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22.영적전쟁(마태복음 10:34-42)

[성경본문] 마태복음10:34-42개역개정

34.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38.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39.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40.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41.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42.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영적전쟁(마태복음 10:34-42/2012.1.22.오전)
1. 지난 1월20일, 아사히신문에 눈길을 끄는 두 가지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하나는 미국 이스트만 코닥이라는 필름회사가 파탄이 난 것입니다. 12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한 때는 95%의 세계 시장을 장악하던 세계적인 필름회사가 몰락한 것입니다.
몰락의 이유는 디지털 시대의 변화에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라이벌 회사인 후지필름은 디지털화로 필름산업이 사양길을 걷자, 지금까지 쌓아온 필름 기술을 새로운 분야에 적용 시키면서 2004년에 재창업을 시도했고, 지금은 세계시장의 80%를 장악할 정도로 성장했다고 합니다.
또 다른 조그만 기사는 39살의 기꾸마 유끼오라는 여성을 소개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녀는 후지테레비의 아나운서로 1998년 9월의 어느 날 아침 생방송을 진행하던 중 5층 난간에서 떨어져 척추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고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런 불행 속에 자신을 굴복시킨 것이 아니라 자신과의 싸움을 통해 육체의 고통을 이기고 다시 건강을 회복하고 선택한 것은 제 2의 인생을 걷기로 한 것입니다.
아나운서라는 직업을 버리고 변호사의 길을 걷기 위해 이후 5년 동안 하루 16시간씩 공부하면서 두 번째 도전에서 변호사자격을 취득하고, 그 5년 동안의 자신과의 치열했던 싸움을 내용으로 하는 「내가 변호사가 되기까지」(문예춘추)라는 책을 출판한 것입니다.
이 두 가지의 기사는 그것이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회사의 이야기이든 개인의 이야기이든 공통된 점은 고난을 극복하기까지의 싸움에서 이기느냐 지느냐의 문제입니다.
세상살이라는 것이 그것이 개인이든, 단체이든, 민족이든지 크고 작은 전쟁터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자신과의 싸움이든지 경쟁자와의 싸움이든지 이 전쟁에서 패하면 아무리 거대한 기업이라도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그것이 개인의 내적인 싸움이라도 싸워 이기면 더 놀라운 새로운 미래가 열린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그런 전쟁터에서 살고 있습니다.

2. 그러나 저와 여러분에게는 또 다른 전쟁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적전쟁으로 사람들이 언 듯 보기에는 대수롭지 않은 싸움 같지만, 이보다 더 치열하고 중요하고 처절한 전쟁은 없다는 사실입니다.
왜냐면 만일 우리가 이 싸움에서 패한다면 우리에게는 영원토록 미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영적 전쟁을 대수롭지 않은 싸움으로 여기기 때문에, 이 전쟁에서 연전연패하면서 불쌍하도록 무능한 모습을 하고, 교회 또한 이런 사람들로 인하여 부패하고 그래서 세상의 조롱거리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장차 오실 메시아를 통해 자신들의 왕국이 정치적인 해방과 천국 같은 복되고 풍요로운 세상을 맞이할 수 있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단순한 육신적인 문제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누누이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런 생각의 차이 때문에 예수님과 종교지도자들 사이에는 끊임없이 마찰이 있었고,  그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신들의 손으로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 박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주시는 통치자(사52:7)로 평화의 왕으로 표현하였고, 예수님 스스로도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마5:9)다고 하셨는데, 본문의 말씀을 보면 전연 의외의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4-35절에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고 하시면서,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그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함」이라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화평의 왕이 아니라 분쟁의 원인이요, 싸움 대장이라는 말입니까?
아무리 봐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분쟁하기 위해, 전쟁을 치르기 위해 오신 것처럼 보입니다. 화평을 위해 오신 분이 어째서 분쟁을 일으켜야 합니까?  

3. 그 답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탄생하시던 때를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이 강탄하실 때, 천사가 전하는 말이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눅2:14)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헤롯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두려워하여 예수를 죽일 목적으로 유대 땅의 2살 이하의 모든 어린아이들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화평을 위해 오셨는데 현실은 피비린내 나는 살육이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바로 이런 죄악의 어두운 세력을 몰아내고, 모든 사람들을 죄와 분쟁과 고통과 저주에서 해방하기 위함이었고, 이것을 저지하려는 사단의 세력이 헤롯을 통해 대량 살육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평안은 어떻게 임하는 것입니까?
참 평안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싸워 쟁취하지 아니하면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경찰의 존재가 치안을 담당하고 법질서를 지켜 시민을 안전하고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보호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끔 경찰들이 전쟁을 선포합니다.
이것은 사회 속에 뿌리 깊은 악의 세력을 뽑아내기 위해서 전쟁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먀약과의 전쟁, 폭력단과의 전쟁 등이 그렇습니다.
1990년대만 해도 일본은 야쿠자세력이 막강했지만 경찰과 시민이 힘을 합해 전쟁을 선포하고, 그 세력들을 몰아내고 국가도 법을 제정하여 악의 세력들이 사회 속에서 뿌리 내리지 못하도록 함으로 지금은 그 세력이 많이 약체화되었습니다.
악의 세력을 뿌리 뽑지 않으면 참 자유와 평화를 얻을 수 없으며, 이 일을 위해서는 스스로가 희생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만일에 시민들이 악의 세력의 협박에 굴복하여 힘과 용기를 잃어버린다면 그런 시민, 개인에게 남는 것는 자유가 아니라 노예며 평화가 아니라 굴종만 있을 뿐입니다.

4. 본문의 말씀은 그런 의미에서 영적 전쟁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나아가서 복음을 전하는데 순순히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때리고 가두고 협박해서 마침내 죽음으로 몰아가는 그런 일들이 샬롬, 즉 평화를 외치는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런 영적 전쟁으로 인해 당하는 모든 어려움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10:24-25절의 말씀도 집 주인 되신 예수님조차도 사람들이 귀신의 왕이라고 공격하는데 하물며 나의 제자된 너희들이야 핍박을 당하는 것이 너무 당연하다는 말씀입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신학자 중의 한 사람인 고 박윤선 목사님은 부친상을 당하자 기독교식으로 장례식을 치루는데 이것을 본 모친이 통곡하면서, 아들을 둘이나 낳았는데 이놈들이 아비를 굶기고 있다고 하면서 제사상을 차려놓고 제사하려고 다시 통곡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 때 박윤선 목사님은 제사상의 부친 사진을 들고 몰래 나가자 모친이 칼을 들고 아들을 죽인다고 쫓아오기에 수수밭으로 도망갔다고 합니다.
무슨 방법을 써도 모친을 설득하기 어려워서 밤에 몰래 아내를 데리고 도망가서 그 아내를 보성여학교에 입학을 시켜 그곳에서 먹고 자면서 공부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이게 무엇입니까? 한 가정 안에서 일어나는 영적인 전쟁입니다.
저의 은사이신 고오베 개혁파신학교의 하시모토 교장선생님도 부친상을 당하자 장례식을 준비하는 사이에 얼른 기독교식으로 먼저 장례를 치루고 집을 도망 나왔고, 그 길로 신학자로 목회자로의 길을 걸으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영적으로 연약할 대로 연약해진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적인 전쟁을 치르려하니 따라오는 희생이 너무 크기 때문에 차라리 내가 양보해서 잠시잠깐이라도 내 가정이 화평 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죽으면 죽으리라는 일사각오가 없이는 참 신앙이란 있을 수 없으며, 내 한사람의 희생을 각오하는 영적 전쟁이 없이는 가정이 복음화 되기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5. 우리가 가정복음화를 이루기 위해서 신사협정으로는 아무런 결과를 얻을 수 없으며, 도리어 우리 신앙마저도 연약해지고, 그 결과 모두 고난 속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합니까?
공중권세 잡은 사단의 세력이 자신들의 수중에 있는 생명들을 간단히 내어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다른 믿는 사람들까지 할 수만 있으면 미혹하여 믿음을 파괴하여 영원히 멸망시키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식구들에게 전도하면 반발하고 핑계하고, 심하면 핍박을 쏟아 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화란 그것이 가정이든지 사회, 국가임을 막론하고 영적전쟁을 치룰 각오를 하지 아니하고는 이루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실제로 성도들의 가정을 보면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들이 조상제사에서 갈리고, 주일 성수에서 대립하고, 십일조에서 분쟁하고, 심지어 도덕적이 문제에서도 가는 길이 다릅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35절의 「불화하게 한다」는 말을 통해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은 둘로 나뉜다는 의미로 마치 물과 기름처럼 나뉘는 것을 뜻하고 있습니다.
한 지붕 아래서 피를 나눈 형제 부모라도 생명의 복음 앞에서는 물과 기름 꼴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를 가정파괴범이라고 하고, 자신들의 신앙만이 옳다고 고집하는 독선주의자들이라고 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누가 가정파괴범이고 누가 세상을 고통하게 만들며 누가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고 있습니까?
불신앙과 죄악의 배후에서 사단이 우리 자녀들과 불신앙의 식구들의 생각을 망치고 장래와 삶을 망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사단이 어둠을 비치는 빛을 거부하고 십자가 복음 앞에서 마지막 까지 저항하고 발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본문을 통해 「사람의 원수가 집안 식구」 라고 하신 것입니다.

6. 계속해서 37절에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말씀은, 우리가 자식된 도리로서 부모를 사랑하고 공경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요 이 일은 십계명에서도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사항이지만, 문제는 「나보다」라는 비교급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이후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자녀된 자의 신분과, 그 위에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십자가를 지고 나아가야만 하는 사명과 직분이 혈육관계의 신분보다 더 귀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기 때문에 부모 자식간의 애정문제의 갈등이나 일치하지 못하고 불화하는 그런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도리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참 사랑을 깨닫고 보면 사랑하고 은혜 베풀고 불쌍히 여기는 그런 마음이 부모 자식을 초월해서 온 이웃사람들에게도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나눌 수 있기 때문에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더 아름답고 고귀한 사랑으로 가정을 충만히 채울 수 있는 줄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우선순위를 생각해 볼 때 먼저 주어진 직분이나 신분보다는 나중에 주어진 신분이나 직분, 그리고 사명이 더 귀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어릴 때 자녀된 자의 신분이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결혼을 하면 자녀된 신분 보다는 부모된 신분이 더 귀하고 우선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한국 국적을 가진 사람이라도 일단 일본으로 귀화를 하면 일본 국적이 더 귀한 것입니다.
승진하고 발령이 나면 나중의 직분과 사명이 더 중요하고, 고향이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주소를 가지고 사는 지금의 삶의 터전인 현주소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믿음의 세계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이 누리는 믿음의 세계란 처음 보다 나중이 더 좋은 것입니다.
이 세상의 삶보다는 장차 들어갈 하늘나라의 영생이 더 귀한 줄 믿습니다.
부모의 사랑도 크고 귀하지만 더 크고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7. 한국에서 자녀를 키우는데 아들이 장성하여 군대를 가는데, 어려운 가정생활로 부모가 고생하는 것을 보면서도 군대 가는 놈은 불효자식이라고 말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심지어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자식이라도, 자식 잃은 부모의 마음은 아프지만 잘했다고 하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생명을 바친 그 아들을 자랑스러워하고 훌륭하다고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가족을 구원하는 일은 우리의 사명이요 동시에 영적인 전쟁인 줄 믿기 바랍니다.
주님을 향한 충성,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어디에서 나타납니까?
바로 이 영적인 전쟁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은 주님을 많이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말씀에 열심을 내는 사람은 주님을 많이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전도를 열심히 하는 사람은 주님을 더욱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몸 바쳐 충성하는 사람은 주님을 더욱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바로 이것들이 전부 영적인 전쟁이라는 사실입니다.
기도로 깨어 전쟁하고, 말씀으로 무장하여 전쟁하고, 전도로 영혼 구원하는 전쟁하고, 선한 일로 전쟁하고, 사랑의 행함으로 전쟁하고, 몸된 교회를 세움으로 싸우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어느 정도까지 싸워야 합니까? 39절에 「자기 목숨을 잃기까지」입니다.
왜 그렇게 치열하게 싸워야 합니까?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마16:25절에도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막10:29-30절에도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복음을 위해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자는」 ,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자가 없」 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8. 기독자의 삶은 영적전쟁의 삶이 분명합니다.
불신세계에서 가족을 구원하고 그들을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영적전쟁은 피해 갈 수 없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유일한 길입니다.
죄 많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거룩하고 아름답고 복되게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영적전쟁을 치러야만 할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세월이 가면 다 잃어버리고 가치를 상실할 것뿐입니다.
건강이나 젊음이나 명예나 부귀, 온갖 세상의 자랑들이 다 나를 떠나 갈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자는 그런 것들이 아직 가치가 있고, 힘이 있고, 자랑스러울 때 그것을 사랑하는 자에게 바치거나, 가치 있고 보배로운 일에 투자하기를 기뻐하는 사람들입니다.
같은 김치라도 싱싱하고 맛이 있고 영양가가 풍부할 때 남에게 주는 것하고, 1년이 지나 다 시어빠지고 녹아내린 김치를 선물하는 것과는 그 가치와 결과에 있어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전쟁에서 가장 큰 승리는 무엇입니까?
아직 내가 젊었고 힘이 있고 가치가 있을 때 날 사랑하시고 날 위하여 대신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께 내 모든 것을 내어 드리는 것, 이것이 가장 큰 승리요 가장 보배롭고 가치 있는 승리인 줄 믿습니다.

나를 드리면 그 안에서 참 평안이 시작되고, 우리는 주님과 더불어 영적전쟁에서 영원한 승리의 영광을 얻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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