 병거를 타고 하늘로 승천한 엘리야를 대신하여 하나님이 엘리사를 그의 후계자로 세우시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자세히 보면 이 일에 대한 반발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생각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생각이 서로 다르면 같은 하나님을 섬기고 같은 신앙고백 위에서 믿음, 소망, 사랑으로 세워진 믿음의 공동체라도 분쟁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이 지상에 분쟁 대신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순종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2. 제일 먼저 나타나는 사건이 여리고에 있는 선지학교의 학생들의 문제입니다.
아직 학생의 신분이기 때문에 열정과 의욕은 강하지만 부족한 것이 많고 미숙한 것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선지생도들이 염려하고 있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본문 16절을 보면 이 사람들이 승천한 엘리야의 시신을 찾겠다고 나서고 있습니다.
"염려하건데 여호와의 성령이 그를 들고 가다가 어느 산에나 어느 골짜기에 던지셨을까 하나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엘리야의 육신은 버리고 영혼만 데리고 승천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존경하는 선지자의 육신이 산 속에 방치되어 짐승들의 밥이라도 되거나, 부패하여 썩어 벌레들의 먹이가 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엘리사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그 일이라면 갈 필요도 없고 찾을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선지생도들이 그렇게 간절히 원하고 있는데도 엘리사는 쓸데없는 짓이라는 듯이 그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대면하게 되는 첫 번째 문제는 선지자 엘리사의 생각과 선지생도들의 충돌입니다.
17절을 보면 그들이 엘리사에게 "부끄러워하도록 강청"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엘리사의 의지가 꺾일 때 까지, 자신들의 생각에 동조할 때 까지 반복된 청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3. 무엇이 이 사람들의 의견에 대립을 가지고 오도록 만들었습니까?
선지 생도들은 생각하기를 사람이 죽으면 영과 육이 분리된다고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엘리야의 영혼은 데려가시고 쓸모없게 된 육신은 산 속 어디엔가 버리셨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엘리야가 하늘에서 내려온 불수레와 불말을 타고 승천하는 것을 목격하였고, 그래서 하나님이 그의 영혼과 육신까지도 전부 데려가신 줄 믿었기 때문에, 엘리야의 시신을 찾는 일이 쓸데없는 일이요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면 이것은 창5:24절의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는 말씀과 동일한 사건으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는 이전에도 이런 사건이 있었던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창5장의 아담의 계보를 보면 모든 사람을 가리켜 죽었다고 표현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하나님이 데려가셨다고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에녹이나 엘리야는 정상적인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승천한 것이고, 이런 사실을 엘리사는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신앙적으로 분명한 답을 가지고 있는 엘리사는 그들의 요구가 너무도 무모하고 어리석은 일로 여겨졌기 때문에 엘리야의 시체를 찾는 것을 반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의외로 유연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들의 청원을 허락하여 50명이 나가서 엘리야의 시신을 찾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엘리사는 반대의 의견을 다룰 때, 상대방이 물러나고 포기할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에는 그것이 어리석은 일이요 헛수고가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허락한 것입니다.

4. 가정에서도 자녀들이 말도 안 되는 일에 고집을 부리고, 교회 안에서도 반대 의견으로 날을 세운다면, 이쪽의 견해와 입장을 분명하게 밝힌 후에 그들이 원하는 대로 허락 하는 것도 한 가지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 중심으로 말씀의 바른 신앙 위에 서 있다면, 그래서 내 확신이 흔들리지 않는다면 어리석은 고집쟁이들이 무엇을 해도 두려울 것은 없습니다.
왜냐면 일을 이루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 한 가지는 선지자는 말씀의 권위를 가지고 백성들의 삶 속에도 깊이 관여하고 있기 때문에, 복을 받으려면 선지자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하는 것이 옳으며,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사실이 본문 19절 이하의 물의 근원을 고치는 것과, 4장에서 나오는 여러 가지의 사건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본문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선지자의 말씀에 순종할 때 저주 받은 환경도 축복으로 변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계시된 말씀위에 바로 설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우리에게 복이 되지만, 그렇지 못할 때 이 선지생도들처럼 헛고생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생각을 바꾸고, 그들의 삶을 바꿀 뿐만 아니라 어떤 환경과 조건도 축복으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사람들의 잘못된 고집을 통해서도 엘리사가 엘리야의 능력과 권위를 그대로 계승하고 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5. 두 번째 사건은 저주받은 물의 근원을 고친 내용입니다.
19절에 보면 여리고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밝히고 있습니다.
요단강을 옆에 두고 있으니 위치는 좋지만 물의 근원이 나쁜 것이 문제였습니다.
수6:26절에 보면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점령하고 그곳을 저주한 내용이 나옵니다.
여리고 성을 다시 건축하려고 하는 자가 있다면 맏아들로부터 시작하여 막내까지 잃을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이곳의 물이 처음부터 나빴다면 큰 성인 여리고가 이곳에 세워질 수 없었을 것이고, 세월이 지난 후에도 그 땅의 열매가 익기도 전에 떨어지는 것을 보면 여호수아의 저주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왜 그렇게 말할 수 있느냐 하면, 엘리사는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가져오게 하고 그 소금을 물의 근원에 뿌리면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이로부터 다시는 죽음이나 열매 맺지 못함이 없을지니라" 고 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죽음은 사람의 생명을 잃는 것을 말하고, 열매 맺지 못하는 것은 농사에 관한 것을 말하기 때문에 여호수아의 저주가 여전히 있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사를 이스라엘의 영적인 아버지로, 이스라엘을 지키는 하나님의 대리자로 세우시기 위해서 대대로 내려오는 그 땅의 저주를 엘리사로 하여금 끊도록 하셨습니다.
일본의 동북부 지역이 쓰나미와 원전 사고로 큰 타격을 입었지만 하나님은 이 시대의 엘리사와 같은 한국 선교사들을 그 땅에 보내셔서 헌신적으로 사역하게 하셨고, 우리 교회도 힘껏 이 일에 지원하고 있는 것은, 세상 어느 곳에도 문제없는 땅이 없고,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지역은 없지만, 여호와의 말씀은 모든 땅에 참된 평화와 행복을 가져다주고, 못 쓰는 땅도 회복하여 옥토로 만드시는 줄 믿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좋은 땅을 가졌다고 하여도 불순종하는 땅은 저주받은 땅이 되지만, 황무지 같은 땅이라도 순종하면 덴마크 같은 축복의 땅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6. 우리는 23절에 들어가면서 말씀의 분위기가 급변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선지자 엘리사의 저주로 인하여 42명의 생명이 희생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엘리사의 저주는 잔인하고 무자비하며 용서할 수 없는 행위로 보여집니다.
지난 7월 18일의 뉴스에 보니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에서 말레시아의 쿠알라룸푸르 향하던 말레이시아 항공의 비행기가 298명의 승객과 승무원을 태우고 우크라이나 상공을 지나가다가 반란군들의 미사일에 격추 당해 전원이 사망한 사건이 있어났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민간기를 격추하고도 그 만행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가하는 것을 보면서 온 세계가 분노를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민간 여객기를 격추시켜 298명의 인명을 살상한 이 사람들의 행위와, 선지자를 놀려대는 아이들을 향해 엘리사가 저주함으로 곰 두 마리에 의해 42명이 물어 뜯겨 죽은 사건을 우리가 어떻게 보며 우리가 어떻게 판단해야 합니까?
이 두 사건은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끔찍한 사건이요 용서할 수 없는 일입니다.
여호와는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출34:6) 이라고 하셨는데, 만일에 그렇다면 선지자 엘리사는 큰 실수를 하고 만 것입니다.

7. 그런데 오늘 본문을 가만히 보면 23절에서 엘리사가 여리고에서 벧엘로 올라갔다고 했습니다.
여리고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는데 벧엘에 올라가니 성에서 아이들이 쏟아져 나와서 엘리사를 대머리라고 조롱하고 저주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조금 전의 여리고는 물의 근원이 나쁜 지역이지만, 벧엘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이스라엘 가운데서 바알 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의 본산지입니다.
송아지 우상을 섬기면서 오랜 세월 동안 선지자를 대적하는 땅이었습니다.
엘리사가 그곳에서 받은 것은 영접이 아니라 조롱과 저주였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사를 엘리야처럼 높이려 하는데, 그들은 의도적으로 선지자를 멸시하고 반대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완벽한 범죄요 심판 받을 일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어린아이들을 그렇게 무참하게 죽일 수 있습니까?
그러나 본문 23절에 나오는 "작은 아이들" 은 히브리어로 보면 결혼 적령기의 초기에 해당하는 나이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서는 같은 단어로 요셉을 말했는데(창41:12), 그 때 요셉의 나이는 30살이었습니다(41:15).
엘리사를 가리켜 "대머리여 올라가라" 고 하는 것은,의역을 하면 재수 없는 놈 꺼져버리라는 의미입니다.
엘리사는 여리고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의 근원을 치료한 것처럼, 여기서도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 하였다고 했습니다.
개인적인 감정으로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행하시려는 거룩한 뜻에 대한 반역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심판한 것입니다.

8. 사람을 세우거나 폐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완벽한 인간이 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를 공격하는 이스라엘의 대적자들을 하나님은 모조리 심판하셨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부족한 사람을 세우시는 것은 스스로 자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에게도 하나님을 대리하는 권위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모세를 이어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세우셨듯이, 왕하 2장은 엘리야 대신에 엘리사를 후계자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를 대적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고, 하나님은 스스로의 이름으로 그들을 심판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것을 사람이 무너뜨릴 수 없으며,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은 다 무너질 뿐입니다.
벧엘에서의 이런 참사는 인간적인 재앙이 아니라 그 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며 경고였습니다.
오늘날도 우리들의 신앙이 잘못되면, 바른 신앙과 신학 위에 자신을 세우지 못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아니라 저주가 될 뿐입니다.

9. 우리는 늘 문제 앞에서 세상 사람들처럼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제일 먼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며, 이럴 때 우리 주님은 어떻게 행동하셨는지 그것을 먼저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 생각과 내 고집이 나오고 이것이 결국에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며 고통과 불행을 만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불순종하던 아하시아 왕의 경우처럼 생명의 가치는 하나님의 뜻과 그 영광을 위해서 존재할 때 가치가 있는 것이고, 순종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영원히 함께 하시고 축복하시는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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