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9.9.금식기도의 논쟁(마가복음 2:18-22)
[성경본문] 마가복음2:18-22개역개정
18.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19.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20.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21.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22.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제공: 대한성서공회
금식기도의 논쟁(마가복음 2:18-22/2018.9.9.오전)
1. 지난 6월 18일의 오사카에 6도 지진이 왔고, 7월에는 서일본 13개현에 이르는 폭우피해가 있었고, 그리고 9월 4일에는 오사카를 강타한 21호 태풍과, 이틀 뒤에는 새벽3시 8분에 북해도를 강타한 7도 지진으로, 일본은 그야말로 재난의 더블펀치를 맞고 흔들리고 있습니다.
2020년 동경올림픽을 목표로 나아가야 할 길에 문제가 산더미 같은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연쇄적인 자연 재해로 말미암아 개인은 물론이고 국가적으로 어려움이 많습니다.
방송에 보니, 관서공항과 북해도 치도세 공항의 피해로 매일 61억엔의 적자가 쌓인다고 합니다. 완전복구가 되려면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인데, 그 와중에도 7년 전에 일어난 동북부지방의 지진으로 인한 쓰나미로 원전이 파괴되면서 생겼던 후꾸시마 원전에서 흘러나오는 오염물질을 이제는 더 이상 보관하는데 한계를 느껴 바다에 방류할 것이라고 보도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계속해서 재앙과 사고가 반복될 것이고, 결국에는 국가나 개인이나 힘을 잃고 쓰러질 것입니다.
인간의 한계점이나 현대 문명의 한계점, 그리고 바벨탑 같은 도시문화의 맹점을 우리가 체험하면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것이 오늘 우리의 살길이고 사명인 줄 믿습니다.
2. 레위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면서 사람들을 초청하여 잔치를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자기 직업과 삶의 터전을 버리고 어느 날 갑자기 새로운 인생길을 걷는 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은 로마의 식민지였고, 로마의 정책에 순응하는 헤롯의 권세아래서 국가의 세금을 관리하는 일은 대단한 특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님을 만났고, 그 예수님의 부르심에 주저함이 없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따랐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복합적인 상황이 작용했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먼저는 레위 자신의 환경과 그기에 대한 심경의 동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겉으로 보면 세리라는 직업이 대단해 보이지만, 정권의 앞잡이로서 백성들의 삶을 세금이라는 명목으로 갈취하고 지나치게 그들의 고혈을 쥐어짠다는 것은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런 자신의 행동에 갈등과 고민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리를 그만두고 싶어도 자신의 미래나 경제 문제를 생각하면 그렇게 함부로 결정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레위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이미 듣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분의 권세 있는 가르침과 수많은 병자를 고치면서 행하셨던 기적들은 물론이고, 지금까지의 위선적인 종교지도자들과는 다른 참 선지자의 모습을 전해주는 사람들의 소문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 분에 대한 궁금증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소문의 주인공이 예고도 없이 찾아 오셨고, 더 충격적인 것은 나를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매일 갈등과 고민 속에 빠져 있던 레위는 그 분의 부르심에 결단을 하고 따라 나섰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과 감격을 예수님과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나누기를 원해서 잔치를 했던 것 같습니다.
3. 그런데 그런 기쁨의 자리에 사람들이 찾아와서 하는 말이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고 이렇게 먹고 마시며 즐기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시비를 걸고 있는데, 아무리 권위주의로 똘똘 뭉친 종교지도자들이라고 이유 없이 남을 공격하지는 않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눅18:12절에 보면, 당시에 경건한 유대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을 하고 있었는데, 이 날이 아마 그들이 금식하는 날이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금식하면서 기도하고 있는데, 왜 당신들은 우리의 금식에 따르지도 않고, 도리어 이렇게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즐기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금식은 원래 1년에 단 한 번, 7월10일의 속죄일에 모세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금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벨론 포로 시대 이후로 많은 금식일이 생겨났고, 그래서 공식적인 금식일이 일 년에 4번이 있었는데, 여기에 더하여 바리새인들과 경건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거룩함과 경건의 능력을 위해서 일주일에 두 번씩 개인적인 금식 행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명한 금식은 오직 레23:27에 명하고 있는 속죄일의 금식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마치 자기들의 금식 행위가 정당하고, 예수님 일행이 먹고 마시는 이 일이 매우 불경건하고 모세의 율법에 어긋나는 것처럼 그렇게 문제를 삼고 있는 것입니다.
4. 그런데 금식은 기독교만의 종교적 의식이 아니라, 다른 많은 종교들도 행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신앙과 관계없이 질병을 치료하는 목적이나 건강유지를 위해서, 모델이나 영화배우들이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서 많이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일반 직장인도 70일간 금식하고도 건강에 문제가 없으며, 세계적으로는 120일 금식에 성공한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예수님이 하신 40일 금식은 많은 목사님들도 하고 있으니, 일반적인 관점에서 보면 40일 금식쯤이야 별 것 아니라는 생각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러한 금식의 필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어떤 사본에만 남아 있는 말씀이지만, 마17:21에 보면, 예수님이 변화산에 올라간 사이에, 어떤 사람이 귀신들린 아들을 데리고 와서 제자들에게 고쳐 달라고 했지만, 그들이 감당하지 못하고 있을 때 예수님이 내려 오셔서 귀신을 쫓아내신 후에, 제자들이 왜 우리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냐는 질문에, "기도와 금식이 아니면 이런 유가 나가지 아니하느니라" 고 하시면서, 금식의 필요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잘 살펴보면, 19절 마지막 부분에서는 분명히 예수님이 금식할 수 없다고 하셨는데, 20절에 가서는 금식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5. 분문을 보면 19절에서는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고 하였고, 20절에 가서는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여기에 중요한 의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혼인 잔치의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는 금식이 아니라, 함께 먹고 마시면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 즐기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기독교의 참 신앙의 세계는 마치 결혼잔치와 같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곳에 초대받아 함께 모인 사람들이 신랑으로 인하여 더불어 기쁨을 나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구원받은 자들이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함께 나누는 것이 참 기독교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구원의 감격을 알 길이 없는 바리새인들은 시도 때도 없이 금식을 통해서 자기를 괴롭히면서, 이것을 사람들 앞에 거룩함과 경건함을 자신들의 무기로 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금식기도를 얼마나 잘못하고 있는지를 마6:16절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 금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보이고 자랑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 라고 하였습니다.
6. 기독교는 구원으로 말미암는 축복과 생명의 능력이 넘치는 신앙의 세계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대상은 항상 사람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언행을 주목하고 그 결과를 따라 갚으시는 이도 인간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금식도 간구도 말씀의 묵상이나 선한 행위에 대한 결과도 위에 계신 하나님께 있습니다.
최근에 주목할 만한 세상적인 변화 중에 가장 유려할 만한 변화는, 선악에 대한 기준이나 분별이 현저하게 약화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현상에 비례하여 나타나는 것이 내가 좋으면 모든 것이 선하고 내게 해로우면 그것은 전부 악하다고 생각하는 풍조입니다.
요즘 한국 법정에서 내려지는 여러 가지 사건에 대한 판결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지성을 가진 사람들이라도 선악에 대한 기준에 상당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 본문에서도 명확하게 나타나고 있는 일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모세의 율법에도 없는 금식기도를 만들어 그것을 가지고 자신들의 종교적 권위를 위해 합리화시키면서, 함께 따라 행하지 않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꾸짖고 정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잘못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정당화하려고 하고, 성경이 아닌 제 개인의 생각을 가지고 이리저리 판단하고 비난하는 것이 바리새인들의 행위였습니다.
7. 이러한 종교지도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하게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하게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마23:25-26) 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우리는 우리 자신들은 살펴보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남들이 따라 올 수 없을 정도로 신앙적 열심과 열정이 넘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라도 이렇게 예수님에게 책망을 받고 있으며, 이 시대의 지성과 영성을 겸비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도 선악에 대한 판단이 흐려지거나 은혜의 삶을 살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는데, 우리는 얼마나 부족하고 허물이 많고 연약하겠습니까?
믿음으로 살려고 몸부림쳐도 세상이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고 많은 유혹과 문제를 가지고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하는데, 어떻게 은혜의 삶을 살 수 있으며 어떻게 우리의 믿음을 지킬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예수님이 강조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19절에서 반복하고 있는 내용이 우리가 신랑되시는 예수님과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분과 더불어 혼인잔치를 통해 기쁨을 나누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신앙생활 하다가 시험 들고 낙심합니까? 신앙생활을 해도 기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기쁨이 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신랑 되신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이 아니라 내 뜻대로 내 고집대로 내 마음대로 살기 때문입니다.
8. 1960년대 월남에서 한국군인들도 미군들과 함께 월맹, 베트콩 군대와 싸웠습니다.
미국에서 나중에 조사한 바에 의하면, 베트콩에게 포로가 된 사람들 중에 끝까지 살아남은 자와 빨리 죽은 자는 어떤 사람인지 조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일 먼저 죽은 자는 낙관론자들이고, 그 다음이 비관론자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언제일지는 몰라도 나는 살아 나갈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목사님은 총회장도 지내신 훌륭한 분이고, 교회도 이렇게 크고 부흥하는데 나 하나쯤이야 뭐가 문제가 있겠어, 이분들 따라 가다보면 천국에도 들어가겠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제일 문제덩어리고 믿음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예수 믿어도 별 볼일이 없는 것 보니 나는 틀려먹었어, 예수님도 나를 버렸는지 몰라, 나 같은 것이 열심 낸다고 누가 알아나 주겠어? 하는 사람은 얼마 못가서 시험에 넘어져 교회를 떠납니다.
그러나 지금은 고난이 있고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많아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이 어려움에는 나는 몰라도 반드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있기 때문에, 때가 되면 하나님이 나를 축복해 주실 거야 하고 믿는 사람은 신앙적으로나 인생으로나 복을 받고 성공하는 것입니다.
9. 중요한 것은 인간은 연약하기 때문에 그래서 실수도 많고 낙심도 잘 하기 때문에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며 예수님을 목자로 모시고 그 분의 인도를 받으며 살아야 행복합니다.
인생이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 다윗은 늘 풍성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 바로 이것입니다.
인생의 목자되신 하나님이 다 채워주시고, 모든 위험과 시험과 핍박으로부터 보호해 주셨고,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더니,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임금이고, 장차 오실 메시아의 조상이 되며, 오고오는 믿음의 자손들의 본이 되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바라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주님 없는 믿음의 세계는 반드시 가롯유다와 같은 길을 가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결과가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힘써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본문 20절에 신랑을 빼앗기는 날에는 금식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직접적으로는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이 사건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는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입니까?
그래서 그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스스로 금식하며 애통해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인간이기 때문에 연약해지고 내 안에 은혜의 불씨가 꺼지기 시작하고,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보다는 세상이 더 크게 보이고, 그래서 내 신앙이 흔들릴 때, 그 때는 우리 스스로가 육체의 정욕을 죽이고 내 안을 비워서 예수 그리스도로 채우는 금식기도가 필요합니다.
내 안에 알게 모르게 가득찬 죄와 허물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악한 습관들을 쏟아내는 회개의 금식기도가 필요합니다.
10. 욥은 아무런 이유도 모른 채 모든 것을 잃어버렸을 때, 재를 뒤집어쓰고 금식하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다니엘도 자신과 유대민족이 하나님 앞에 범죄함을 깨닫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덮어 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 (단9:3)하였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문제는 물론이고, 나라와 민족이 어려울 때, 성도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그 분의 도우심을 구하며 금식기도 해야 합니다.
또한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려니 내가 너무 연약하고 부족한 것을 깨달을 때, 내 힘으로는 마귀 대적을 감당할 수 없을 그 때야말로 우리가 금식할 때입니다.
그러나 복음이라는 단어 자체가 기쁨의 소리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평소에는 주님과 더불어 혼인잔치에 신랑을 모시고 함께 기뻐하는 친구들처럼, 힘껏 기뻐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며 기쁨으로 찬양하는 것이 오늘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의 모습인 줄 믿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고행이나 자학이 아니라 하나님 자녀된 자들의 기쁨과 감격이 넘치는 그야말로 신랑을 모신 잔치 집과 같은 그런 기쁨이, 오늘 우리 교회와 여러분의 가정에 넘치기를 소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