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3.11.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소서(누가복음22:39-46)    

[성경본문] 누가복음22:39-46개역개정

39.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40.그 곳에 이르러 그들에게 이르시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시고

41.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42.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43.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44.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45.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46.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제공: 대한성서공회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소서(누가복음22:39-46/2018.3.11.오전)    
1. 뉴욕의 어느 목사님 한 분이 여기저기서 강의를 해 달라고 해서 버스를 자주 이용하다 보니 버스 운전기사들을 알게 되었고, 나중에는 그들을 자기 집으로 초대해서 아침 식사를 하면서 대화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대부분 흑인들이거나 중남미 출신 사람들인데, 어느 날 아침에 4명의 운전기사들과 식사를 하는 중에 그들이 목사님을 부러워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그들에게 자기 직업에 자부심을 가지라고 말했고, 당신들이 만일 크리스챤이라면 버스를 운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을 운전하는 것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8시간의 근무 시간 동안 버스는 여러분으로 인해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거듭된 만남을 통해 이 사람들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정류장이 아닌 곳에서 내려 달라는 손님의 요구를 거절하면 온갖 욕을 하고 횡포를 부려도 참고 있다가 정류장에서 손님이 내리면, 우리 버스를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정중하게 인사를 합니다.
이런 모양을 보고 있던 다른 승객들은 어떻게 저렇게 못된 사람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느냐고 합니다.
그 때 마다 운전기사는 말하기를, 나는 버스를 운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을 운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라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믿는 이 기독교의 생명은 바로 이런 변화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사람들의 인격이 변하고,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삶이 변화되는 것이 기독교의 능력입니다.
이것이 부흥의 역사이며 교회는 이런 일을 위해 지금도 이 지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어린아이는 세상 모든 것이 아름답고 꿈으로 가득하고 미래에 대한 기대가 큽니다.
그러나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하고 가정을 꾸려 나가다 보면, 인생이란게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래서 살면 살수록 기쁨이나 보람을 느끼는 것은 잠깐이고 인생의 짐은 갈수록 무겁기만 합니다.
원하는 것은 많지만 내 힘에는 한계가 있고,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더 많습니다.
더구나 믿음의 사람들의 경우는 바른 길을 가고, 의롭고 정직하게 살기를 원하지만 내 삶의 모든 환경과 조건이 내가 원하는 대로 살도록 만들어 주지 않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인간은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연약하기 때문에 원하지 않는 고난을 당하게 되고, 부족하기 때문에 허물도 많고 실수나 실패를 반복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럴 때 문득 느끼는 것이 무엇입니까?
누군가가 나를 조금만 도와준다면 이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텐데 하면서 막연히 누군가의 도움을 구할 때가 많습니다.
내가 외로울 때 이 외로움을 덜어줄 사람이 없고, 버겁고 무거운 짐으로 흔들려도 나를 붙들어 줄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한 번 쓰러지고 나면 여지없이 뒤에서 오는 사람들에게 밟혀 두 번 다시 일어날 수도 없이 만신창이가 되는 곳이 이 세상입니다.
그만큼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산다는 것 자체가 생각 보다 힘들고 어렵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앞에 두고 슬픔과 고난 가운데 계시는 예수님을 통해서 어리석고 연약하기 때문에 당해야 하는 우리 인생의 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해 보고자 합니다.

3.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도 많이 외롭고 힘들어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히5:7절에 보면 그 분이 이 세상에 계시면서 얼마나 힘드셨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도 우리와 똑 같은 육신을 입고 계셨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으셨고, 그것을 감당하기 어려워 통곡하고 눈물을 흘리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죄도 없으시면서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켜 주시려고, 스스로 우리의 죄짐과 연약함을 대신 짊어 심으로 그것이 예수님을 고통하게 만들었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살펴보면 예수님에게는 남다른 귀한 습관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본문 39절을 보면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시매" 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 시가지의 동쪽에 기드론 시내가 흐르고 그 위로 감람산이 있고, 그 위에 올라가 바라보면 예루살렘 전체를 다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진에서 보는 대부분의 예루살렘 전경이 다 이 감람산에서 바라보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감람산으로 가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기도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4. 그런데 예수님이 습관을 따라서 감람산에 가셨다고 했는데, 이것은 늘 그랬던 것처럼, 혹은 평소처럼, 그런 의미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감람산을 찾으시는 것이 일상화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눅21:37절에, "예수께서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셨" 다고 하는 것을 보면, 감람산에서 예수님이 기도에 힘쓰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드론 시내를 건너 감람산으로 올라가는 길에 만국교회(Church of All Nation)가 있고 그 북쪽으로 겟세마네 동산이 있습니다. 이 만국교회는 전 세계의 성도들이 헌금을 해서 세운 교회이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을 지었습니다.  
예수님이 평소에 늘 기도하시던 장소요 마지막 만찬 후에 오셔서 마지막으로 기도에 힘쓰시던 장소가 바로 이 겟세마네 동산입니다.
이곳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보여주시고 가르쳐 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제자들이 기도해야 하는지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본문 40절에 보니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는 것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많이 경험하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이 유혹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적으로 유혹은 믿는 자를 신앙에서 떠나도록 만들거나 죄 가운데 떨어뜨리기 위한 사단의 시험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내용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에도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눅11:4) 라고 하셨습니다.

5. 인간의 고통의 근본은 죄 때문입니다. 죄가 인간을 고통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죄의 출발점은 사단의 유혹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내 안에 아무런 욕심이 없다면 그 어떤 유혹으로도 죄가 들어올 수 없습니다.
내 안에 있는 호기심이나 욕심이나 야망이 마귀의 유혹에 끌려 인간을 고통하게 만드는 죄를 낳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말하기를,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 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욕심이 없는 인간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안에는 내 스스로도 다 세어볼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욕심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만족이 없고, 기쁨이나 감사 대신에 원망과 불평이 넘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욕심과 탐욕과 호기심이 유혹을 받아 넘어질 때, 인생은 죄의 노예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셨고, 또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경험한대로 기도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연약한 만큼, 내가 부족한 만큼, 내가 받은 사명이 크면 클수록 더 많이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본문 43절에, 기도하시는 예수님에게 천사가 나타나 힘을 더해 주었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6.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기도는 하늘 문을 여는 능력입니다.
계5:8에 보면, "그 어린 양 앞에---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고 하였고, 8:3-4절에도,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고 했습니다.
성도의 기도는 그 어떤 기도도 다 하나님이 보시고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연약해도 기도하는 사람은 강합니다.
중세의 종교개혁자인 존 낙스(John Knox)는 말하기를, 기도하는 한 사람이 기도하지 않는 한 민족 보다 강하다고 하였고, 스코틀랜드의 메어리 여왕(Mary, Queen of Scots)은 말하기를, 존 낙스 한 사람의 기도가 백만 대군보다 더 무섭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내 힘으로 안 될 때에는 이것이 하나님이 기도하라는 신호이니 즉시 엎드려 기도해야 합니다.  
다니엘 기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진 것처럼, 지금도 전 세계에서 수없는 기도의 간증들이 응답받은 성도들의 입을 통해서 고백되고 있습니다.
요즘 한국에서 여성들 사이에서 미투(나 역시) 운동이 확산되면서 정치, 교육, 문화계의 지도자들이 과거, 현재를 막론하고 성적인 유혹을 이기지 못해 일어난 불미스러운 일들이 만천하에 낱낱이 드러나면서 한국 사회를 흔들고 있습니다.
이렇게 유혹은 누구에게나 다가오고 연약한 인생은 누구나 넘어질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은 이길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성도는 고난을 이기고 유혹을 이기고, 내 안에 자리 잡은 온갖 욕심의 세력을 꺾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승리를 얻는 줄 믿습니다.

7. 그런데 본문 42절에 보면, 예수님의 기도의 내용이 나오고 있는데, 이 기도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입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잔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아버지에게 내가 마실 이 고난의 잔, 즉 십자가의 죽음을 면하게 달라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은 누구나 통과해야만 하는 고통이지만, 그 누구도 죽음을 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육신을 입으신 예수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어떤 개인의 죽음이 아니라,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죽음을 맛보는 십자가였기 때문에 그 고통과 수치와 버림받는 처참함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할 수만 있으면 십자가의 죽음을 면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본문 44절에 보면,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었더라" 고 하였으니, 예수님도 십자가의 죽음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셨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시던 그 순간은 십자가의 죽음을 피하고 싶도록 만드는 사단의 유혹이 어느 때 보다 강렬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사단은 왜 어리석게도 다른 사람들의 죄를 대신해서 네가 억울하게 희생해야 하느냐, 꼭 이 방법이 아니고는 없겠느냐고 하면서, 온갖 이유를 들면서 얼마나 유혹이 많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는 단순하게 십자가의 죽음을 피하려고 하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8. 우리가 평소에 하기 쉬운 기도에 대한 오해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는 그 어려움을 피해 갈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기도하거나,
내가 특별히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얻거나 허가를 받기 위해서 기도합니다.
좀 더 성숙한 기도의 경우는 고난을 이기게 해 달라고, 욕심을 버리기를 기도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 고난의 잔을 내게서 옮겨 달라는 내 뜻을 이루기 위한 기도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기도였습니다.
인생의 여정 가운데 우리는 수많은 고난의 잔을 마시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배신으로 말미암은 고난의 잔, 억울한 누명을 쓰고 마셔야 하는 고난의 잔, 사랑에 울고 돈에 속아서 마셔야 하는 그런 쓴 잔을 우리는 다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마셨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가 느꼈던 감정이나 고통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분노와 슬픔, 낙심이나 자괴감 같은 것들입니다. 그 때의 상처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바로 이렇게 쉽게 씻을 수도 없고,  간단히 지울 수도 없는 이런 상처를 어떻게 치료하며 어떻게 회복할 수 있겠습니까?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뜻을 먼저 구하는 기도는 우리를 이런 고통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 뜻대로는 되지 않아서 섭섭할 수는 있어도,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되었기 때문에 섭섭한 일도 감사할 수 있으며,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도 인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글므로 과거에 일어났던 일이라도, 아 그 때의 그 일은 아버지의 뜻대로 되었구나 하고 믿고 감사하면, 그 어떤 상처나 슬픔에서도 벗어날 수 있는 줄 믿습니다.

9. 예수님도 십자가 죽음을 앞에 두고 이 잔을 내게서 옮겨 달라고 기도하셨지만, 십자가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그것을 받아들일 때, 47절에 보니 가롯 유다가 찾아와서 입맞춤을 할 때에도 순순히 그 배신의 입맞춤을 허락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내 뜻을 버리고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의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기도할 시간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알고 슬픔을 인하여 잠들었던 제자들의 모습은 부끄러운 것들뿐이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죽음이 하나님의 뜻 인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칼이나 휘둘러서 그 위기를 모면해 보려는 어리석음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죄도 없는 대제사장의 종인 말고의 귀를 베어버리는 실수도 범한 것입니다.
52절에서 예수님의 표현대로 강도들이나 하는 짓을 제자들도 범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연약한 육신과 마음으로는 시험을 이길 수 없지만, 기도하면 우리도 존 낙스 처럼 백만 대군이 무섭지 않은 힘으로 대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사방이 다 나를 해롭게 하는 것뿐이라도 기도하면 은혜의 삶을 살 수 있는 줄 믿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에 의해서 세워진 하나님의 집이요,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이 고난의 잔을 내게서 옮겨 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는 기도의 장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키고 사람들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새사람으로 만들려면, 우리 모두가 예수님 처럼 기도하는 사람이 되고, 예수님 처럼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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