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2.2.베드로의 눈물(마태복음 26:69-75)

[성경본문] 마태복음26:69-75개역개정

69.베드로가 바깥 뜰에 앉았더니 한 여종이 나아와 이르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70.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71.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여종이 그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72.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73.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74.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75.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베드로의 눈물(마태복음 26:69-75/2014.2.2.오전)
1. 여러분은 최근에 눈물을 흘려 보았습니까? 펑펑 울어보았습니까?
생각 밖으로 현대인에게는 눈물을 흘릴 만한 기회가 없는 것 같습니다.
더 솔직히 말한다면 눈물을 흘릴 기회보다는 감정이 메말라서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 모릅니다.
현대인의 생활이란 항상 긴장하고 바쁘고, 그래서 많은 스트레스가 쌓이다보니 감정에 메말라지기 마련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상황에서 눈물을 흘립니까? 어떤 때에 눈물이 나옵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사업이 무너지고 배신당하고 갈 길이 막혔을 때입니까?
원래 한국 사람은 정이 많다보니 그 만큼 눈물을 흘릴 기회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부모 형제들이나 이웃 사람들의 어려운 형편을 보거나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리거나, 영화나 드라마, 책을 읽으면서 울기도 하고, 스스로의 당한 일에 북받치는 설움에 울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도들의 경우는 엎드려 기도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면서, 주님의 은혜에 감격하면서, 넘치는 감사로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이런 눈물에 대한 우리의 감정들을 생각하면서 오늘 본문을 대한다면 많은 은혜가 있을 것 같습니다.
본문의 말씀 마지막 부분에 보니, 베드로가 울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냥 우는 것이 아니라 심히 통곡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가 왜 이렇게 통곡하고 있습니까?

2. 본문의 말씀을 보면, 베드로가 처해 있는 지금의 상황으로는 도무지 눈물이 나올 만한 그런 형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도리어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실이 노출되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둘러싸고는 그와 같은 당이라고 하면서 궁박해 오는데, 언제 예수님처럼 체포되어 심문을 받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때 베드로의 감정이 어떠했을 것 같습니까?
자칫 잘못하다가는 예수님처럼 체포되어 심문 받은 후에 죽임을 당할지도 모르는 그런 상황이고 보면, 눈물 보다는 공포와 두려움, 무서움이 앞섰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베드로가 눈물을 흘렸고 그것도 통곡하고 있었습니까?
이유가 무엇입니까? 눈물의 원인은 새벽을 알리는 닭의 울음소리였습니다.
닭이 운다고 따라 울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는 이 닭 울음소리에 따라 함께 울었습니다.
눈물을 흘릴 만한 상황도 아니고, 닭이 운다고 따라 울만한 그런 감상적인 문학가도 아닌데 왜 통곡하면서 울었습니까?
베드로의 눈물의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울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베드로처럼 그렇게 울어 본 적이 있습니까?
말씀이 생각이 나서 운다는 것은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고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기에 그렇게 울 수 있단 말입니까?
75절의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는 이 말씀 때문입니다.

3. 그런데 이 말씀은 34절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본문에서 전개되고 있는 베드로의 예수님에 대한 부인과 배신을 예수님이 미리 말씀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가복음 14:30절에도, 누가복음22:34절에도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왜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통곡의 눈물을 흘렸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만찬석상에서 우리 가운데 한 사람 배신자가 있어 그 사람이 나를 팔리라고 하셨고, 31절에 보면 겟세마네 동산에 기도하러 올라가시면서,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고 하셨습니다.
날 배신하고 버리고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다 도망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때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한 말이 무엇입니까?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33) 고 했습니다.
그리고 34절에서 나를 세 번씩이나 부인하리라고 하셨을 때, 그가 대답한 말이 무엇입니까?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35) 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곁에서 듣고 있던 다른 제자들도 이구동성으로 같은 말을 했습니다.
베드로의 이 말은 그가 닭울음소리를 듣고 통곡하기 불과 몇 시간 전의 말입니다.
문제는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지만, 예수님은 이미 베드로의 배신을 알고 계셨고, 그의 구체적인 행동과 말을 세세히 알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를 통곡하게 만들고 눈물을 흘리도록 만든 것은 자신이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그를 저주하고,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맹세까지 한 이 어리석은 행동이 부끄러워서 울 수도 있지만, 베드로를 울도록 만든 결정적인 것은 예수님이 자신의 행동과 말을 다 알고 계셨다는 사실이었습니다.

4. 참으로 기막힌 것은 베드로 자신도 모르는 제자신의 일을 예수님은 미리, 그것도 세세히 알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사람마다 계획이 있고, 특히 샐러리맨들은 하루하루의 행동을 스케줄에 작성하여  행동하기 때문에, 오늘 대략 어디서 누구를 만나고 어떤 일을 하고 언제 어디에 있을 것인지 자신의 행동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아무도 모릅니다.
예정된 약속이 취소가 되고, 예정에도 없는 만남이 있거나 생각지도 못한 불상사를 만날 수도 있으며, 하루아침에 회사에서 밀려날 수도 있습니다.
한 시간, 일 분 후에 무슨 일을 만날는지, 누구와 무슨 대화를 나눌지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도망가 버린 제자들 중에 베드로가 다시 돌아와서 예수님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것도 예수님이 제일 힘들 때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것도 예측한 정확한 시간에, 몇 번 부인할 것인지 횟수까지 아셨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나에 관해서 나도 모르는 일을 예수님은 훨씬 이전부터 알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은 내가 모르면 남들도 모를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나는 몰라도 남들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 실수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는 몰라도 예수님은 다 알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5. 그렇다면 예수님은 베드로에 관해서 언제부터 알고 계십니까?
이 사건이 나기 하루 전인 만찬 석상에서 입니까? 아니면 예루살렘 입성 때입니까?
아니면 갈릴리에서 베드로를 보고 그를 제자로 부르실 때입니까?
우리는 이럴 때 가장 정확하고 바른 답을 얻기 위해서 성경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예레미야1:5절에 보면 제사장 힐기야의 아들 예레미야를 향해 말하기를,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고, 마태25:34절에는,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고 하였으니, 하나님은 사람을 어머니의 태속에서 짓기도 전에 알고 계시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서 예비하신 축복이 하늘과 땅과 만물을 짓기도 전에 이미 알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사도바울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29-30) 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베드로를 아신 것은 갈릴리에서 그를 부르실 때 처음 아신 것은 아닙니다.
평소에 베드로가 잘난 체하고 큰소리치며 우월감에 빠져 있었을 수도 있지만, 예수님은 이미 베드로라는 존재가 얼마나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인지 미리 알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약한 베드로를 변함없이 사랑하셨고, 인정해 주셨고, 은혜로 채워주셨다는 바로 이 사실이 베드로를 울게 만들었고, 통곡하게 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눈물은 부족한 자신에 대한 예수님의 변함없는 태도 때문이었습니다.
그 분의 변함없는 사랑이 그를 용서하고 또 용서해 주셨고, 차별 없는 은혜, 어떤 실수와 허물 속에서도 외면하지 않으시는 그 분의 구원의 은혜에 통곡하고 만 것입니다.
 
6. 복음송가 「왜 날 사랑하나」 의 가사는 이렇습니다.
사랑이 구주를 죽게 했네, 왜 날 사랑하나
겸손히 십자가 지시었네, 왜 날 사랑하나
그 손과 발 날 위해 찢기셨네, 왜 날 사랑하나
고난을 당하여 구원했네, 왜 날 사랑하나
내 대신 고통을 당하셨네, 왜 날 사랑하나
죄 용서 받을 수 없었는데, 왜 날 사랑하나.

베드로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할 때, 너무 부끄럽고 죄송하고 염치가 없어 울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경험한 이 사랑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요,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대신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난 뒤로 자신이 한번도 경험해 보지도 못했던 예수님의 귀한 사랑을 받고서도, 그것이 귀중한 줄 몰랐고 당연한 줄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분을 버리고 도망갔고, 그분을 모른다고 사람들 앞에서 부인하고, 죽음의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시는 예수님 곁에서 제 목숨 살기 위해서 벌벌 떨었던 그런 기막힌 자신의 배신의 모습을 통해, 제자로서의 실패를 통해, 처음으로 깨달았습니다.
닭 울음소리에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고, 그 분의 말씀 속에서 자신을 향한 사랑과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이었던가를 깨닫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베드로의 눈물이었고 통곡이었습니다.

7.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본문을 보면 베드로는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예수님이 심문 받으시는 장소에 찾아갔지만, 사람들은 금세 베드로의 정체를 알고 말았습니다.
한 사람의 나이 어린 여종이 베드로를 알아보았고, 또 다른 여종도 그가 예수님의 제자인 줄 알아보았고, 나중에는 많은 사람들이 틀림없이 예수님의 제자라고 단언하면서, 그의 갈릴리 지방의 말소리까지 증거로 내세웠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예수 믿는 우리는 몰라도, 사람들은 우리가 예수님의 사람이요 그리스도인임을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많은 순간에 사람들 앞에서 말과 행동으로 예수님을 부인하고 있습니까?
내가 모르면 남도 모를 것이라 생각하지만, 사람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람인 것을 증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그런 사실을 모르고 3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맹세까지 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습니다.
왜 베드로가 이렇게 까지 되고 말았습니까?
두려운 마음이 그를 그렇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두려운 마음이, 염려하는 마음이 사람으로 하여금 사실을 부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물질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를 거짓말하게 만들고, 염려하는 마음이 우리를 핑계하고 변명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또한 너무 바쁜 생활이나 세상에 대한 욕심과 정욕이 우리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처럼 위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8. 두려움에 떨면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나중에는 맹세하여 예수님을 저주한 베드로의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베드로를 알아본 사람들에게 그가 한 말이 무엇입니까?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70) 였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베드로의 이 말이 변명이 아니라 진실인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그는 두려움에 떨었고, 날씨도 쌀쌀했고, 예수님이 당하는 수욕을 시종일관 바라보고만 있어야 하는 무능한 자신에 대해 절망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나중에는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해버린, 부끄러운 자신의 행동에 베드로는 패닉상태에 빠져 있었는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불쌍한 베드로를 아무도 용서하지 않았고, 아무도 위로할 수 없는 도리어 베드로를 몰아붙이고 있는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이미 베드로를 용서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대로의 닭의 울음소리 때문입니다.
아마 닭이 병들어 울지 않았더라면 베드로는 정신병자가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닭 울음소리가 베드로로 하여금 제 정신이 들도록 만들었고, 그와 동시에 예수님의 하신 말씀이 생각난 것입니다.
본문의 마지막 구절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통곡, 그의 흘리는 눈물은 자신의 어리석은 행동에 대한 회개의 눈물이기도 했지만, 그는 그 흘리는 눈물 속에서 예수님의 용서, 예수님의 사랑을 새롭게 알기 시작한 것입니다.

9. 세상에서의 눈물은 약한 자와 패배자들이 흘리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러나 눈물이 없는 사람은 차갑고 매정하고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구구절절마다 넘치는 은혜로 가득한 시편의 내용은 그것을 쓴 사람들의 눈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시6"6), "주께서 저희를 눈물 양식으로 먹이시며 다량의 눈물을 마시게 하셨나이다"(80:5), 그래서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42:3) 고 했습니다.
히스기야 임금도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눈물로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왕하20:5) 라고 약속하였고, 그는 치료 되었습니다.
이 믿음의 사람들이 세상적으로 연약해서 울고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용서가 없이는 아무도 일어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시편 기자들의 눈물과 히스기야 임금의 눈물을 보셨고 그것을 귀하게 여기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넘어졌고, 실패했고, 인생으로는 완전히 망했지만, 주님을 향한 회개의 눈물이 그를 다시 살렸고 새롭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도 우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의 눈물을 귀하게 보신 것입니다.
눈물 속에서 다시 일어서는 베드로는 이전의 베드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뼛속 깊이 체험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위해 살다가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했습니다.

이러한 눈물이 우리에게 있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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