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1.3.최후의 만찬(마태복음 26:17-30)
[성경본문] 마태복음26:17-30개역개정
17.무교절의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유월절 음식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18.이르시되 성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이 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하시니
19.제자들이 예수께서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을 준비하였더라
20.저물 때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앉으셨더니
21.그들이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22.그들이 몹시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나는 아니지요
23.대답하여 이르시되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24.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25.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이르되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
26.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27.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28.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9.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30.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 산으로 나아가니라
| 최후의 만찬(마태복음 26:17-30/2013.11.3.오전) 1. 최후의 만찬이라고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과 나눈 마지막 만찬을 의미하고 있는데, 이 내용을 가지고 그린 그림은 많이 있습니다. 레오날드 다빈치 이전에도 이런 그림은 많이 있었습니다마는, 그 가운데서 우리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그림이 레오날드 다빈치가 1497년에 완성한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현재 이탈리아의 산타 마리아델레그라치 성당에 보관되어 있으며, 1980년에 이 성당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습니다. 이 그림 속에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제자들이 좌우에 각각 6명씩 앉아 있고, 그 당시까지 많이 사용하고 있었던 후광 효과, 즉 거룩함을 나타내는 빛의 테두리를 없애는 대신에 예수님의 뒤로 밝은 창문 3개를 그려 넣음으로 그분의 거룩성과 영광을 독특한 방법으로 표시하였고, 3개의 창문은 삼위일체를 의미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레오날드 다빈치는 본문 21-22절의 말씀을 가지고 이 그림을 그렸는데, 본문 21-22절에 기록된대로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는 예수님의 말씀에 놀라움으로 반응하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이 자세히 그려져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그림의 탁월성에 사로잡혀서 그림을 칭찬하고 그 기법에 놀라움을 표시하고 작가의 뛰어난 천재성에 감복하면서, 정작 이 그림의 주인공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심정으로 이 만찬에 임하셨고, 십자가의 고난을 앞둔 그 분에 대한 깊은 배려는 부족한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과 제자들간의 이 마지막 만찬을 통하여 그분이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음성을 듣기를 원합니다. 2. 만찬이라고 하면 하루 일과를 마친 후에 저녁에 가족들끼리 혹은 친구나 친지 등의 가까운 사람들끼리 모여 즐기는 식사를 말합니다. 식사를 나누면서 서로가 대화로 소통하고 정겨움을 나누는 귀한 자리입니다. 더구나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나누는 이 최후의 만찬은 몇 가지 우리에게 귀중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본문 18절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성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웠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안에 사는 아무게 라는 사람의 이름이 성경 어디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신 장소가 어디이며, 이 귀한 일을 위해 제 집을 제공하고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나누시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도록 준비하고 자신을 헌신한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성에 들어가시는 순간부터 그 일주일간에 일어난 중요한 사건들을 보면, 이 일을 위해 미리 준비된 무명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21장에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는 예수님을 태우고 간 나귀와 그 나귀의 새끼는 누구의 소유인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주가 쓰시겠다"(3)고 했더니 즉시 나귀를 보내었고, 예수님은 그것을 타시고 예루살렘 사람들의 호산나 호산나 외치는 환호 속에서 입성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 나귀의 주인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3. 또한 26장에서 예수님의 몸에 순전한 나누 향유를 부은 여인이 있습니다. 4복음서에 요한복음만 이 여인을 마리아라고 했지만, 나머지 복음서에는 이름이 없는 무명의 여인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그녀가 예수님의 몸에 부은 이 향유는 요12:5절에서 삼백 데나리온의 가치가 있다고 했습니다. 1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으로 지불하는 은전이었다고 하니, 그의 노동자의 1년 품삯에 해당하는 큰 재산입니다. 이렇게 귀한 일을 행한 이 여인을 공관복음(마태, 마가, 누가)은 한결같이 그녀의 이름을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요한복음에서 그녀의 이름이 나온 것을 보면, 이 성경 의 저자들은 이 여인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그 이름을 숨기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 의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지만, 추측해 보면 그녀가 예수님께 행한 이 일이 이름을 밝히기에는 너무 귀한 일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의 행한 일을 말하여 저를 기념하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는데, 그 행위가 증거될 때 마다 그녀의 이름이 나오는 것 보다는 무명의 여인으로 남아 있는 것이 더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유월절 만찬을 준비한 이 사람도 역시 이름이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이 사람들, 그분의 십자가의 희생을 위해서 또 다른 희생을 치룬 이 사람들이 십자가 후에 받을 영광이 너무도 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위해서 치룬 희생은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 받을 영광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이름을 의도적으로 밝히지 않는 것이 더 좋았기 때문입니다. 4. 본문 18절의 "성안 아무에게"의 이 「아무개」라는 말은 헬라어로 보면 「데이나」 인데, 그 앞에 관사 「톤」이 붙은 것은 이름을 말할 수 없거나 그 이름을 밝히는 것을 원치 않을 경우에 사용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은 주님을 섬기고, 그 섬김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밝히는 것을 원치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이미 말씀드린 대로 성경 저자들이 의도적으로 말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본인들이 스스로 이름을 드러내기를 원했는데도 불구하고 저자들이 일부러 감추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도 이 사람들의 의도를 존중해서 이름을 끝까지 밝히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름을 밝히고 자신의 의로운 행위를 선전함으로 이미 자기 상을 받아 버리는 것이 너무 아깝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귀한 일일수록 밝히고 드러내어 사람들에게 교훈을 삼는 것이 귀하다고 생각하지만, 기독교 2천년의 역사는 수많은 유명의 사람들 속에서도, 더 많은 무명의 사람들에 의해 그 복음이 오늘에 이른 것을 생각할 때, 지금도 우리 주위에는 "성안 아무에게"처럼 이름이 없는 무명의 사람들이 그야말로 이름도 빛도 없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섬기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6:3-4절에서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고 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행위를 자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은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만 자랑하고 그분의 은혜에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5. 그런데 지금은 사람들이 드러내어 놓고 자랑하고, 그 자랑을 제 스스로 기뻐하고 사람들은 그것을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의 여정에서 「톤 데이나」 라는 익명의 사람이 되는 일이 많으면 많을수록 하나님은 더 많은 영광을 받으시며, 익명으로 행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세상은 더욱 아름답고 하나님을 향한 감사가 넘치는 줄 믿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앞에 두고 그분을 위해 섬기고 희생하기를 기뻐한 이 사람들의 기쁨의 원천이 어디에 있습니까? 자신들의 희생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미리 준비된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톤 데이나」 라고 불리는 이런 무명의 사람들을 원하고 계십니다. 그들에게는 준비된 예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준비된 예물이 있고, 자신의 섬김과 희생을 도리어 감사하는 희생이 미리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백하기를 "생각건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 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준비된 사람이 되고, 그래서 예수님이 원하시는 시간과 장소에서 귀하게 쓰임 받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6. 계속해서 우리가 본문을 살펴보면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은 가롯유다의 배신으로 시작된 만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미 예수님을 팔아넘기기 위해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을 14-15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이 배신의 기회를 얻기 위해서 마지막 만찬에 참석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롯유다의 배신을 만찬 석상에서 밝히셨지만, 제자들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가롯유다는 종교지도자들에게 예수님을 넘겨주는 대가로 은 삼십을 받았습니다. 이 모든 것을 잘 알고 계시는 예수님은 가롯유다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셨고 어떻게 평가하고 있습니까? 24절에 보니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하셨고, 계속해서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가롯유다의 배신과는 관계없이 하나님이 정하신 뜻대로 십자가의 길을 가신다는 것을 말씀하고, 이 십자가의 길을 걷기로 예수님은 스스로 확정하고 계셨음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하나님의 뜻이었고, 예수님은 그 뜻에 순종함에 한 치의 흔들림도 없으셨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십자가 사건을 위해 무명의 「톤 데이나」 로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가롯유다는 분명한 제 이름을 가지고 예수님을 죽음에 팔아넘기는 배신의 행위에 스스로 자천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가롯유다를 향한 예수님의 평가가 무엇입니까?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 했" 다는 것입니다. 7. 가끔 보면 저 사람이 왜 사는지 알다가도 모를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 자신은 열심히 살고, 스스로 지혜롭고 능력 있는 사람처럼 행세하는데, 보기에 너무 딱하고 불쌍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존재가치라는 것이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사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가치는 삶의 목적에서 드러나고, 어떤 삶을 살았느냐에 따라 평가되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살았는데 돌아보면 남의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고, 속이고 빼앗고 잠시잠깐의 성공을 위해 온갖 어리석음에 빠졌다면, 그 열심은 제 자신을 멸망시키는데 더 빠른 걸음이 되고 만 것입니다. 가롯유다처럼 제 스스로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짐승의 마음을 가지고 살았다면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더라면 영원한 멸망도 없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배신이란 것이 무엇입니까? 믿고 신뢰하고 안심할 수 있는 상대에게 분하고 억울한 일 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기독교 신앙의 배신은 어떤 것입니까?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떠나 탐욕과 우상숭배에 빠지는 것을 말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신앙적인 배신은 예수님을 위해 내가 희생하고 헌신할 자리에 남을 밀어 넣고 제 자신은 쏙 빠지는 것을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위해 희생해야 하는데, 도리어 그 자리에 예수님을 밀어 넣고, 믿음의 형제들을 밀어 넣고는 도망가는 사람들이라 생각합니다. 가롯유다는 단 한번 뿐인 인생의 기회를 가장 불쌍하고 어리석은 일에 투자하고 말았습니다. 8.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일을 당하시면서 우리에게 어떤 본을 보여 주셨습니까? 26절에 보니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 다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의 배신으로 시작되는 십자가의 길이 얼마나 험하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인 줄 잘 아시면서도 결코 그것으로부터 도망가거나 숨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자기에게 주어진 얼마 남지 않은 너무도 짧은 시간을 사랑하는 제자들을 위해 귀하게 사용하셨습니다. 인생으로 말하면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코너에 몰렸고, 그래서 모든 것을 자포자기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평소처럼 행동하셨습니다. 그리고 27절에는 하나님을 향해 감사를 올렸습니다. 원망하고 낙심하고 불평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담담하게 자신의 해야 할 일을 다 하셨습니다. 26절에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받아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셨고, 27절에는 잔을 가지고 포도주를 나누시면서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 라고 하셨습니다.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것은 단순한 떡이나 포도주가 아니라 예수님 자신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유월절 어린양으로,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몸과 피로 온 인류를 대속하는 가장 귀한 일에 쓰임 받았기 때문입니다. 9. 그런데 마지막 만찬에서 제자들과 나눈 이 떡과 포도주 때문에 기독교회는 분열을 맛보는 아픔을 지금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유는 떡과 포도주를 받을 때 그것이 예수님의 살이 되고 피로 변한다는 소위 화체설을 주장하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그들의 생각도 참으로 귀하고 아름답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성찬에서 떡을 받고 잔을 받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기념하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떡을 받을 때, 날 위해 찢기고 못 박히고 상하신 그분의 희생을 생각하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는 마음을 가지고, 잔을 받을 때 그 분의 흘리신 보혈이 내 죄를 씻고 새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10. 우리의 가정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장소로 사용할 때, 가정의 존재 목적이 회복되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복 주시는 가정이 되는 줄 믿습니다. 내 자신을 하나님이 사용하시도록 언제 어디서나 주님이 부르실 때 달려가 쓰임받는 도구가 될 때, 우리는 가장 가치있고 소중한 존재가 되는 줄 믿습니다. 내 자녀를 하나님의 거룩한 도구로 쓰임 받을 수 있도록 말씀으로 양육하여 준비할 때 자녀들의 가는 길이 형통한 줄 믿습니다. 내가 가진 재물과 재능을 복음을 위해 아낌없이 내어 드릴 때, 우리는 더큰 축복의 세계로 더큰 능력의 세계로 올라가는 줄 믿습니다. 내가 드린 물질로 저주받은 영혼들이 구원받고, 교회가 힘을 얻는다면 우리 인생에 이보다 더한 영광이 없는 줄 믿습니다. 독립 운동가며 교육자이신 고당 조만식 선생은 "희생이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 고 했습니다. 그런 말씀을 하신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내가 죽어야 나라가 살고, 내가 먼저 죽어야 민족이 살고, 내가 죽어야 가정이 화목하고 내가 죽어야 교회가 살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어야 내 안에 주님이 살며, 내가 죽는 것이 십자가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은 예수님과 더불어 우리가 함께 희생하고, 함께 죽을 때 십자가의 길은 슬픈 죽음의 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복된 길이요 영원토록 영광을 돌리는 길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과의 만찬은 비록 배신으로 시작된 만찬이지만, 축복하고 감사하며 마침내 함께 찬미함으로 나아가는 만찬이 되었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