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8.4.디딤돌과 걸림돌(마가복음9:38-42)
[성경본문] 마가복음9:38-42개역개정
38.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
39.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40.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41.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42.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제공: 대한성서공회
| 디딤돌과 걸림돌(마가복음9:38-42/2019.8.4.오전) 1. 요즘 들리는 소식들은 사방에서 사람의 마음을 답답하게 만드는 것으로 흘러넘치고 있습니다. 일본에 살고 있는 한국 사람으로서는 한일 관계가 선린(善隣) 관계로 좋아지기를 원하지만, 현실은 갈수록 암담하고 답답하기만 하고, 한국의 국내 사정도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도대체 이 나라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요즘은 오죽하면 친구 목사님들 까지 피켓을 들고 아스팔트로 나와 동성애 합법화의 반대를 외치고 있는 사진을 보내오면서 함께 기도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정치가 어긋나기 시작하면서 경제, 외교, 교육, 안보에 이르기까지 무능을 넘어서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국가나 어느 기관이나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지도자가 되려면, 제일 먼저 갖춰야 할 것이 상대방에 대한 관용이고 포용이고 이해력입니다. 참된 리더십은 여기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최근의 설교에서 말씀드린 대로 우리가 참 평화를 누리려면 상대방의 아픔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고 그곳에서 평화와 화해가 시작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우리의 아픔을 먼저 아시고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에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내 생각이나 내 주장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전부 적폐라는 명문으로 쳐내고 짓밟아버리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뚜렷한 명분이나 사람들의 기대감을 불러올 만한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야말로 내로남불, 이헌령비헌령(耳懸鈴鼻懸鈴)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현실입니다. 지금 한국과 일본은 서로가 한 치 양보도 없이 총 칼 없는 전쟁에 돌입한 그런 상황입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상대방의 상황이나 생각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서로가 내 자신 만의 이익을 우선하면서, 내 주장이 옳으니 내 말만 들으라는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바사 왕국의 에스더처럼(스4:14), 하나님이 우리를 일본 땅에 보내신 것은 바로 이런 위기의 때를 위해서, 한국과 일본의 화해를 위한 디딤돌이 되라고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내 나라와 민족은 물론이고 이 땅 이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참 사랑과 긍휼이 무엇인지 우리의 삶을 통해서 보여주는 일에 힘쓰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전보다 더욱 말과 행동에 조심하면서, 이해와 관용은 물론이고 내 것을 하나 내어 주고서 라도 이웃과 아름답고 복 된 관계를 이어가는 것이 우리의 사명인 줄 믿습니다. 2. 그런데 본문 내용은 지금의 상황을 너무 잘 설명하고 있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국제적인 문제는 우리에게 너무 거리감도 있지만, 한일 간의 관계는 우리들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생활에 큰 영향을 주는 중대한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한일 간의 문제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 그리고 이런 어려운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믿음으로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의 제자들이 전도하러 나갔다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도 아니고, 안면도 모르는 그런 사람이 축사 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느냐, 속 된 말로 로열티를 지불하지 않고 어찌 네 마음대로 예수 이름을 팔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종교 활동을 하려면 우리의 허락을 받아야 하니, 그러므로 우리를 따라 오던지 아니면 일절 예수 이름을 사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면 이렇게 반응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실을 보고 받은 예수님의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39절에 보니 그들의 활동을 금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3. 사실 기독교 2천 년의 역사는 같은 신앙고백을 하는 믿음의 공동체의 분열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한편으로는 사랑과 은혜를 말하면서 늘 적이냐 아군이냐를 따지면서 편 가르기를 합니다. 기독교에도 정치는 필요하지만, 그것이 인본주의로 흐르면 그 때부터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 자체는 그렇지 않은데 믿는 사람들이 의외로 편견적이고 시야가 좁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조금만 뜻이 다르고, 이견이 있으면 당장 적으로 돌리고 이단으로 몰아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문제를 제자들에게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 나를 비방할 자가 없" 다는 것입니다. 38절에서 제자들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낸" 다는 말과, 39절에서 예수님이 "내 이름을 의탁하여" 에서의 이 두 말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제자들은 귀신을 쫓아내는 사람이 믿음과는 상관이 없이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하나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데 반해서, 예수님의 말씀은 그가 나를 의지하고 나를 믿는 자로 보고 여기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관심은 내 편이냐 아니냐에 있지만, 예수님의 최대 관심사는 무엇입니까? 나를 믿고 의지하는 자에게 있습니다. 믿음의 능력이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그가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믿을 때 나타나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지 상관이 없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었다면, 그 사람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행19:13-16절에 보면, 사도바울의 능력 행하는 것을 보고,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 삼아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데, 스게와 라는 제사장의 일곱 아들들이 흉내를 내다가 도리어 귀신에게 공격을 받아 피투성이가 되어 벌거벗은 몸으로 도망한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4.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들의 신분이나 출신을 따지지 말고,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사람들의 행위를 금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그 이유는 내 이름으로 큰 능력을 행하면서 즉시 나를 비방 할 자는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모를 뿐이지 그 사람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일꾼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40절에,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 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에게 물 한 그릇이라도 베풀면 천국의 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적군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최선의 방비는 선제공격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최선의 무기는 적이라도 내 편으로 만들어 복음의 디딤돌로 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체험하는 것이지만, 이웃 사람 하나를 적으로 만들면 말도 못하게 삶이 피곤하고 힘들어집니다. 특히 일본에서 생활 하는 사람들은 이런 문제가 얼마나 절실한 지 알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 수만 있다면 상대방으로 하여금 나에게 호감을 가지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하루 한 끼만 먹어도 살 수는 있지만, 이웃하고 원수 지고는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곳이 일본입니다. 그래서 일본 생활에서 제일 주의할 것은 이웃을 적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를 양보 해서 이웃을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지금 한국 사람들은 하나부터 열까지 이웃을 원수로 만들고 있으니 나라의 장래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5. 본문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관심사와 우리의 관심사가 너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관심사는 늘 저 사람이 아군이냐 적군이냐, 아니면 내부의 스파이인지 감시와 경계를 하다가 정말 중요한 복음을 위해서 헌신할 기회와 선을 행할 수 있는 복 된 기회를 놓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로 말미암아 고통 하는 인생이 구원 받아 죄 짐을 벗어버리고 자유를 얻는 것이고, 이 일을 위해서 냉수 한 그릇이라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접하는 자를 기억하시고 반드시 갚아주시겠다고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제 개인의 경험으로 보면, 일본 교회는 제가 한국 교회 출신이라서 차별을 하고, 한국 교회는 학교 출신이 다르다고 여러 가지로 차별을 했습니다. 그런데 41절에 무엇이 기록되어 있습니까?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외부인이라도 나를 예수 믿는 사람인 줄 알고 물 한 그릇을 대접하면 상을 받는데, 하물며 같은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사랑하고 힘을 합하여 섬기고 복음을 전한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느냐는 것입니다. 마5:44절에 보면,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 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고 하시면서, 45절에 가서는 "이같이 한 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 주신" 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세상에 살 동안에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씀이고, 그런 행위를 통하여 우리에게 받을 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행위가 옳고 정당한 것은, 하나님도 선인이나 악인을 가리지 않고 햇빛과 비를 골고루 내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6. 저의 경험으로 보면 일본의 불교는 기독교를 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선한 일을 위해 협력해야 하는 아군 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국 기독교는 불교를 원수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렇다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어디로 간 것입니까? 구원에 관해서는 타협도 양보도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을 행하는 일에는 종교나 인종이나 역사나 문화를 넘어 협력하는 것이, 우리를 위해서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종파 싸움으로 제일 치열한 곳이 이슬람 지역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도 이런 싸움에 둘째 가라고 하면 서러워할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예수를 독점하여 스스로의 정통성을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이란 종파나 어떤 단체를 신봉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완성해 나가는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능력이 어디에 있습니까? 기독교가 세상 여타 종교와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받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모든 이들에게 사랑과 관용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합니까? 이것은 원수도 내 편으로 만들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도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함께 공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7. 기독교를 박해 하던 사울의 악명은 온 세상이 다 아는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악명이 높은 사울을 제일 먼저 누가 받아 주었습니까? 행9:10-19절에 보니, 다메섹의 아나니아 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환상 중에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즉시 사울을 받아 주었기 때문에 박해자 사울이 변하여 위대한 사도 바울로 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을 통하여 기독교의 부흥의 불길은 전 유럽과 아시아로 퍼져 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의도하시는 것은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서 일하는 일꾼이라면, 우리의 앞길을 가로 막는 걸림돌, 즉 장애물을 파괴하거나 걷어내려고 하지 말고 그것을 사용하여 도리어 디딤돌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의 신앙의 걸림돌은 우리와 상관이 없는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믿음을 가지고 같은 공동체 안에서 함께 일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중세 시대의 기독교도들의 손에 의해 저질러진 그 끔찍한 마녀 사냥도 사랑과 관용을 잃어버린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한 만행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8.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남들이 따라 올 수 없는 위대한 일을 행함으로 우리의 이름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내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 함께, 더불어, 다 같이 사랑과 관용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는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공이고 축복인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이 일을 아름답게 완성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 힘과 능력으로는 부족하고 할 수도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면 그가 우리를 통해서 분쟁을 화해로, 고통을 치유로, 절망을 소망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하나님 중심에 서서 그리스도께서 일 하실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먼저 그 분께 내어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는 자들에게 한 그릇의 물이라도 대접하는 여유 있는 마음이 바로 주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들이요, 여기에 대한 상급을 잃지 않는 줄 믿습니다. 벧전4:8에 보니,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 다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바라는 것은, 한일 양국이 백성들을 위해서라도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며 양보하면서 선린 이웃으로 함께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미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와 복음 앞에서 걸림돌이 되었던 우리가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 평화를 위해서 디딤돌이 되도록, 우리 스스로가 그렇게 변화되기를 소원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