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10.사랑과 미움(요한일서 3:13-19)
[성경본문] 요한Ⅰ서3:13-19개역개정
13.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14.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15.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6.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17.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18.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19.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 사랑과 미움(요한일서 3:13-19/2007.1.10) 1. 사람들이 세상에 와서 한 평생 살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사는 세상이 어떤 곳인가를 잘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조금 깨달았다 싶으면 세상 떠날 때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 만나기 전까지는 나름대로 세상에서 열심히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자기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습니다. 열심히 노력하면 나름대로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 줄을 생각했습니다. 오늘날도, 내가 하기에 따라 세상은 얼마든지 살만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과신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초에 신문을 보니, 전세계의 지도 위에 분쟁지역을 그려놓았고, 그 곳에서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으며, 또한 그곳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했는지 기록해 놓은 것을 보고, 평소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이 지구촌이 매우 고통스럽고 어려운 형편에 있음을 알았습니다. 이러한 분쟁과 살인, 테러, 전쟁의 배경에는 분노와 미움이 있습니다. 심리학자들은 말하기를, 사랑 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세상과 사람들을 향한 분노와 미움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위에 불안정한 우리의 삶을 안정시키려고 남을 짓밟고 빼앗고 앞질러 가려고 싸우고 경쟁하는 것이 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2. 이러한 현실에서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세상에서 미움을 받을 것이며, 그 미움은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고 예수께 택함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시면서, 제자들만이 미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먼저 세상에서 미움을 받으셨음을 나타내셨습니다. 세상에서 사랑 받고 살아도 어려운데, 한 평생 미움받으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미움을 받아야 할 세상의 현실 앞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말씀하시기를, 요15:18절에,「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고 하시면서,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고 하셨습니다. 미움은 세상에 나타내신 하나님의 사랑만큼이나 그 역사가 또한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 본문을 통하여 분명한 사실 몇 가지를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13-14절에서, 미움은 세상에서 나오며 그 결과는 사망이라는 사실입니다. 둘째는, 15절을 보면, 미움은 곧 살인이며, 살인의 근본인 미움 속에는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그러나 참 사랑의 출발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어 주심으로, 우리가 그에게서 참 사랑을 알았고, 또한 받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또한 그 사랑을 행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16-18). 3. 세상이,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의 사람들인 제자들을 미워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딛고 일어서야 할 발판을 잃어버린 것을 의미합니다. 한 마디로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더구나 13절의 미워한다는 「미세이」라는 헬라어의 의미는, 현재적인 사실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즉, 이미 미워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미워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지금은 미움을 받아도 앞으로는 사랑 받을 수 있는 기대가 있다면 지금의 미움을 인내로 참을 수 있지만, 이 미움이란 우리가 죽을 때까지 계속될 것이며, 우리의 자녀들과 후손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머물러 있는 한, 주님이 오실 때까지 이 미움은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이 우리를 낙심케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우리를 미워한다는 이 사실을 통해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놀라운 증거가 몇가지 있습니다.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답이 14절 이하에 기록되기를, 1)우리가 미움을 받는 것은 이미 우리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간 존재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2)또한 우리가 세상에서 미움을 받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입었을 뿐 아니라, 우리도 예수님처럼 사랑의 사람이 된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3)반대로 우리를 미워하는 세상과 그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여전히 사망 가운데 있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4)그리고 우리를 미워하는 그들에게는 사랑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4. 이 사실을 12절에서도 가인과 아벨의 사건을 통하여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가, 그리고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아 환란과 핍박을 당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인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세상에서 미움과 핍박을 받으셨습니다. 그는 우리보다 먼저 우리 때문에 미움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실에 감격한 믿음의 선배들은, 우리의 믿음을 파선시키려고 세상이 우는 사자처럼 달려들 때에, 주저함이 없이 자기의 소유와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릴 뿐 아니라, 자기의 생명까지도 주께 드림으로 순교자의 길을 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에서 보면, 비참하리 만치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고 핍박하고 생명과 재산을 빼앗기는 바로 이러한 현실은, 우리는 결코 공중권세 잡은 사단이 지배하는 죄악된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만세 전부터 하나님의 택함을 입어,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사랑 안에 있는 자임을 나타내는 확고한 증거가 되는 줄 믿습니다. 그들이 우리를 미워함으로, 우리와 세상은 이미 영원토록 분리되었고, 대립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이란, 그 정체성에 있어서 이미 옮겨진 존재입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세상에서 하늘나라로, 마귀 아래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의 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5. 문제는 우리에게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여전히 살아 움직이고 있는가 하는 사실입니다. 지금 서울과 양평에 있는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에서 학생들과 학교측이 대립하여 700여명의 학생들이 유급의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이것은 갑자기 나타난 문제가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있었던 문제가 점점 곪아 터져 나온 것에 불과합니다. 제가 그곳에서 선교학을 전공할 때에도 훌륭한 교수들님들이 학교를 떠날 때마다 가슴이 아팠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처음 받았을 때 받은 것이 분쟁이 아니라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조건 없이 주는 아가페의 사랑이었습니다. 본문 16절에 보면,「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그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버리실 때, 이것은 억지로 한 것이 아니라 그 분이 자원하여 스스로 기쁨으로 행하신 일입니다. 그 사실을 마가복음 10:45절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었습니다. 6. 우리가 처음 받은 복음, 예수님의 사랑, 그의 피묻은 십자가는 우리의 생명과도 바꾸어도 아깝지 아니할 가장 놀랍고 아름다운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가운데 서 있는 십자가는 어떤 것입니까? 예수님의 사랑이 사라진 그래서 남은 것이라고는 고통과 저주와 분쟁의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생각하고 눈물 흘리는 것은, 그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요,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예수님의 모습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랑과 희생이 간 곳이 없는 십자가를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의 목에서 달랑거리며 매달려 있는 십자가처럼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 될 뿐입니다. 우리에게 부음바 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우리 가운데서 행하게 될 때에는, 그것 자체가 이미 우리가 하나님의 참된 자녀되었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의 계명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참된 백성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행하는 이 「사랑」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우리의 표증(싸인)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반복되는 몇 가지의 단어들 중에서, 「안다」는 단어가 주목을 끌고 있습니다. 이것은 동사형「에그노카멘」으로 우리가 알고 있다는 의미입니다(16절). 무엇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근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형제를 사랑한다는 그 사랑의 행위란, 곧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함을 위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형제를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의 인격이요 삶이요 본능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16절에서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사도요한은 결론을 짓고 말았습니다. 7. 믿음의 형제들이 어려움을 만났을 때 우리는 그들에게 무엇을 내어놓아야 합니까? 평소에는 17절에 기록된 것처럼, 세상 제물로 형제의 궁핍함을 도와야 합니다. 만일 이러한 마음을 스스로 막는다면, 이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신 것은 어려운 믿음의 형제를 도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위기를 만났을 때는,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16)입니다. 21세기의 기독교가, 교회가 능력을 잃어버린 것은 경건의 모양만 찾은 결과도 있습니다. 영성이 더럽혀짐을 당한 결과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의 원인은 우리가 입었던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만 하고 베풀 줄 몰랐던 것에 그 원인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일본의 군국주의로부터 대한민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안중근 의사의 감동적인 글을 쓴 그의 돌비가 남산 도서관 옆의 안중근 기념관 앞뜰에 서 있었습니다. 저는 그 글을 일본에 오면서 사진에 담아왔습니다. 見利思義見危授命, 곧 이익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함을 보거든 생명을 주라는 뜻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