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0.11.하나 될 수 없는 것(고린도후서 6:14-18)

[성경본문] 고린도후서6:14-18개역개정

14.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15.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16.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17.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18.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하나 될 수 없는 것(고린도후서 6:14-18/2009.10.11.오전)
1. 1840년 미국의 월트 한트는 부자집 딸 헤스터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가난을 이유로 결혼을 거절당하자 자신에게는 돈을 벌 수 있는 두뇌와 미래에 대한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열흘 안에 1천 달러를 벌어 오겠다고 장담했지만 길이 막막했습니다.
당시 천 달러는 집을 한 채 살 수 있는 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부활절에 헤스터를 만나 데이트를 하면서 그녀의 가슴에 꽃인 핀이 그를 찔렀고, 윌트 한트는 그 일로 번개 같은 아이디어를 떠올렸습니다.
밤잠을 자지 않고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결과 바늘을 두 번 구부려서 오늘날의 안전핀을 만들었고, 안전핀의 특허권을 1천 달러에 팔아 사랑하는 헤스터와 결혼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원래 부자는 부자끼리 결혼하기를 원하는 것은, 그들의 가진 부가 유출되거나 분산되는 것을 막고, 도리어 그 가진 부를 통하여 더 큰 부의 가치를 만들어내기를 원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한 때는 전 세계의 경제의 50%까지 독식하였던 로스차일드 가문의 경우는 이런 원칙을 철저하게 지킴으로 자신들의 부의 왕국을 지키고 있다고 합니다.
적어도 그들의 세계에서는 자자손손 부와 가난은 일치될 수 없는 것입니다.

2. 오늘 본문의 중심 주제는,「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14)는 말씀인데, 이 멍에를 같이 해서는 안되는 이유를 바울은 5가지의 수사학적인 표현을 빌려 사용하고 있습니다.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의 이러한 표현을 보면서, 오늘날의 신자들이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를 단순하게 생각하고, 결혼이나 사업이나 친교에 있어서 위기의식도 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행하고 있는데 대한 경종을 울리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부자들도 자신들의 부를 지키기 위해서는 결혼 상대까지도 철저하게 선별하고 있는데,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백성으로 과연 어떤 모습으로 세상에 살고 있습ㄴ까?
신앙의 극대화를 창출하고 있습니까?
자손 3대에 걸친 신앙이 대를 이어 갈수록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오늘 아침 바울이 말하는「멍에」라는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결코 불신자와 같이 해서는 안되는「멍에」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대체적으로「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는 이 말씀은 흔히 결혼문제에 대한 적용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즉, 신자와 불신자, 혹은 우상숭배자와는 결혼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사실 당시의 고린도교회 안에도 이미 이런 문제를 가진 가정들이 많았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신앙적인 불일치로 나타나는 문제들이 적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3. 이 본문을 바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멍에」에 관한 성경구절을 찾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명기22:10절에, 「너는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며」여기「겨리하다」는 말은 멍에를 함께 멘다, 혹은 하나가 된다는 뜻입니다.
법으로 이런 일을 금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소와 나귀는 같은 가축이라도 종류가 다른 짐승이기 때문에 같은 멍에를 메고는 효과적으로 일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개와 고양이를 같이 묶어 놓은 것과 일반일 것입니다.
종류가 다른 짐승을 같은 멍에로는 묶을 수 없는 것입ㄴ다.
또한 성경에서는 종류가 다른 짐승을 교미시키는 일도 금하고 있습니다.
레19:19절에 보면,「네 육축을 다른 종류와 교합시키지 말」라고 했습니다.
종류가 다른 짐승을 교미하는 것도 법으로 금하고 있는 것입니다.

4. 이 같은 사실을 놓고 볼 때, 신자와 불신자도 같은 세계에 사는 같은 인간이라도 그 종류가 다르다고 표현해야 만 할 것입니다.
같은 말과 문화, 단일화된 같은 사회 속에서 늘 보고 듣고 행하는 것들이 같아 보이는 이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는 이 신앙 하나 때문에 전연 다른 존재로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표현대로 보면,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빛의 자녀요 그들은 어두움의 자식들이며, 우리는 의의 사람들이요 그들은 불법의 사람들이며, 우리는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이요 그들은 벨리알 즉 사단에게 속한 멸망의 사람들이며, 우리는 믿는 자들이며 그들은 불신앙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종류가 다른 짐승은 같은 멍에를 메어도 일이 안되고, 교미를 해서도 않되는 것은 사산을 하던지 괴물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창6:1-4절에 보면, 네피림이라는 고대용사가 나옵니다.
이 사람들은 원래 하나님의 아들들이 세상의 딸들의 아름다움에 빠져 혼인하여 나온 후예들입니다.
문제는 네피림이란 거인, 혹은 타락한 자, 반역자, 배신자들을 가리키는데, 그들의 생각이나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라 하였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겉으로는 용사요 장사지만, 실상은 시대의 괴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만물의 영장인 우리는 누구입니까?
왜 세상에 왔으며, 무엇을 위해 살다가 어디로 가는 존재입니까?
웨스트민스트 소교리 문답의 제1 번에 기록하기를,
인간의 제일 된 목적을 물었을 때, 그 대답이 사람의 제일 된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그 하나님을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그의 자녀 된 은총을 누리고 있으며, 우리를 통해 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와 계획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맡기고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순종하는 것입니다.
히11장은 이런 믿음의 사람들이 세상에서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았으며, 이 세상을 떠날 때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주었는가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가진 존재들입니다.

5. 한편 세상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그들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며, 하나님이 인생을 자기 형상을 따라 창조하신 그 선한 목적을 따라 살고 있는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 세상 사람들의 실상을 롬3장 10절 이하에 그들의 죄상은 물론이고 그들이 처한 비참한 운명을 낱낱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느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 세상 사람들의 실존입니다.
문제는 그런 운명과 그런 죄의 짐을 지고 사는 사람들과 하나님의 자녀들이, 결혼이나 사업이나 여러 삶의 환경 속에서 그들과 운명을 같이 할 만큼 멍에를 같이 메는 것을 타당하다고 보는가? 그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신자와 친밀하면 친밀할수록 세상의 풍조에 물들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풍조를 잘 간파했던 메튜헨리는 말하기를, 선한 사람이 악한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것보다, 악한 사람이 선한 사람을 해칠 위험이 더 크다고 말했습니다.
 
6. 물론 사회적으로 불신앙의 세상 사람들과의 교제나 교류를 금지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바울도 오늘 본문에서 강조하는 것은, 우리가 가진 신앙의 순수성과 윤리적인 측면에서 성도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없을 상황에까지 이르지 않도록 자신을 잘 지킬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자와의 결혼문제도, 고전7장에서 불신앙의 남편이 같이 살기를 원한다는 그렇게 하라고 함으로, 이런 문제에 유연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결정의 결과로 내 신앙이 흔들리고, 성도의 순결함을 잃게 된다면 그것은 우리가 잘못 선택한 결과에 대한 댓가를 얻게됨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본문 16절에 우상이 나오는데 이 우상은 사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그 우상의 배후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단의 세력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방인의 우상제사에 가는 것은 악령과 교제하는 것이라 하면서(고전10:14-22)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불신앙의 배후에서 역사하는 사단의 간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불신자와 결혼하는 것도 싸워 이길 각오가 없다면 포기하는 것이 현명한 것입니다.
결국 불신자에게 끌려가거나 내 안에 불신세력을 끌어들이기 때문입니다.

7. 그렇다면 바울이 오늘 우리에게 제시하는 해결책이 무엇입니까?
본문 17절의 말씀에서 그 답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곧 자신의 거룩함, 구별됨을 마지막까지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특히「저희 중에서 따로 나와서」라는 말씀은 그들로부터 멀리 떨어지는 것, 피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강력하게 요구하시는 것은 구별됨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우리게 세상과 구별됨을 요구하십니까?
그 답이 16절 후반절과 18절에 있습니다.
첫째로, 이미 우리는 그리스도의 값없는 구원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우리의 몸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에 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그분의 백성으로 받은 소명과 능력을 따라 그분의 뜻을 이루는 것이 우리의 의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8. 가정에 나아주신 부모와 함께 사는 것은 자녀된 자의 특권이요 은총입니다.
그런데 모친을 사별하고 계모가 집에 들어오는 순간 자녀된 자의 특권도 은총도 사라지고 무거운 짐과 고통만 남는 것처럼, 우리가 결코 함께 메어서는 안되는 멍에인 줄 알면서도 그것을 메고 일치를 이루려고 몸부림친다면, 우리는 얻은 것보다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크고 더 많은 것을 잃을 것입니다.
바울은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는 타협할 수 없는 선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 믿음이 굳세 지면 질수록 그 한계선이 더욱 분명히 보일 것이며, 멍에를 메어도 결코 일치를 이룰 수 없는 것들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엡5:7절에 보면, 같은 그리스도인이라 지칭하는 자들이라 하여도 그들의 행실과 언어가 올바르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는 자들을 경계하면서「그러므로 저희와 함께 참여하는 자가 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유는 같은 멍에를 메어도 일치할 수 없는 것들이 이 세상에는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가정 안에도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면, 서로 가는 길이 다를 것입니다.
운명과 예정이 다르고, 믿음의 대상이 다르며, 장차 받을 영광과 멸망이 다릅니다.
다만 일치를 이룰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열심히 전도하고 삶을 통하여 그들을 감화시키는 것입니다.
 
9. 바울이 본문에서 특별히 5가지의 표현을 빌려 일치할 수 없는 것들을 세세히 열거하고 있는 것은 세상을 향한 타협이나 양보로 인하여 우리의 가진 값지고 거룩한 것들이 소멸될 것을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과 위로는 화목하고, 같은 멍에를 메고 믿는 자들과 더불어 사랑과 은혜가 넘치는 교제를 나누며, 세상에 대하여는 복음으로 구원을 이룸으로 세상과도 영적 일치를 이루기에 힘쓰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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