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3.14.내가 그니라(요한복음 18:1-9)

[성경본문] 요한복음18:1-9개역개정

1.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그 곳에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니라

2.그 곳은 가끔 예수께서 제자들과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 곳을 알더라

3.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4.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5.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

6.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7.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그들이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8.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

9.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내가 그니라(요한복음 18:1-9/2010.3.14.오전)


1. 요즘 텔레비전 시장을 보면, 슬림형으로 액정 텔레비전이 거의 전부를 차지하는데, 한국의 삼성이 1위, 엘지가 2위로, 일본의 유명하던 소니나 파나소닉, 그리고 샤프를 누르고 세계시장에서 독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2010년에 들어서면서 텔레비전의 시장이 또 바뀌고 있습니다.

액정이나 슬림으로는 경쟁력이 없다고 판단한 회사들이 3D(3차원) 텔레비전의 출시를 다투고 있습니다.왼쪽, 오른쪽 눈의 전용인 각각의 카메라로 피사체를 찍은 후에, 같은 화면에 교대로 번갈아가면서 화상을 비쳐주기 때문에 특수 안경을 쓰고 보면 입체로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작년에 아바타라고 하는 입체 영화가 일으킨 붐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액정이나 슬림형의 기술이 평준화되었기 때문에, 남다른 기술이 없으면 세계 시장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21세기는 남보다는 다른 무엇인가를 가져야 살아남는 시대입니다.
이렇게 하루가 다르게 기술과 문명이 가파르게 상승곡선을 그리고 올라가고 있는데, 하나님의 백성들인 크리스천들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고 처신하는 일에 있어서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다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자랑하는 권력이나 물질이나 인기나 그 어떤 능력 앞에서 비굴해지고 굴복한다면, 세상에서 버림당하며, 심지어 사울 왕처럼 하나님으로부터도 버림 당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분명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마5:13)고 하셨습니다.

2. 우리 믿음의 선배들의 시대만해도 기독교인들이 세상의 문화를 이끌고, 사회의 지도자로서 시대를 앞서 가던 사람들이었지만, 지금은 도리어 이 세속화된 시대에 끌려가면서, 아무런 능력도 없이 세상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고 밟히고 있을 뿐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원래부터 크리스천들이 가치가 없는 존재가 아니라, 도중에 우리들의 생각과 처신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주님은 유월절 만찬에서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드시고, 그들의 발을 씻기신 후에, 겟세마네 동산에 함께 올라 기도하시면서 다가오고 있는 십자가의 죽음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바로 그 장소에 배신자 가롯 유다와 더불어 대제사장들과 그들의 무리들과 군대가 함께 올라와 예수님을 잡아가는 장면입니다. 그 때, 예수님의 태도가 어떠했습니까?
4절과 7절에 반복하여 하신 말씀이, 「누구를 찾느냐」는 것이고, 5절과 7절에서 똑같은 대답으로, 개정개역을 보면「내가 그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위기를 만나면, 특히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 자동적으로 몸을 움츠리거나 숨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대적자들 앞에서 숨는 것이 아니라, 당당히 자신을 밝히셨습니다.
캄캄한 산중에서 자기 자신을 대낮처럼 밝히 드러내셨습니다.

3. 예수님은 다가온 위기 앞에서 자신을 숨기는 것이 아니라, 수치와 고통,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미래의 시간을 향하여 자신을 내어 던지셨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피하지 않으시고 숨지 않으시고 드러내셨습니까?
그것은 아버지께로부터 받은바 사명이 있기 때문이요, 십자가의 길은 감당해야 할 사명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4절에 보면,「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가라사대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고 하셨습니다.
당신 자신이 나아가는 앞길이 고난과 죽음의 길인줄도 모르고 만용으로 선택한 행위가 아니라, 미리 모든 것을 다 아시면서도 그것이 자신이 가야할  길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자기를 찾는 폭력배 집단과 같은 그들을 향해「누구를 찾느냐」고 거듭 물으셨고,「내가 그니라」고 반복해서 자신을 밝히셨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사명자의 모습이요, 오늘 우리가 주님께 본받아야할 참 제자의 모습인 줄 믿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사랑하는 제자들 앞에서 마지막까지 그들을 사랑하시며, 마지막까지 스승으로서 지도자로서의 바른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온 인류를 위한 참 대제사장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4. 사람들은 정말 어려운 위기가 오면 자신의 참 모습을 드러낸다고 합니다.
그런 상황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 타이타닉이라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침몰해가는 거대한 여객선 속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최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평소에 소신도 없이 뇌화 부동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은, 위기 앞에서 우왕좌왕하거나 무조건 사람들을 따라 움직입니다.
평소에 욕심이 많는 사람들은 위기 속에서도 제 죽을 줄은 모르고 재물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또 위기를 만나면 어떻게 대처하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모든 것을 체념하고 미리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감동을 주는 3종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타이타닉호의 배와 함께 최후를 마치는 선장과 더불어 선원 한 사람 한 사람은 질서를 유지하면서 마지막까지 승객들을 안전하게 대피시키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 배의 악단들은 갑판에서 찬송가를 연주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드리워진 죽음의 공포를 몰아내고 위안과 소망을 주려고 연주를 계속하다가 배와 함께 사라졌습니다.
또한 사랑하는 남녀 주인공이 서로의 생명을 살리려고 고군분투하는 장면들은, 과연 그들은 자신의 생명을 걸고 타인의 생명을 살리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위기 가운데서 혼란에 빠져 스스로 생지옥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과, 한편으로 침착하게 자신의 맡은 일을 마지막까지 흔들림이 없이 충성하고 있는 사람들과 무엇이 다릅니까?
사명감의 차이였습니다.
사명감이 있는 사람들은 어떤 위기 앞에서도 당당하지만, 사명을 잃은 자들은 흔들리며, 도망가고, 심지어 남의 생명을 희생하면서 자신은 살려고 몸부림치고 있었습니다.
사업을 할 때, 이리저리 게산만 하면 사업이 안됩니다.
그러나 이것이다! 고 생각할 때는 재산은 물론이고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내가 희생하고 내가 무엇을 거는가에 따라 결과는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5. 문제는 제자들의 태도입니다.
예수님이 붙잡혀 끌려가자 결국에는 예수님을 버리고 다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베드로 같은 사람은 멀찍이 숨어서 뒤따라가면서 그 되는 일들을 지켜보았지만, 결국에는 자기 생명을 예수님을 3번씩이나 부인하고 저주하면서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간밤에, 불과 몇 시간 전만 하여도 죽을지언정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맹세한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숨의 위기 앞에서 그들의 맹세가 얼마나 허무하고 부질없는 것인가를 똑똑히 보여 주고 말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받은 사명보다 제 목숨이 더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님께 받은 사명은 무엇입니까? 생명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생명 구원하는 일에 제 생명 던지지 못한다면 생명을 구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자신의 생명이 귀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내 생명이 귀한 만큼 남의 생명 역시 귀한 것이며, 그 귀한 생명을 얻고 구원하는 일이라면 제 생명을 희생할만한 각오 없이는 제대로 된 결과를 얻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제 생명보다 사명이 더 크고 소중한 것을 알기 때문에 침몰해 가는 뱃속에서도 자신을 사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나라와 민족의 생명이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을 알기 때문에, 군인들을 전장에서 초개와 같이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것입니다.
저는 어릴 때 부산에서 대연동의 국립유엔 묘지에 자주 놀러 다녔습니다.
공산주의로부터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남의 나라에 와서 생명을 버린 사람들의 그 주검이, 그 당시에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지만, 세월이 가면서 그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고귀한 것인가를 알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성장하여 군 복무를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마쳤습니다.
그곳에는 대한민국을 위해 전사한 군인들과 대통령의 묘가 있었습니다.
죽어서도 그들의 생전의 모습을 기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라와 민족으로부터 부여받은 사명에 충실했기 때문입니다.

6. 주님은 길고 험한 십자가의 여정을 다 끝내시고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위에서 마지막으로 외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다 이루었다」(요19:30).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사명을 자신의 생명을 드림으로 완수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아버지가 주신 사명에 자신의 생명을 걸었기 때문에, 그는 온 인류의 죄를 사하고, 온 인류의 생명을 구원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똥을 푸는 일에는 똥지게 하나만 있으면 됩니다.
그러나 생명을 구원하는 일은 재물이 아니라, 청춘이 아니라, 명예가 아니라 자기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평소에도 제자들을 향하여 말씀하시기를,「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요12:25)하셨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을 향한 교훈이나 지시가 아니라 약속이요 보증입니다.
그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아니하는 자는 내 제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7. 어린아이는 장남감이나 인형이나 먹을 것이 있으면 만족합니다.
그러나 자라면서 좋아하고 만족하는 수준이 달라집니다.
그러다가 더 성숙해서 성인이 되어가면, 어떤 보이는 물건이나 환경보다는 더 고차원적인 것을 바라보고 그것을 소유함으로 만족을 얻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남녀간에 사랑하면서 이성의 마음을 얻으려고 합니다.
명예를 소중하게 여길 줄 알게 되고, 친구와의 우정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한 번 약속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다른 많은 것을 희생해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돈이나 물질, 어떤 좋은 환경이 주지 못하는 더 소중하고 더 가치있는 것들이 그 속에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굶주리면서도 글을 쓰거나 작품을 만들며, 남들에게 오해를 받으면서도 자기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들은 당장의 눈앞의 이익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가롯유다는 은 30개로 예수님을 팔고 말았습니다.
그것을 받은 가롯유다는 무엇을 했습니까?
성전에 그 돈을 던져 버리고 목을 매어 자살했습니다.
생명의 주인을 돈 주고 팔았으니 그 결과로 자신의 생명을 잃은 것입니다.

8. 우리 인생의 앞길에는 앞으로도 많은 위기들이 가로 놓여 있습니다.
그런 위기들 앞에서 지금까지 어떻게 처신하며 살아왔습니까?
자신에게 부여된 사명을 제대로 감당했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까?
남편으로서 아내로서, 부모로서 자식으로서, 이 사회의 한 사람의 구성원으로서 사명을 다했습니까?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자훈련을 받고, 받은 직분 앞에서 우리의 할 일을 다 했습니까?
아니면 어려움과 위기가 오면 숨거나 도망가거나 적당히 흥정하면서 넘어갔습니까?
제가 25년을 한 교회에서 목회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제 곁에 와서 목사님의 오른팔이 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은혜 받을 때는 그 어떤 것도 희생하겠다는 심정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다 떨어져 나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몇 번이나 오른팔이 부러지고 떨어져 나갔습니다.
어떤 때는 정말 팔이 떨어져 나가는 고통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첫째로 제 자신의 부덕함입니다.
둘째는 그들에게 감정은 있었지만 사명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9. 우리가 교회에서든지 가정에서든지 이 사회의 한 가운데에서든지, 다가오는 위기 앞에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처럼 「누구를 찾느냐」,「내가 그니라」는 자세로 고난과 위기를 향해 한 발 나아간다면, 죽기를 각오하고 믿음으로 나아간다면 홍해도 열리고, 요단강도 열리며, 광야에도 사는 길이 열릴 줄 믿습니다.
고난과 죽음의 십자가를 향해 스스로 나아가신 주님이 부활의 영광을 얻으심같이, 우리도 사명감을 갖고 교회의 4대 목표에 동참한다면, 이 교회에 하나님은 생명의 문을 여시고, 능력의 문을 여시고 축복의 문을 여실 것입니다.  
그 때 우리 교회는 생명의 말씀으로 죽은 자를 살리고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을 좇아내며 두려워하는 자에게 용기를 주며, 약한 자로 강하게 하며, 미천한 자로 존귀한로, 무능한 자를 유능한 자로, 세상을 변화시킬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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