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0.14.가장 어려운 일(마태복음 18:21-35)

[성경본문] 마태복음18:21-35개역개정

21.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23.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26.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32.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35.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가장 어려운 일(마태복음 18:21-35/2012.10.14.오전)

1. 고상돈 하면 대한민국 사람으로 최초로 에베레스트 산을 정복한 사람입니다.
1977년 9월 15일, 그는 8,848미터의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의 등정에 성공함으로 세계적인 산악인으로 명성을 떨치고 대한민국의 국위를 선양하고 한국 사람들의 가슴속에 꿈을 심어주었습니다.
그로부터  만 2년 후에 알래스카의 6,191미터의 매킨리 봉을 정복하고 하산하는 도중에 800미터의 빙벽 아래로 추락함으로 그는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때 그의 나이는 불과 31살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산악인으로 더 오를 곳이 없는 세계 최고의 정상에 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국민들 앞에 남긴 명언은, 「여기는 정상, 더 오를 곳이 없습니다!」 이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오를 수 없는 최고봉의 산을 정복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아름답고 귀한 일이지만, 아름답고 귀한 만큼 이 일에 도전하는 사람은 제 자신의 생명을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도 없이 많은 아름다운 이야기며 신화와 같은 소식을 듣고 있습니다.
1965년 10월 4일, 강 재구 소령처럼 터지는 수류탄에 제 몸을 던져 부하들의 생명을 구한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그 때 그의 나이 28살이었습니다.
2001년 1월 26일, 동경의 신오쿠보 역에서 전동차가 역구내로 들어오고 있을 때, 술에 취한 회사원이 선로에 떨어진 것을 보고 뛰어 내려가 그 사람의 생명을 구하고 대신 열차에 치어 숨진 26살의 유학생 이 수현씨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런 사건들은 세월이 지나가도 사람들이 좀처럼 잊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훌륭하고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일이지만 그러나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제 생명을 걸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2.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저도 어릴 때부터 수도 없이 이런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도 남을 위해 제 생명을 주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면 그렇지 못한 제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이유는 그렇게 산다는 것이 그렇게 간단하고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그런 자세와 그런 각오를 가지지 않고는 제 목숨을 대신하여 남의 생명을 구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사업하는 것도 어렵고, 월급쟁이로 살아가는 것도 어렵고, 공부하는 것도 어렵고, 자녀를 출산해서 양육하는 것도 어렵고, 주위사람들과 사랑하며 평화롭게 사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남의 나라에 와서 뿌리를 내리면서 산다는 것도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인간이란 존재가 생명을 이어간다는 사실 하나가 얼마나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인지 모를 일입니다.
그러니 생명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하루하루 그 생명을 연명해 나간다는 그것이 얼마나 힘들고 모질고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죽하면 예수님도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마6:34)다고 하셨겠습니까?
다시 한 번 물어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그것은 남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3. 지난 10일 동경의 세따가야꾸의 한 주택가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는데, 86세의 도꾸나가라는 노인이 바로 이웃의 62살의 독신 여성인 구보상을 사무라이들이 사용하던 일본도로 찔러 죽이고 자신도 자살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원인은 좁은 도로에 구보상이 화분을 방치해 둔 것이 싸움의 원인이 되었고, 그것이 2년 이상 반복되면서 오늘의 이웃끼리의 살인사건까지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인간에게 고통을 주고 실패를 주고 후회하도록 만들고, 그래서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남을 용서하지 못해서 일어난 결과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께 용서에 대한 것을 묻고 있습니다.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21).
제 생각에는 예수님의 제자들끼리도 제법 다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누가 더 높은가를 놓고 길을 가면서도 다툰 것을 보면, 한 집에 형제들끼리도 한 주간이면 수도 없이 다투는 것이 보통인데, 천사도 아닌 남남끼리 모여 12명씩이나 모여 함께 살고 있는 제자들이고 보니 3년 동안 적지 않게 싸웠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런 문제를 어떤 제도적이고 법적인 장치로 해결해 보려고 예수님께 몇 번이나 용서하는 것이 좋은지 질문한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는 과거 이십 수년쯤 전에 한두 번 교인들끼리 다툼이 있은 뒤로 지금까지 한 번도 교인끼리 싸우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마는, 일반적으로 보면 교인들끼리도 잘 싸우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유대사회에서 랍비들은 같은 사람이 같은 죄를 반복할 때 3번까지 용서하면 충분한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 한계선을 넘어가면 율법으로 엄격하게 다스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생각해 낸 것이 일곱 번쯤 용서하면 충분할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 할지니라」(22) 는 것입니다.

4. 우리 가운데 제일 크고 심각한 문제가 있다면 남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용서를 못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혼하고, 형제가 형제를 죽이고, 친구가 이웃이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죽고 못 사는 사이라도 내 감정에 조금만 손상이 오고, 섭섭한 마음이 들면 그렇게 가깝게 느껴졌던 인간관계가 하루아침에 식어져 버립니다.
이런 섭섭한 마음이 쌓이고 쌓이면 나중에는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남을 용서하지 못합니까?
왜 우리는 남의 실수나 허물을 이해하고 용납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그것은 내 안에 숨어 있는 교만한 마음에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작은 일에도 억울하고 분통이 터지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형제가 자라면서 싸우는 것도 교만한 마음, 욕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결혼한 부부사이도 보면 이쪽은 상대방에게 함부로 대하면서 상대방이 화를 내면 그만한 것도 못 참아 준다고 도리어 화를 내고 공격합니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부부 사이에도 조심할 것은 조심하고 예를 갖추는 일에 서로가 신경을 썼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네가 날 좋아한다면 이 정도는 당연히 참아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식입니다. 그러다보니 용서가 안 되는 것입니다.
용서가 안 되는 교만한 마음의 근본에 무엇이 있습니까? 자기 사랑입니다.
자기 사랑의 끝이 어디입니까? 분노의 칼입니다.
나중에는 이것으로 모든 사람을 찌르고 베고 결국에는 사랑이 아니라 피투성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첫째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고 둘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22:37,39)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그 어디에도 네 자신을 사랑하라는 것은 없습니다.
네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 남을 희생하고 사랑을 강요하라는 것도 없습니다.
오직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는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뿐입니다.

5. 남을 사랑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고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더 어려운 것, 사랑하는 것 보다 더 어려운 것,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을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행할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남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사랑하는 것 보다 더 어려운 것이 용서하는 일인 것 같습니다.
본문에 예수님이 용서에 대한 비유로 말씀하신 내용을 보면 용서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평생 노력해도 값을 수 없는 엄청난 빚을 진 종 하나가 있었는데 임금은 그를 불쌍히 여긴 나머지 그 빚을 없는 것으로 여기고 전액 탕감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탕감 받은 이 종이 제게서 빌려간 백 데나리온의 돈을 친구가 갚지 않는다고 길거리에서 온갖 수모를 주고는 고발하여 감옥에 가두고 말았습니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임금은 대노하여 그를 잡아다가 심문하면서 탕감 받은 것을 취소하고 빚을 다 갚을 때 까지 너도 너의 친구처럼 옥에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무엇입니까?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왜 우리가 남을 용서할 수 없는가하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마음에 나만 잘났고 내 한 사람 편안하고 내 한 사람 잘되면, 남이야 어찌되었던 나만 잘되면 그것이 성공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이 용서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탕감 받은 종의 이야기를 하고 계십니까?
35절에 보니 그 답이 있습니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는 것입니다.
너도 용서를 받았으니 남을 용서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6. 문제는 우리가 용서에 대한 설교를 수도 없이 들었고, 사람에게 용서가 필요한 줄 잘 알면서도 왜 우리는 용서가 잘 안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용서할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용서의 힘이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어떻게 해야 우리도 남을 용서하면서 살 수 있습니까?
원래 우리는 남을 용서할 수 있는 힘이 없는 사람들이고, 남을 용서할 수 있는 자격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 분의 사랑과 희생을 통해 참 사랑이 무엇이고 용서가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삶 자체가 용서하는 삶이었고, 그 분의 공생애가 남을 용서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라고 말은 하면서, 임금에게 탕감 받은 종처럼 용서받은 것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많은데, 정작 남을 용서하는데 얼마나 인색하였습니까?
왜 하나님은 아들을 십자가에서 희생하시면서 까지 아무 가치도 없는 우리를 용서해 주셨습니까?
그것은 우리도 남을 용서하면서 살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 아버지를 대신해서 할 수 있는 일들 중에 가장 큰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남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심판하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고유 권한이시고 우리는 무조건 용서하면 됩니다.
본문에 나오는 이 종처럼 세상에서 불쌍한 자는 없을 것입니다.
왜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용서받는 것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얻을 수 있는 은혜라고 말할 수 있지만, 남을 용서하는 것은 내 생각, 내 의지를 따라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7. 교회가 무엇입니까?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하나로 묶었기에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 모두가 예외 없이 하나같이 하나님의 용서를 입었고,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그 분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용서가 다 사라진다고 하여도 교회 안에는 용서가 넘쳐야 할 것은 예수님이 이 일을 위해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남을 용서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내 힘으로는 내 의지로는 용서할 수 없어도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는 우리가 어떤 사람도 어떤 행위도 용서할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왜냐하면 용서의 힘은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과 은혜 안에서 시작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베드로는 말하기를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4:8)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남을 용서하는 이 용서가 험한 세상에서 우리를 이기게 하는 힘이 되는 줄 믿습니다.
남을 용서하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지만 우리의 용서하는 이 행위 속에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줄 믿습니다.
찬송가 373장 「세상 모두 사랑 없어」 를 함께 부르면서 이 설교를 마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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