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6.1.사랑을 따라 구할 것(고린도전서 14:1-19)
[성경본문] 고린도전서14:1-19개역개정
1.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2.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3.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4.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5.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6.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7.혹 피리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나타내지 아니하면 피리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8.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리요
9.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써 알아 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10.이같이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많으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11.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외국인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외국인이 되리니
12.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
13.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14.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15.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
16.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알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17.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18.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9.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사랑을 따라 구할 것(고린도전서 14:1-19/2008.6.1.오전)
1. 한국말에 人面獣心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람의 얼굴을 하고, 마음은 짐승이라는 것입니다. 캐나다의 북쪽 영하 30도의 혹한에 살고 있는 한국 노인 부부가 있는데, 그들이 이곳에 살게된 내력은 이렇다고 합니다.
결혼해서 캐나다에 잘 살고 있는 두 딸이 부모를 초청해서 함께 살기로 하여, 모든 재산을 정리하고 건너갔는데, 큰딸이 재산만 가로채고 먼 곳에 내다 버렸고, 오갈 데가 없는 노부부는 비자만기로 한국에 쫓겨왔고, 남편은 당뇨병으로 고생하고, 아내는 깡통 폐지를 주우면서, 딸을 상대로 재산반환청구 소송을 진행중인데, 그나마도 딸의 행방을 알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사건이 표면적으로 흔치 않은 사건이지만, 그 이면에는 유사한 사건이나 상황이 우리 주위에는 얼마든지 많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에서 무엇을 두고 사랑이라 말할 수 있습니까?
사랑에는 희생이 따라야 합니다. 희생이 없는 자녀교육이나, 희생의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사업이나 직장생활, 그리고 자기 희생을 모르는 신앙생활은 전부 위선이고, 능력을 잃은 생명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서두에서도 사람들이 은사를 구할 때, 먼저「사랑을 따라 구하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은사의 목적이 무엇이며, 은사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고린도교회는 은사 때문에 도리어 혼란과 문제를 일으켰지만, 받은 바 은사를 가지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도대로, 능력으로 역사 하는 교회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2. 당시 고린도교회는 방언 은사를 가지고 싸웠습니다. 즉, 방언을 받은 것은 성령 받은 증거요, 그러므로 방언을 받지 못한 것은 성령 받지 못한 증거라는 것입니다.
제가 어릴 때에도 한국교회의 일부에서는 이런 경향이 그대로 나타났었습니다.
한 때는 제 자신도 이것 때문에 흔들릴 뻔했습니다.
아무튼 방언을 성령의 증거로 생각하는 이 사람들을 보면, 공중예배에도 방언으로 기도하면서 영적 질서를 무시하였습니다.
적어도 본문을 통하여, 방언의 폐단을 몇 가지로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방언을 특권처럼 자랑함으로 그 마음이 교만해 진다.
둘째로, 방언을 받지 않은 사람들의 시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셋째로, 절제하지 못함으로 공중예배의 혼란을 가져온다.
넷째로, 불신자들에게 덕이 되지 못하고 무식한 야만인이라 여겨질 수 있다.
다섯째로, 자신도 알아듣지 못하는 기도로 인하여 스스로에게도 마음의 열매가 없다.
방언 하는 사람들은 그 방언에 빠지면 황홀경에 이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공동체에서나 전도할 때, 세상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방언은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한 은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말하기를, 1만 마디의 방언보다는 은혜 받은 5마디의 말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은 세상 사람들의 말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한나라당의 전대표였던 박근혜씨가 지난 총선에서 한 말들이 있습니다.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 살아서 돌아오라 는 말들입니다.
그녀는 대구의 자신의 집에서 칩거하면서도, 한나라당에서 쫓겨난 자신을 지지하고 따르는 후보들을 대부분 살려냈습니다.
간단하지만, 알기 쉬운 말, 그녀의 심정과 시국 상황을 정학하게 꽤뚫는 말이었기에 국민의 감정을 움직인 것입니다.
3. 오늘 본문을 통하여 사도바울이 권면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방언보다는 예언하기를 힘쓰라는 것입니다.
방언은 어디까지나 방언 하는 개인을 위한 것이지만, 예언은 교회 전체를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언이란 무엇인가? 12장에서부터 나타나는 이 예언이라는 말은, 시간상으로 미래에 대하여 미리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현재를 향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14장 전체는 방언이 중하냐 예언이 중하냐는 것을 논하면서 19절에서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5마디는 예언을 말하는 것이고, 남을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곧, 말씀으로 사람들을 권면하고, 권면받은 그들을 통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고,
성도들의 상처를 치료하고,
고통 하는 자들을 위로하고, 힘과 소망을 주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새벽기도회에서 돌아가면서 말씀을 준비하는데, 권사, 집사님들이 준비를 잘해야 합니다. 왜? 바로 이것이 본문에서 말씀하는 예언의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새벽기도에 열심을 냅니까? 받은 바 은혜가 너무 감사 감격하여, 더 큰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들과, 문제 만나서 고민, 고통 하는 사람들이 문제 해결을 위해 주님께 소망을 두고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일에 이 사람들에게 방언으로 말한다면 힘이 되며, 도움이 되겠습니까?
도리어 속만 상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방언도 필요하지만, 예언하기를 더욱 힘쓰라는 것입니다.
4. 둘째로, 모든 일을 사랑을 따라 구하라는 것입니다.
고전14장에서 「사랑」이라는 단어는 이곳에서 유일하게 등장하지만, 그 내용을 살펴보면 한글 성경에서,「방언」이 13회,「예언」이 12번, 그리고 다른 은사들이 5번, 방언의 「통역」이 4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방언」과「예언」을 중심으로 하는 모든 은사들을 제어하고 있는 것이 바로「사랑」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사랑을 따라 구하라」는 이 「구하라」는 말씀은, 헬라어로 「디오케테」로 이것은 사냥꾼이 짐승을 추격하는 것처럼 그렇게 집요하게 구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떤 학자는 표현하기를, 결코 멈추거나 끝낼 수 없는 행동이라 했습니다.
바렛크라는 학자는 1절을 해석하기를,「사랑을 추구하라. 이것이야말로 너의 목표이니라」고 했습니다.
방언이니 예언이니 하는 이 모든 것들이 13장에서 말한 것처럼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든 믿음의 역사는 사랑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이 우리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방언도 사랑의 마음으로 하면 귀한 은사로 귀한 열매를 맺을 수 있으며, 말씀이 아무리 귀해도, 사랑으로 증거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5. 셋째는 우리의 태도입니다.
아무리 크고 놀라운 은사를 받았다 하여도, 그것이 개인적인 것이라면 그 은사의 가치는 보잘 것 없는 것입니다.
내 집안에 있는 다이야몬드는 아무리 귀한 것이라도 내 혼자만 만족시킬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양식을 나누어주고, 주님의 몸 된 교회에 성전건축과 선교헌금을 위해 드린다면, 많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 되며, 하나님께도 영원한 영광이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문의 말씀은 잘못된 가치관에 빠져 있는 신자들의 그 가치관을 깨우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받은 은사는 과연 모든 사람들에게 유익한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몸 된 교회에 유익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가? 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은사는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3)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6. 오늘 본문을 통하여 확고한 답을 얻는 것은, 방언은 대중이나 공동체를 위한 은사가 아니라 개인, 자기 스스로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언이나 다른 은사들은 남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일만 마디의 방언보다 다섯 마디의 예언이 더 크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인생의 죽음과 주님의 죽음을 비교해 봄으로 본문의 이해를 넓힐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만 위해서 살다가 죽는 인생을 개죽음이라 한다면, 남을 위해 살다가, 또 죽을 때에도 남을 위해 죽는 것은 거룩한 죽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죽음이 십자가에서 그토록 처참한 모습을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죽음이 값지고 영원한 죽음인 것은, 그가 자기를 위해 살지도 아니하였고, 자기를 위해 죽지도 아니하였고, 오직 우리를 위해, 온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위해 자신을 기꺼이 희생시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죽음은 가장 크고 가장 귀한 죽음인 것입니다.
내가 어떤 은사를 받았느냐?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은사를 가지고 얼마나 사랑으로 행하였으며, 주님께 얼마나 영광이 되었느냐가 중요합니다.
방언이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잘못 사용하여 교회를 어지럽히면, 그것은 많은 사람들을 망하게 하는 은사가 되는 것입니다.
7. 우리의 신앙이 어떤 모습인가?
15절에,「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는 이 말씀은 우리의 전인격을 동원하여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기도, 찬송, 봉사, 전도, 예배는 결코 종교적인 습관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의 확고한 신앙과, 그 신앙의 사상적인 배경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찬양에도 힘이 넘치고, 기도에는 능력이 넘치며, 예배 때마다 감사와 확신에 넘치는 줄 믿습니다.
결코, 일시적으로 도취되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내 가슴이 성령의 감동으로 뜨거워지고, 그래서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그 은혜에 감격하여 눈물이 넘치고 감사가 넘치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주님이 내게 주신 은사들을 가지고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주님이 날 미쁘시게 여기사 직분과 능력과 은사들을 주셨는데,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추구하고 살았습니까?
8. 기독신문에 보니 백금산 목사님의 주기도문에 관한 이야기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각 종파들은 자기들만의 기도문들이 있었는데, 이것은 오늘날로 말하자면, 단체의 회칙이나 선언문, 혹은 비전 같은 것의 성격을 가진 것입니다.
예수님 제자들도 자신들의 모임에 대하여 공동체의 의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어떤 사명감이나 정체성을 고양시키는 선언문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누가복음 11장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11:1) 하였고,
그 때 주님이 그들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 오늘날의 주기도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기도문을 이방인의 주문처럼 달달 외우면서, 정작 그 주기도문이 무엇이며 왜 가르쳐 주셨는지, 주기도문의 성격이나 목적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저 열심히 외우면 충성된 신자가 되는 줄 알았습니다.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사랑하고, 믿음의 형제들을 사랑하라고 주신 은사입니다.
이 은사의 영역을 더 확대하면, 세상에서 빛 되고 소금 된 자의 사명에 충실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본문의 1절 서두에 나오는「아가페」라는 사랑의 말, 이 단어 하나가 14장 전체를 마치 지렛대처럼, 다른 모든 은사들을 들어올리고 제어하고 있는 것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14장도 은사의 장이 아니라 사랑의 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습관이나 종교적인 관습을 버리고, 사랑으로 이 교회와 성도들을 섬기십시오.
평생 가지고 다니는 성경이 줄치고 메모하고, 침을 묻혀서 너덜너덜 헤어진 것처럼, 받은 은사도 사랑이라는 이름아래 다 닳아 없어질 때까지 사용하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