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5.5.수로보니게 여인(마가복음7:24-30)
[성경본문] 마가복음7:24-30개역개정
24.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25.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에 엎드리니
26.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27.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8.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29.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30.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제공: 대한성서공회
수로보니게 여인(마가복음7:24-30/2019.5.5.오전)
1. 2013년도에 고레에다 (是枝裕和)감독을 통해 나온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そして父になる)의 줄거리는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혈청검사를 통해서 아이들이 출생한 병원에서 바뀌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그들은 각자 원래의 부모에게로 돌아가는데, 부잣집으로 돌아간 아들은 완벽해 보이는 아버지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키워준 아버지의 집으로 몰래 돌아가는데, 가난한 집으로 돌아간 아들은 좀 엉성한 아버지와 가난한 환경에 의외로 잘 적응해 가는 그런 내용입니다.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아이들이 원하는 것은 부모의 성공이나 힘이 아니라, 자신들의 세계를 공감하고 어린아이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주는 그런 부모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캄보디아의 경우도 전쟁과 킬링필드의 참상을 통해서, 갈기갈기 찢겨지고 파괴된 가정의 구성원이 혈연을 통한 가족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고통을 함께 짊어지고 공감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도 혈연 못지않은 끈끈한 가족애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목회를 하면서 우리 주위를 살펴보면, 결혼이나 출생이라는 형태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가족이지만, 그 관계가 원래의 모습에서 이탈하여 파괴되거나 왜곡된 형태로 이름만 남아 있는 가족이 적지 않으며, 도리어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학대와 차별이며 좌절과 고통의 세월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과연 가족이란 무엇이고 가정이란 어떤 곳을 말하는 것입니까?
가정의 달을 맞이하면서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가정이 어떤 가정이며, 또한 우리의 가정을 이 말씀의 거울에 비추어 진단해 보는 좋은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2. 본문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두로 라고 하는 이방인 지역으로 가셔서 그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기를 원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소문은 삽시간에 사방에 퍼져나갔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로 몰려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귀신들린 딸을 둔 수로보니게 족속의 한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자신의 딸 속에 들어간 귀신을 쫓아내어 주기를 간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역사학자 요세푸스에 의하면, 이곳은 갈릴리와 인접한 이방 지역으로 경제적으로는 여유가 있었지만, 유대인들에게는 가장 악명이 높은 대적들이 살고 있었던 지역이었습니다.
또한 그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이방인들과는 상종하기를 꺼려하였고, 더구나 그 상대가 여자의 몸이고, 예수님은 유대 사회의 종교지도자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이런 만남은 그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이 여인이 원하고 있는 그런 상황이 불가능하다는 첫 번째 이유는, 예수님 자신이 이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도움을 주실 의사가 전연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보니 예수님의 태도는 당연히 무례할 정도로 거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본문 전체를 보면, 감당하지 못할 어려움을 당해서 도움을 받기 위해 찾아온 이 여인을 예수님은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아무리 비유로 말씀을 하신다고는 하지만 그녀를 개로 취급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3. 한국 속담에 마누라가 예뻐 보이면 처갓집 소를 메어두는 말뚝에도 절을 한다고 하듯이, 우리가 예수님의 모든 언행을 믿음으로 아멘하면서 받아들이지만, 이 본문의 경우는 아무리 생각을 해도 예수님답지 않으며 조금 지나친 면이 있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무례함과 경멸의 극치입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 사회는 이방인들을 개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문제는 유대인이라면 몰라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죄인들을 위해서는 자신의 생명까지도 희생하신 그 사랑을 생각하면 우리도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 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딸이 귀신에 사로잡혀 고통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귀신들린 사람들을 보기 쉽지 않기 때문에 귀신들렸다는 것이 어떤 현상인지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막9:18절에 보면, 귀신들린 아들을 둔 아버지의 말에 "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잡아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고 그리고 파리해진" 다고 하였고, 22절에 가서는,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 다고 했으니, 이와 같은 일을 하루 이틀도 아니고 늘 이런 끔찍한 상황을 목격해야 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예수님을 찾아왔는데, 예수님은 크게 상처 난 곳에 소금을 뿌리는 그런 태도를 보이신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예수님께서 이 여인이 무슨 목적으로 가지고 나를 찾아왔던지 나는 그녀의 일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사건을 마15:23절에 보면 아예 싹 무시하시고 대답도 하지 않습니다.
4. 그런데 본문의 내용을 보면 상황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7절에 보면,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고 하였습니다.
자녀의 떡을 개에게 줄 수 없다는 이 말은, 상대방을 개 취급하는 정도가 아니라, 당신은 유대인들이 식탁에서 먹는 빵 한 조각만큼도 못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 예수님을 욕하거나 불평하고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겨진 내 자존심을 조금이라도 회복하고 내 상한 감정이 더 이상 상해지지 않으려면 이렇게 돌아가는 것이 지혜로운 일인지 모를 일입니다.
그렇지만 내 자존심과 마음의 상처를 살려서 돌아간들 그것이 사랑하는 딸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겠습니까?
귀신에게 사로잡혀 인간 구실도 못하고 매일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이 고통스럽게 귀신에게 끌려 다니는 딸의 미래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래서 이 수로보니게 여인은 사랑하는 딸을 생각하니 이대로 물러설 수 없었습니다.
이것보다 더 심한 수치와 모욕감과 그 어떤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딸을 귀신에게서 건져내겠다는 각오를 가지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녀가 시도한 첫 번째 행동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주」 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자신 스스로를 가리켜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개」 라고 인정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여인은 매우 지혜롭고 인내심이 강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녀가 계속해서 예수님을 향해 던진 말이 무엇입니까?
5. 본문 28절에 보니 이 여인은,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녀들이 먹다가 배불러 남겨 버려지는 음식이 아니라도, 자녀들이 식사 도중에 흘린 부스러기 정도라면 그 집안의 개들도 먹을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빵 덩어리가 아니라 알게 모르게 흘리는 부스러기라도 우리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것은 옳고 저것은 잘못되었다는 태도로 조목조목 따진 것이 아니라 전부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 한 가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개들에게도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 권리는 개인의 욕망이나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 행사하는 그런 권리는 아닙니다.
그녀는 집에서 키우는 개라는 동물이기 때문에, 주인으로부터 개에게 거저 주어지는 은혜가 있으며, 나는 지금 그것을 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그녀가 말하는 권리는 다른 사람들도 원하고, 그래서 이것을 얻기 위해서 서로 싸우고 욕심을 낼만 한 그런 권리가 아니라,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너무 하찮은 것에 대한 권리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6. 이 말씀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요즘 우리들은 너무 풍성한 주님의 은혜와 깊은 하나님의 사랑에 길들여지면서, 그 분이 우리를 향해 베푸시는 축복이 우리를 지나치게 교만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만나를 처음에는 감격해서 받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싫증이 났고, 결국에는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고기를 달라고 하였고, 메추라기 고기가 그들의 이 사이에서 씹히고 있을 때, 이스라엘 진중에 하나님의 재앙이 무섭게 임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들도 구원받은 은혜는 물론이고 믿음으로 얻은 모든 것들이 너무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만족할 줄 모르고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고 불평할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내 뜻대로 되면 누구나 감사할 수 있으며,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세상 사람들과의 믿음이나 신념과는 다른 것이기 때문에, 고난 중에서도 감사할 수 있고, 고통 중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면서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큰 기적이 일어나야 감사 감격할 줄 알아도 작고 은밀한 것에는 눈도 돌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리라"(눅16:10) 는 말씀처럼, 작은 은혜, 작은 축복처럼 보이는 것이라도 감사하고 기뻐하는 자는 더 큰 영광과 축복으로 채워주시는 줄 믿습니다.
7. 수로보니게 이 여인이 주님 앞에서 스스로를 작게 여겼고, 주님의 말씀에 모욕감을 느끼기 보다는 그 분의 말씀이 옳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귀신들려 고통 하는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이 반응하시고 인정하실 때 까지 계속해서 수치와 모욕과 고통을 수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개 같은 여자라고 불려도 좋으니 귀신들린 내 딸의 고통이 끝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런 이 여인의 태도를 통해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내 어린 자식이라도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또 하나의 인격체이며, 원래는 하나님의 소유로서 나에게 잠깐 맡겨주신 귀한 선물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가정의 달을 맞이하면서, 우리 아이들도 스스로 생각하며 살 수 있도록 부모님들이 도와주고, 부모님들 스스로도 아이들을 위해 생각하며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개들도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 정도는 먹는다는 그런 지혜로운 말에 예수님이 태도는 일변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29절에 주저함도 없이 선언하시기를,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이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처럼 찾아가시거나, 맹인의 눈을 치료하시기 위해서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서 눈에 바르거나 하는, 그런 상황을 뛰어넘어 당장 귀신들린 딸아이를 치료 하셨다는 것입니다.
8. 그런데 29절에서 예수님은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이 치료되었다고 선언을 하시기 전에 "이 말을 하였으니" 라고 하셨는데, 그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예수님은 처음부터 그 여인을 무시하는 태도로 일관하셨지만, 실제는 그녀의 믿음을 보고 계신 것이고, 그 믿음에서 지혜로운 말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15:28절에 보면, 같은 사건을 놓고 기록하기를, 그 여인을 향하여 "네 믿음이 크도다" 고 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이 여인에게서 원하셨던 것은 믿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위대한 믿음이 처음에 어디서부터 출발했다고 생각합니까?
물론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무엇보다도 우리가 주목해야 할 중요한 핵심은 그녀의 절박함입니다.
딸을 사랑하는 만큼 부모된 자의 고통이 컸고, 그곳에서 나오는 절박함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자존심도 다 죽이고 예수님에게 매달리게 한 것입니다.
문제는 오늘 우리에게는 사랑하는 자녀를 위한 이런 절박함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모의 입장에서 그것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자녀들을 이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생각하고 사랑한다면, 우리 아이들은 전부 큰 복을 받았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님 앞으로 나아갈 때, 내게 있는 문제나 고통이 어떤 것이든지 상관이 없이, 우리의 간구하는 태도에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귀는 우리의 믿음을 무너뜨리려고 악한 목적으로 시험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축복하시기위해서 또한 선의의 시험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9. 절박함이 있는 인생에게서 용기가 나오기 마련이고 지혜가 나올 수밖에 없으며, 그러므로 믿음의 능력으로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 가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서 주님의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셨지만, 이방인이던 그녀는 인생의 위기라는 절박함 속에서 예수님을 주로 인정했고,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믿었습니다.
행복한 가정, 성공적인 인생은 물질의 풍부함이나 좋은 환경, 완벽한 조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수로보니게 여인과 같은 믿음을 가진 부모에게서 나오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않았"(히11:23)다고 하였고, 그런 부모를 통해 모세는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구원자가 되었습니다.
이런 부모를 둔 자녀는 하나님의 축복을 입으며, 이런 믿음을 자녀들에게 전승하는 부모는 구약의 믿음의 조상들처럼 믿음으로 승리하는 21세기의 최고가는 믿음의 조상이 되는 줄 믿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