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2.19.나의 멍에(마태복음 11:28-30)

[성경본문] 마태복음11:28-30개역개정

28.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나의 멍에(마태복음 11:28-30/2012.2.19.오전)

1. 지난 11일에 세계적인 팝 가수 휘트니 엘리자베드 휴스튼이 48살로 사망했다고 합니다.
14살에 미국 뉴저지의 동네 교회에서 성가대를 시작하면서 음악의 재질이 뛰어난 것이 인정되어 1985년, 18살에 가수로 데뷔해 그래미상 6번, 에미상 2번 등의 415번의 수상 경력을 가지고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로 가수로서의 온갖 명예와 부귀를 다 누린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따라갈 수 없을 정도의 고음과 저음을 오고가면서 아름다운 목소리로 많은 팬들을 사로잡았고, 많은 사람들과 가수들에게도 감화를 주었던 사람입니다.
한 때는 영화 보디가드에도 주인공으로 출연하였고, 그 때 부른 주제가인 I will always love you(나는 널 언제나 사랑해)가 유명합니다.
그러나 2006년 남편과 이혼하면서 마약과 알콜 중독에 시달리면서 고통의 세월의 연속이었습니다. 2010년 2월에는 오사카성 공원 홀에 와서 공연을 했지만 팬들의 야유를 받으며 재기에 실패했고, 마지막에는 파산으로 인해 100달러(8천엔)가 없어 주위 사람들에게 빌려 달라고 할 정도로 어려웠고 이런 사실을 알게 된 많은 팬들이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며칠 전에 뉴저지의 뉴어크 교회에서 장례식을 하고 그녀는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녀는 마약이나 알콜 중독이나 심장마비로 죽은 것이 아니라 인생에 지쳐서 더 이상 지탱할 힘이 없어 죽은 것입니다.
세계적인 가수로서의 화려한 무대 뒤에는 언제나 외롭고 고통스럽고 홀로 지고 가야만 인생의 무거운 짐이 있었고 마침내 그 외로움이며 인생의 짐을 제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고 만 것입니다. 이런 일이 어찌 유명한 가수 한 사람만의 이야기이겠습니까?
우리 주위에는 삶에 지쳐 있고, 삶에 찌들대로 찌들어버린 그래서 불쌍한 모습을 한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기 마련입니다.

2. 즐거워야 할 인생이 피곤과 짜증에 범벅이 되어 있고, 기쁨과 감사로 충만해야 할 인생이 분노와 고통과 공허에 사로잡혀 있으며, 여유로워야 할 삶이 물질적인 빈곤으로 인한 쪼들림과 시간에 쫓겨 마치 도망자처럼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아름답고 원대한 제 스스로의 목적을 향해 달려가고 있지만,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목적한 바를 이루지 못하고 도중에 타협하거나 좌절하거나 포기하면서 꿈을 접기도 하고, 극소수의 사람들은 성공을 손에 쥐었다 해도 그 성공을 잘못 관리해서 더 큰 불행을 겪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 가운데 과연 누가 인생의 성공자라고 할 수 있으며, 과연 누가 남들 앞에서 제 인생을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가정에도 보면, 결혼해서 아이가 출산하면 모두 기뻐하지만 그 기쁨도 잠깐이고 시간이 지나갈수록 자녀 양육이라는 큰 무거운 짐이 고통스럽고 심하면 부모의 입에서 자식이 원수라는 말도 나오고 있습니다.
왜 우리 인생이 이 모양입니까? 왜 우리가 우리의 자녀들이 이렇게 살아야만 합니까?
과연 무엇이 잘못되었단 말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사람을 만나면 반갑고 고마워야 하는데, 회피하고 도망가고 외면합니다.
교회 오면 즐거워야 하는데 도살장에 끌려온 소처럼 그런 표정으로 앉아 있습니다.
인생이 10대, 20대에는 많은 꿈에 부풀어 있었는데 50대, 60대가 되면서 그 많은 꿈은 온데간데 없고, 연약하고 불쌍한 모습에 어두운 그림자만 남는 것이 인생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의 말씀에서 쉼을 얻는 인생의 의미가 무엇이며,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인생의 고통과 무거운 짐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으며, 하나님이 원래 인간을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던 그 아름다운 모습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는지 알아보면서, 정말 기쁘고 보람되고 아름답고 가치 있는 그런 인생을 회복하기를 바랍니다.

3. 헨리 나우웬이라고 하면 한국 교회와 목회자들에게는 가장 친근하고 많은 영향력을 준 천주교 신부이며 신학자입니다.
저는 이 사람의 책을 손에 쥐면 손에서 떼기가 아쉬울 정도로 내용이 간결하고 아름답고 진실된 느낌이었습니다.
그는 네덜란드의 부유한 명문 가정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신학교수로서 사역하면서 전 세계를 돌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영적인 감화를 끼친 정말 훌륭한 신학자요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러나 1996년 9월 21일 심장마비로 사망할 때 까지 그도 늘 지치고 외롭고 두려운 인생을 살았다고 고백했습니다.
실제는 전 세계 가는 곳마다 많은 친구들이 있었고, 어떤 종교나 종파나 인종이나 언어에 관계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를 지지하고 그의 도움이 되어 주었지만, 그도 사람들로부터 거부당하는 것이 두려웠고 한 때는 심한 우울증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나우웬의 경우는 인간의 연약함과 인간이 가진 갈망이 무엇이며 갈급한 영혼을 어떻게 채워주고 만족시켜 줄 수 있는지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도리어 고독을 찾아 떠나기도 했고, 고통과 두려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그것들을 자신 안에 차곡차곡 담아 두었던 신앙과 신학을 이용하여 감동과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킬 줄 아는 지혜로운 사람이요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세계적인 가수나 세계적인 신학자나 아름다운 신앙인이나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인생의 짐이 있고 멍에가 있기 마련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멍에를 견디지 못하고 다른 잘못된 방법으로 도피하거나 자포자기 함으로 인생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멍에를 도리어 자신의 내면에 쌓아온 신앙이나 사상이나 학문이나 능력들을 이용하여 아름다운 작품으로 승화시키기도 하는 것입니다.

4.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이 우리를 초청하고 계시는 장면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인생에게 있어 참된 쉼이란 없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사실 인생에 쉼이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당장 자식들과 먹고 살아야 하고, 달이면 달마다 밀려들어오는 공과금의 지불이며 예기치 못한 사고나 문제로 인생의 한 귀퉁이가 뻥하고 터져 버린 그 구멍을 메꾸지 못하면 모든 것이 끝장 날 것 같은데 어떻게 쉴 수 있습니까?
생각해보면 내 스스로의 힘으로는 쉰다는 것이 언감생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늘 우리를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일 주일에 한 번이라도 교회 나와서 예배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대단한 일이요 훌륭한 결단입니다.
그 정도로 우리는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왜 우리의 삶이 이 모양이 되고 말았습니까?
무엇이 우리를 쉬지 못하게 만들고 무엇이 우리를 두렵게 만들고 무엇이 우리에게 무거운 멍에를 지우고 있습니까? 그것은 한 마디로 죄의 멍에입니다.        
죄가 우리를 쉬지 못하게 만들고, 죄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고, 죄가 우리를 고통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내가 지은 죄의 짐이 내 인생에 쉼도 평안도 아름다운 꿈도 용기도 다 빼앗아 가는 것입니다.
저는 나이 50을 넘기면서 새로운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의롭지 못한 사람들의 행위를 보면서 특히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잘못된 삶의 모습을 보면서 두려운 마음이 생기기기 시작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내 안에서 너무 생생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죄를 지으면서 죄가 죄 된 줄도 모르고 용감하게 죄인으로 사는 사람들이나, 알면서도 짐짓 모르는 채 하나님 기뻐하시지 않는 일을 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잠시 잠깐 후면 받을 심판을 생각하면 두려운 것입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죄가 무서운 줄 알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려운 일이지만 나만 이라도 잘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5. 죄는 우리가 가진 평안과 기쁨과 감사를 빼앗아 갑니다.
죄는 우리로 하여금 좇아오는 자가 없어도 두려운 마음을 주어 안절부절못하게 만듭니다.
죄를 품고 있으면 미래가 캄캄해지고, 죄는 인생의 무거운 멍에가 되어 도중에 넘어지고 무너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죄는 우리에게 잠시 잠간의 쾌락은 줄 수 있어도 참된 안식은 주지 못합니다.
죄는 우리가 가야만 하는 아버지의 나라 천국에 가는 길은 막고 영원한 형벌의 지옥의 문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시간에 우리를 오라고 초청하고 계십니다.
와서 무엇 하라는 것입니까? 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무엇 때문에 쉬지 못하고 무엇 때문에 불안해 하고, 무엇 때문에 고통 하는지 너무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를 오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 내게로 오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스스로에게는 죄를 이길 힘도 없으며 죄 문제를 해결할 방법도 없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초청에 응답하여 그에게로 나온 것입니다.
죄 짐을 지고서는 짐승처럼 살 수는 있을지 몰라도 사람 답게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죄 짐을 지고 예수님께로 나아오면 사는 길이 열리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지금부터 영원에 이르는 참된 쉼을 주십니다.
왜 예수님만이 우리 인생에게 참된 쉼을 주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는 저와 여러분의 죄 짐을 대신 지시고 우리 대신에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저와 여러분의 인생의 멍에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해결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죽음으로 우리의 죄가 용서받았습니다.
그의 죽음으로 우리 인생의 모든 멍에가 벗겨졌습니다.
그의 죽음으로 우리의 영과 육신에 참된 쉼을 얻게 되었습니다.

6. 그런데 우리가 언 듯 생각해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 한 가지 있습니다.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는 말씀입니다.
인생의 무거운 멍에 때문에 이 짐 좀 벗기 위해서 예수님께로 나아왔는데,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도리어 자신의 짐인 예수님의 멍에를 메라는 것입니다.
과연 누구 이 사실에 동의하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자기 멍에 위에 예수님의 멍에까지 멜 사람이 있습니까?
지금 메고 있는 것도 힘들어 죽을 것 같은데, 예수님은 그런 우리를 아예 짐에 깔려 압사 시킬 작정인가 봅니다.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 뿐만이 아닙니다.
굉장히 고약한 사실 한 가지가 또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내게 배우라」는 것 바로 이것입니다.
젊은 사람들이야 배우는데 취미를 가진 사람도 많고, 왕성한 호기심에 이것저것 배워서 마음의 양식도 삼고, 좋은 기술도 배워서 세상살이에 도움이 되려고 합니다마는, 나이가 점점 들기 시작하면 나이를 먹는 것만큼 점점 배움에서 멀어지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교회에서도 제가 사람들을 붙들고 성경 공부를 하고 싶어도 배우려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제 자신은 물론이고 지금 우리 교회의 권사님, 집사님들이 만반의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말씀을 배우겠다는 사람은 없고, 학습 받고, 세례 받고, 제자 훈련 같은 성경 공부 좀 하자고 하면 거머리 달라붙는 줄 알고 도망갑니다.
주일 예배 한 시간 겨우 나오는데 또 한 시간 더 붙잡힐 것 생각해보면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한 어조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쉼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7. 29절의 말씀에서 분명해진 사실 한 가지가 있습니다.
배우지 않으면 쉼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에게서 배우지 않으면 언제까지나 쉼은 오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교회 열심히 다니면서도 쉼은 없고, 세월이 가면서 도리어 내 등과 어깨에는 종교적인 짐만 잔뜩 짊어지게 되니 신앙생활이 피곤하고 그래서 시험에 들고 넘어지는 것입니다.
신앙도 잘못 배우면 패가망신입니다. 이단이나 사이비가 그렇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교회에서 말씀을 배울 때 예수님에게서 배우지 않고, 사람들에게서 교회의 전통과 규율과 신학의 껍데기만 배우니 옛날 사람들이나 지금 사람들이나 교회에서 하는 일이 똑같고 생각하는 것이 똑같고 그래서 결과도 늘 똑같은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3.1운동 할 때만 해도 교회는 시대를 앞서 달려갔습니다.
이제 10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는데 그 사이에 교회는 골동품 가게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누가 교회에 소망을 두고, 누가 교회에 관심을 가지고 찾아 오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목사도 장로도 권사도 집사도 교사도 아닌 「내게 배우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가르치는 교사가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까?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33년 생애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예수님의 인격과 예수님의 삶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온유한 마음, 그 마음이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고 원수도 사랑하게 하셨습니다.
온유한 마음이 분노하는 대신에 용서와 이해를 베푸셨고, 온유한 마음이 정죄하는 대신에 한 편 십자가 강도까지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겸손한 마음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게 하였고, 겸손한 마음이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 지게 하셨습니다. 겸손한 마음이 모든 유혹과 고통을 이기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배울 것이 성경지식이 아니라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요 모범입니다.
    
8. 온유와 겸손만으로도 우리 마음은 쉼을 얻을 수 있으며, 온유와 겸손한 마음만 있으면 하나님의 뜻이 내 삶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사실 본문에서 쉰다는 말의 의미는 육체적인 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쉼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혼의 쉼이 육신의 쉼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있습니다.
사도요한은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2)고 했는데, 이것은 영혼이 먼저 잘되어야 육신이 잘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조상들이 청개구리라서 그런지 늘 거꾸로만 생각만 합니다.
육신이 잘 되면 마음도 편하고 영혼도 안식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돈으로 영혼의 양식을 삼으려 하고, 세상 쾌락으로 천국을 누리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을 저 앞에서 기다리는 것이 무엇입니까?
영원한 고통과 영원한 수치뿐입니다.
예수님도 세상에 계실 때에는 많이 외로웠고, 많은 고통을 당하셨고 그래서 많이 우셨습니다(히5:7).
예수님은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시험을 받으셨고 연약하셨습니다.
우리만 외로운 것 아닙니다. 우리만 고통스러운 것 아닙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위에서 모든 사람들로부터 버림 당하셨고, 마지막에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버림 당하셨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얼마나 괴로우셨으면,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15:34)하고 절규하셨습니다.

9.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환란과 고난 속에서 신앙과 삶이 더욱 승화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에도 많은 어려움을 통해 인내하게 하셨고, 많은 세월 동안의 신앙의 굴곡을 통해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셨습니다.
모세도 그랬습니다. 다윗도 그랬습니다. 욥의 경우는 참담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영웅들은 고난 속에서 승리했고, 여러 가지의 시험 속에서 도리어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으며, 남들보다 더 많은 아픔과 고독과 더 많은 시험을 통해 인생의 무거운 짐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위대한 일꾼들이 되었습니다.
한국 속담에 사랑하는 자식은 회초리로 다스리지만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준다고 했습니다.
나의 인생의 멍에, 나의 죄의 멍에는 나를 주저앉아 버리게 만들지만, 우리가 이 무거운 짐을 지고 예수님께로 가면, 예수님은 우리의 짐을 대신 져 주시고 당신께서 지셨던 그 멍에를 우리 어깨에 지워주시고 앞서 가시면서 우리를 따라 오게 하시는데, 30절에서,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 다고 말씀하신 대로, 나의 멍에란 우리가 즐겁게 지고 갈 사랑의 멍에요 사명의 멍에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상급이 있는 복된 멍에인 줄 믿습니다.
오늘부터 나의 고통스러운 인생의 멍에는 주님께 맡기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제자된 자로서의 사명의 멍에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르는 복되고 행복한 제자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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