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0.23.주님이 원하시는 것(마태복음 9:9-17)

[성경본문] 마태복음9:9-17개역개정

9.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

10.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11.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12.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13.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14.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

15.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16.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17.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주님이 원하시는 것(마태복음 9:9-17/2011.10.23.오전)


1. 열차 안에는 형무소를 막 출소해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두 남자가 있었습니다. 한 남자는 자신의 과거와 미래에 대해서 열심히 말하는데 다른 남자는 말이 없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 겨우겨우 나오는 말이 5년 만에 출소해서 집으로 돌아가는데 집이 너무 가난해서 멀리 떨어진 형무소까지 면회를 올 만한 형편이 못되고, 편지도 없었기 때문에 가족이 자신을 잊었는지, 지금도 자신을 가족으로 받아 줄는지 염려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출소 전에 편지를 보내기를, 지금도 자신을 받아준다면 정원 끝에 서 있는 사과나무에 흰 리본을 묶어 달라고 했습니다. 만일 리본이 없다면 그냥 지나쳐서 멀리 갈 것이라 했지만, 집이 가까워오자 도무지 그곳을 쳐다 볼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동행하는 길동무가 대신 확인하기로 했습니다. 집 가까이로 기차가 지나가자 길동무가 소리쳤습니다.세상에! 나무 전체가 흰 리본으로 가득하군!!
이 이야기는 실화로 누가복음의 탕자 이야기와 흡사하여 미국교회의 청년사역에서 많이 사용되던 내용이었고, 비슷한 이야기로 한 여성이 출소하는 남편을 기다리며 동네 어귀에 노란 리본을 달아 놓았다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 단편소설이 인기를 끌자, 토니 올랜드 앤더 던이라는 가수 그룹이 「노란 리본을 오크나무에 매달아 주세요-Tie a Yellow Ribbon Round The Old Oak Tree」라는 노래를 불렀고, 이 곡이 세상에 나오자 발매 3주 만에 320만장이라는 레코드가 팔리면서 빌보드 핫 100에서 4주 연속 1위를 차지했습니다. 그 해에 910만장의 레코드가 팔렸다고 합니다.
한국에도 이 노래가 소개되어 가난하고 어려운 1970년대 중반에 많은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있었습니다.
곡의 내용을 일부분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 집으로 돌아가고 있어요,
    만약 당신이 아직도 날 원한다면,
    노란 리본을 늙은 오크나무에 걸어 주세요.
    3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날 원하나요?
    만약 내가 오크나무의 리본을 보지 못한다면,
    난 그냥 버스에서 우리 사이를 잊겠어요------
용기가 없어 도무지 집 쪽으로 바라볼 수 없어 버스 운전사에게 부탁했더니 무려 100개의 노란 리본이 나무에 달려 있었다고 합니다.

2. 이러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 머릿속에 떠오르는 공통된 단어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긍휼, 사랑, 불쌍히 여김입니다.
은혜라는 단어는 용서를 베푸는 것이라면, 긍휼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 대한 동정심이나, 치료하고 고치고 위로하며 도움을 주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긍휼에 대한 내용은 성경에도 가득합니다.
창세기 42장 이하에 보면, 형들이 요셉을 미워하여 자신을 애급의 종으로 팔았지만 곡식을 사러 애급에 내려 온 형들을 용서하고 도리어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었습니다. 나중에는 부친 야곱이 죽자 형들은 요셉의 복수를 두려워했지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였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창50:20-21)고 하면서 그들을 위로 했습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1만달란트의 빚 진 종을 불쌍히 여겨 모든 빚을 탕감해 주는 왕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방탕한 둘째 아들이 재산을 탕진하고 거지꼴로 집으로 돌아올 때 그 아들을 불쌍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는 아버지의 모습이 나옵니다.
누가복음 10장에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던 한 유대인이 강도를 만나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매 맞아 거의 죽어가는 것을 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이 보고 불쌍히 여겨 살려 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너희도 가서 이와 같이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에는 이 외에도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는 남에게도 이와 같이 긍휼을 베푸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3. 요즘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제 세상은 사랑을 잃고 공의를 잃고 인류가 방황하고 있다고 하지만, 형무소를 출소하여 집으로 돌아가는 한 남자를 위하여 늙은 오크 나무에 노란 리본이 뒤덮이고 있듯이,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상에는 지금도 긍휼과 자비와 위로가 풍성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갓난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어머니의 가슴속에는 여전히 자식을 불쌍히 여기는 긍휼의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풍조가 아무리 바뀐다고 하여도 아들에 대하여 불쌍히 여기는 아버지의 마음이 여전하기 때문이며, 형제끼리 서로 의지하고 도우며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여전하기 때문입니다.
학교에 가면 내 자식을 사랑의 손길로 어루만지며 사람 만들어 주시는 선생님이 있으며, 의사들을 욕하고 비난해도 병원에 가면 그곳에는 환자를 불쌍히 여기는 의사들의 긍휼의 손길이 있으며, 교회가 타락했다고 욕을 하고 비난해도 교인을 위하여,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대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목회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13)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에 사랑이 없다고 아우성이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사랑과 이로 말미암은 다른 사람들의 긍휼이 없이는 우리가 이 세상을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가서 --- 배우라」고 했습니다.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긍휼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훈련시켜 세상으로 보내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죄인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삼기 위함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랑을 잃고 죄 가운데서 방황하며 고통하는 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긍휼을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4.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요한의 제자들에게 거듭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유는 죄인의 집에서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아서 먹고 마시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상황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예수님이 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이 바로 「세리와 죄인」들입니다.
특히 세리는 자국의 경제를 수탈하는 침략자 로마제국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의인을 자처하는 바리새인들의 눈에는 죄인들을 가까이 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눈에 거슬렸던 것입니다. 요한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지금 세례요한이 감옥에 갇혀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알 수 없는 그런 긴급한 상황에서 그의 제자들은 금식하며 열심히 기도하고 있는데,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세례요한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죄인들과 어울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은 금욕주의자들인 세례요한의 제자들에게도 거슬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죄인을 불쌍히 여기사 그들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종교지도자들은 거룩한 자리에 올라가 있었고, 금욕주의자들은 속세를 멀리 떠나 있을 때, 예수님은 죄인들과 병든 자들과 고통하며 신음하는 자들을 일부러 찾아 다니셨습니다.

5. 교회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입니까?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함」 (눅4:18-19)에 있습니다.
안산제일교회의 고훈 목사님은 자신의 평생에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는데, 소록도의 애향원에 있는 나병 환자 9명이라고 합니다.
신학교 1학년 때 그곳을 방문했을 때 이 사람들이 전도사님을 위해 기도하겠다고 약속했고, 그래서 그런지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하면 힘이 났고 역사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몸이 약해서 안식년으로 쉬고 있는데 그곳에서 설교해 달라는 연락이 와서 갔더니 그들이 앉은 의자가 온통 새까맣게 변해 있더랍니다.
그들이 잘려 나간 손으로 의자들을 비비면서 얼마나 기도했으면 그 의자들이 피고름에 찌들고 만 것입니다.
그곳에 삽십대 후반쯤의 아름답게 생긴 부인이 아직도 고운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사연인즉 자식들이 커 가는데 어미가 나병인 것을 알면 평생 받을 충격이 컬까 싶어 남편 몰래 집을 나와 행선지를 찾지 못하도록 여기저기를 둘러서 이곳에 왔다고 합니다. 보고 싶어도 볼 수 없고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그렇게 아픈 가슴을 안고 살아가는 환자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육지의 좋은 병원을 버리고 평생 이 섬에서 나병환자들을 돌보며 사는 의사 한 분이 있다고 합니다.
그에게 왜 여기 와서 이렇게 있느냐고 물었더니, 하나님이 이 나병환자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6. 요즘 일본이 지난 3월11일의 지진으로 인한 해일로 인해 원자력 발전소가 피해를 보고 나자, 원자력 발전소 대부분이 가동을 멈추고 있는데, 당연히 모자라는 전기로 인해 사람들이 전기가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알고 너도 나도 절전을 하고 있습니다.
물이 많으면 물이 귀한 줄 모르고, 재물이 많으면 돈이 귀한 줄 모르듯이 우리가 은혜와 긍휼이 넘치는 환경 속에서 살다보니 도리어 불쌍히 여기는 긍휼의 마음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다 버림 당하고 불쌍히 여김을 얻지 못한다고 하여도 누구든지 교회로 가면 예수님의 자비와 긍휼이 그 안에, 그곳에 모인 성도들 가운데 분명히 있음을 알고 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마5:7)이라고. 그렇습니다.
긍휼을 베풀지 못하는 자는 교인은 될 수 있어도 성도는 될 수 없습니다.
긍휼을 베풀지 못하는 자는 바리새인들처럼 종교인은 될 수 있어도 예수님의 제자는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가서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는 배워야 합니다. 무엇을 배웁니까?
예수님에게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긍휼을 배우는 것입니다.
36절에도 예수님은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사람들의 겉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있는 죄로 말미암아 고통받고 저주받은 영혼의 아픔을 보셨습니다.
참 사랑과 긍휼을 맛보지 못하고 낙심하고 방황하는 심령을 보셨습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버림받고 소망이 없는 미래에 대하여 절망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자신을 속죄의 제물로 드렸습니다. 바로 이것은 예수님이 원하시는 우리의 모습인 줄 믿습니다.

7. 많은 사람들은 예수를 믿어 구원받으면 영적인 목적이 달성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9월5일자 주간조선에 「일본 총리 배출 마쯔시타 정경숙」이라는 제목의 커버스토리가 실렸습니다.
마쯔시타 정경숙은 1979년에 마쯔시타 고노스케라는 마쯔시타 그룹의 창업주가 사재 70억엔을 털어 일본의 미래를 위해 세웠습니다.
이곳에는 대학원을 졸업한 사람에서 일개 농부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들어오는데, 경치학, 경제학, 재정학 등의 전문과목도 배우지만 그들이 이곳에서 배우는 것은 어떤 학문적인 가치를 쌓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인간을 키우는 곳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청소하고 인사하고 차도며, 서예 등을 통해 예의를 배우고 100키로를 행군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총 53명의 의원들을 배출하고 노다 총리를 비롯하여 많은 여야당의 중진들이 이곳 출신들입니다.
한마디로 마쯔시타 정경숙은 일본의 미래를 위해 사람을 만드는 공장입니다.
이곳 출신의 노다 총리는 지금도 1000엔 짜리 이발소를 찾고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혼 구원이 교회의 최대의 목적임에는 변함이 없지만, 교회는 이 목적을 향해 바로 나아갈 수 있도록 예수님을 닮은 사람다운 사람을 만드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 중심에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긍휼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의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 마태를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긍휼로 그를 자신의 제자로 부르셨던 것입니다.
몇 년 전에 대통령 선거할 때 제가 칼럼을 통해 이 나라의 대통령 선거가 우리 자녀들의 교육을 다 망치고 있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국가가 아무리 엄청난 예산을 쏟아 부어 미래 교육에 투자를 한다하여도 대통령 선거 한 번 잘못하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절단이 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서울 시장 선거가 똑같은 모양을 답습하고 있습니다.
부모들이 사교육에 아무리 돈과 정성을 쏟아 부은들 이 나라가 행하는 선거라고 하는 모든 것들이 이 모양이니 우리의 자녀들에게 무슨 미래가 있겠습니까?

8. 사람이 사람을 비난하고 비판하는 것은 그 사람을 병들게 만들지만, 도리어 긍휼은 병든 사람도 치료하는 능력인 줄 믿습니다.
예수님의 긍휼은 그 어떤 죄인도 치료하며, 방황하고 고통하는 어 어떤 사람도 치료할 수 있으며 새롭게 하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긍휼의 장소가 되어야 하고, 그래서 우리는 긍휼을 베푸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가지의 마음을 가져야 참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향한 그분의 긍휼을 갈망하는 마음입니다.
둘째는 사람들을 향한 불쌍히 여기는 긍휼의 마음입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갓난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어머니의 마음처럼, 방탕한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이 되어, 병들고 지치고 죄로 말미암아 고통하는 사람들을 구원하는데 힘쓰기 바랍니다.
강도 만난 자를 불쌍히 여겨 데려다가 치료하는 긍휼의 마음을 가진 이웃이 되기를 바랍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이 원하시는 우리의 마음이요, 바로 이것이 제자된 자들의 마음인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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