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4.13.예수의 몸을 원하는 요셉(마태복음 27:57-66)
[성경본문] 마태복음27:57-66개역개정
57.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58.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주라 명령하거늘
59.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60.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61.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
62.그 이튿날은 준비일 다음 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이르되
63.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64.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 하니
65.빌라도가 이르되 너희에게 경비병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지키라 하거늘
66.그들이 경비병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키니라
| 예수의 몸을 원하는 요셉(마태복음 27:57-66/2014.4.13.오전) 1. 지난 3월 초에 중국으로 향하던 말레이시아 항공기가 실종된 지 40일 가까운 시일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사고에 대한 사건 규명은 물론이고 기체도 발견하지 못한 채 전 세계가 애를 태우면서 수색작업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중국에서는 라이프 블랙박스(Life Black Box) 라는 온라인 서비스가 유행이라고 합니다. 153명의 승객을 잃어버린 중국에서는 이번 사고처럼 예기치 못한 어느 날, 갑자기 끝나버리는 인생의 그 끝을 미리 준비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진이나 유언장이나 어떤 개인적인 비밀 등을 온라인상에 보관해 두었다가, 본인이 죽고 나면 그것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그런 서비스라고 합니다. 천년만년 살 것처럼 평소에 죽음조차도 잊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이번 말레이시아 항공기 사건은 값진 교훈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도 시니어 세대들이, 살아 있을 때 임종을 미리 준비하려는 사람들로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죽음이란 것이 결코 남의 일이 아니라 곧 다가올 제 자신의 일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 창조된 모든 것에는 시작이 있는가 하면 반드시 종말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제 자신의 죽음을 예측하고 그것을 미리 준비하는 일은 지혜로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더구나 하늘나라를 사모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죽음을 미리 준비하고 임종의 때를 대비하며 사는 것은 우리의 산 믿음을 보여주는 좋은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2.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임종 이후에 그분의 시신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감동스런 사건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둘러싸고 몇몇 사람들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 몇몇의 마리아와 여자들, 그리고 아리마대 요셉이라는 사람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특별히 요셉이라는 이 사람에 관해서 본문에서는 재물이 많은 부자라는 사실과 그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 이외에는 자세한 기록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24:50-51절에 보면, 이 요셉이라고 하는 사람에 대하여 비교적 자세히 기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저희의 결의와 행사에 가타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 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두 군데의 성경 말씀을 종합해 보면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름은 요셉이고, 그는 유대인으로서 출신지는 유대 땅의 아리마대 라는 곳이며, 그의 직업은 산헤드린 공회의 의원이며, 재물이 많은 부자이며, 사람들로부터 선한 사람으로 존경과 인정을 받고 있으며, 종교적으로는 율법에 충실한 의로운 자이며, 예수님과의 관계에서는 언제 부터인지 알지 못하지만 그 분의 제자이며, 특별히 예수님의 문제를 놓고 산헤드린 공회에서 투표를 할 때 예수님을 변호하고 다른 사람들과는 반대의 의견을 표시하면서 그들의 잘못된 행위에는 동참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그는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이미 예수님의 천국 복음에 대한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있었으며, 정치적으로는 선하고 의로운 마음으로 일하며 특히 예수님의 재판에 대한 문제를 놓고서 그 분을 살리려고 노력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의원으로서 예수님의 생명을 지키고 변호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주목해야할 사실 중에 가장 중요한 것 한 가지는, 그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임종하신 이후에도 예수님에 대한 제자로서의 태도에 조금도 변함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대부분의 인간관계는 상대방이 살아 있을 때 중요한 것이지, 어느 한 쪽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그 인간관계는 대부분 소멸되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러나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58절에 보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 하신 것을 확인하고는 총독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셉의 이 행위가 얼마나 귀한 행동이며 그의 요구가 마가의 표현대로 얼마나 당돌한 행위인지(막15:43) 알 수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이미 예수님의 제자들은 도망가서 몸을 숨긴 것은 예수님과 함께하던 제자라는 사실이 드러나면 제 생명도 위태로울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런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요18:28절에 보면 예수님을 모함하고 고소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앞장을 서던 사람들이 가야바에게로 예수님을 끌고 갔을 때, 그들은 관정에는 들어가지 않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유는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함" 이기 때문입니다. 4. 유대인들은 로마 관정을 부정한 곳이요 더러운 곳이라고 인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 들어가거나 로마 관원들을 집적 만나는 것은 자신들이 그 사람들로 인하여 부정을 입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만일 부정하게 되면 일 년 내내 기다리는 유월절 잔치에 부정한 몸이 되어 참석할 수 없는 불쌍한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예수님을 모함하고 죽이려고 해도 그들은 유월절을 앞두고는 절대로 관정에는 들어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리마대 요셉은 그런 것을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하여 그것을 건네받기 까지 했습니다. 레21:11절에 보면 모세의 율법에 "어떤 시체에든지 가까이 말지니 부모로 인하여도 더러워지게 말며" 라고 하였고, 22장에 가면 시체를 접촉하면 부정한 자가 되고, 그 부정한 것은 저녁까지 부정한 자가 되며 거룩한 음식을 먹을 수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요셉을 의로운 사람이고 거룩한 사람이라고 인정하고 있으며, 그를 따르며 존경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이미 죽은 예수님 때문에 자신의 명예나 신앙적인 것을 더럽힌다는 것은 너무도 어리석고 무모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이 이 일을 감행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대로 그도 예수님의 제자였기 때문입니다. 제자의 삶이란 의외로 단순한 것이지만 자신의 희생이 없이는 결코 제자의 삶을 살 수는 없는 것입니다. 5. 지금 한국에서 세습이나 재산 등의 문제로 교회 안팎으로 사람들의 지탄을 받고 있는 목회자들이 있는데 원인은 단 한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때가 되면 내려놓아야 할 것들을 내려놓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그들을 이해하고 동정할 만한 이유가 전연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내려놓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이 아닌 또 다른 것에 묶였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어떤 것에 한 번 묶임을 받으면 제 힘으로는 풀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스스로의 힘으로 풀어 낼 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세상 그 어떤 것 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한다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남들은 결코 내려놓을 수 없다고 하여도 예수님의 제자라면 얼마든지 내려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면서 세상적인 것들을 내려놓지 못한다면 어떻게 예수님을 위해 생명을 희생할 수 있으며,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희생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11명의 제자들이 도망가고 숨어버린 그런 상황에서도 빌라도에게 당돌하게 예수님의 시신을 돌려 달라고 요구할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 제 자신은 예수님의 제자인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예수님의 제자였기 때문에 예수님의 시신이 죄인의 몸으로 골짜기에 던져져서 새와 짐승들의 밥이 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6. 창세기 23장에 보면 나그네 생활을 하던 아브라함이 그의 사랑하는 아내 사라가 127세를 향유하고 죽었을 때, 그녀의 죽음을 슬퍼한 후에 장사지낼 매장지를 찾았습니다. 그래서 헷 족속에게 가서 은 400세겔을 주며 막벨라 굴과 그 주변 땅을 구입하여 사라의 영원한 매장지로 삼았습니다. 이유는 사라가 살아 있을 때에도 아브라함의 사랑받는 아내였고, 죽음 이후에도 변함없는 아내라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헷 사람이 부당하게 많은 물질을 요구했어도 아브라함은 일절 표시하지 않고 원하는 대로 값을 치루고 그 땅을 산 것은 아내 사라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의 마음도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에도 자신의 모든 것을 동원하여 예수님을 변호하고 사랑했지만 그 분이 죽었을 때에도 그 분을 향한 사랑과 존경은 변함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을 돌보지 아니하고 마지막에는 예수님을 자신의 매장지에 모신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그 앞에 56절에 마리아라 이름 하는 여인들과 또 다른 여자들이 나오고, 61절에 보면 마리아라 이름하는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향해 앉아 있는 것이 기록되고 있는데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저도 정확한 것은 알지 못하지만, 당시 여인들의 법적인 지위나 사회적 활동은 지극히 제한적인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들도 요셉과 같이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나 시신으로 남아 있을 때에나 그 분을 향한 마음은 변함이 없었지만, 여자의 몸으로 죽은 예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저 슬프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래서 십자가 곁을 떠나지 못했고, 그래서 예수님의 무덤을 떠나지 못하고 다만 지켜 앉아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7. 과연 아리마대 요셉의 행동이나 마리아라 부르는 이 여인들의 행동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다 끝났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도망가고 몸을 감추고 더 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며, 그 누구도 더 이상 예수님의 제자라는 말을 할 수 없는 그런 시점에서도, 이 소수의 사람들은 결코 예수님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죽음을 통해 이 세상의 모든 인연은 끝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의 삶이 소중한 만큼, 그분의 죽음 또한 귀한 것이고, 그래서 그 분의 무덤을 떠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받은 은혜와 사랑은 적어도 한 쪽의 죽음으로는 결코 끝날 수 없는 관계라는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어려서 엄마를 잃고 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던 초등학교 4학년 어린이는 성탄절이 되어 학급의 모든 아이들이 선생님에게 성탄 선물을 준비할 때, 다른 아이들은 시내에 나가서 예쁘게 포장한 선물을 구입하여 준비했는데, 이 아이는 신문지에 싸서 스카치테이프로 더덕더덕 붙여 포장한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학급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선생님이 하나하나 열어보고 칭찬해 주었습니다. 이 아이가 선물한 것은 어머니가 쓰다 남은 향수와 가짜 싸구려 다이어가 박힌 어머니의 팔찌였습니다. 그나마 다이어 하나가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도 선생님은 그 향수를 몸에 뿌려보고 팔찌를 차보고 선물을 칭찬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다 집으로 돌아갔는데 이 아이는 집으로 가지 않고 선생님 곁을 맴돌고 있었고, 그래서 왜 집에 가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선생님에게서 어머니의 냄새가 난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이 아이를 껴 앉고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해 주고는 평생 돌보아 주어 그 아이는 훌륭한 의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8. 물론 이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떠나지 않은 것은 그 분의 부활을 기다린 것을 결코 아니었습니다. 다만 예수님이 그들에게 베푸셨던 사랑과 은혜로 충만한 생명의 냄새를 잊지 못해서 무덤을 향해 앉아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지금도 예루살렘에 가면 서쪽 감람산을 향한 성 바깥에는 수많은 석관들이 하얗게 누워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 때는 알 수 없지만 언젠가 예수님이 재림 하실 때에, 승천 하신 바로 그 장소에 다시 재림하실 것을 믿고, 그래서 죽어서도 감람산이 바라보이는 곳에 누워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본문을 통해 무엇을 볼 수 있습니까? 살아서 기적과 능력을 베풀며 수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며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의 예수님만 따라가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십자가에서 붉은 피로 얼룩진 채 세상 사람들이 볼 때 가장 무능하고 가장 불쌍한 모습을 하고 있는 그런 예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습니까? 아예 응답도 없고 반응도 없이 무덤 속에 갇힌 채로 죽은 자로 변해버린 그런 예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죽음 이후에 나타날 영광까지 바라보는 그런 부활의 신앙을 가진 예수님의 신실한 제자로서 그 분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9.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맺어 주신 이 사랑의 관계는, 고난이나 슬픔이나 수치나 죽음을 넘지 못해서 도중에서 끝나고 좌절해야만 하는 그런 관계는 결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 분과의 이 관계는 십자가의 보혈로 맺어진 순결하고 아름답고 영원한 관계이며, 이 관계는 만세전부터 맺어진 언약의 관계이며, 동시에 그 분을 신랑으로 우리는 그 분의 신부로서 영원한 생명의 향기로 이어지는 영광으로 가득한 보배로운 관계인 줄 믿습니다. 그래서 아리마대 요셉이나 마리아와 여러 여인들에게는 예수님의 시신이나 그 무덤까지 다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부어지는 이 사랑의 향기가, 생명의 향기가 우리 교회 안에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충만하기를 소원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