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0.22.이스라엘의 불편한 진실(호세아12:7-14)

[성경본문] 호세아12:7-14개역개정

7.그는 상인이라 손에 거짓 저울을 가지고 속이기를 좋아하는도다

8.에브라임이 말하기를 나는 실로 부자라 내가 재물을 얻었는데 내가 수고한 모든 것 중에서 죄라 할 만한 불의를 내게서 찾아 낼 자 없으리라 하거니와

9.네가 애굽 땅에 있을 때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내가 너로 다시 장막에 거주하게 하기를 명절날에 하던 것 같게 하리라

10.내가 여러 선지자에게 말하였고 이상을 많이 보였으며 선지자들을 통하여 비유를 베풀었노라

11.길르앗은 불의한 것이냐 과연 그러하다 그들은 거짓되도다 길갈에서는 무리가 수송아지로 제사를 드리며 그 제단은 밭이랑에 쌓인 돌무더기 같도다

12.야곱이 아람의 들로 도망하였으며 이스라엘이 아내를 얻기 위하여 사람을 섬기며 아내를 얻기 위하여 양을 쳤고

13.여호와께서는 한 선지자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고 이스라엘이 한 선지자로 보호 받았거늘

14.에브라임이 격노하게 함이 극심하였으니 그의 주께서 그의 피로 그의 위에 머물러 있게 하시며 그의 수치를 그에게 돌리시리라제공: 대한성서공회

이스라엘의 불편한 진실(호세아12:7-14/2017.10.22.오전)


1. 제가 일본에 와서 전도를 시작했던 초기 사역 때에 주변 사람들에게 전도를 하면, 먼저 기독교의 잘못된 이미지를 구실로 삼아 사람들이 저에게 공격해 왔습니다.
기독교는 십자군을 통해서 엄청난 학살과 약탈을 일삼았다던가, 신 구교를 같은 기독교로 보는 일본 사람들의 인식이, 같은 기독교 안에서 서로 용서하기는커녕 학살과 권력투쟁을 일삼았다던가, 최근에는 북아일랜드의 분쟁을 통해 희생된 사람들을 이야기 하면서 기독교를 폄하하는 그런 소리를 많이 들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일본에 있어서 기독교는 외래 종교지만, 불교나 신사는 토속종교로 일본 사람에게 정서에 가장 잘 어울리는 종교이고, 자신은 불교를 믿지 않으면서도 불교는 자비의 종교인데 기독교는 사랑이 부족하다고 합니다.
심지어 기독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종교나 단체들이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고 뉴스에 등장하면 그들은 그것 가지고 또 문제를 삼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로는 일본어가 많이 부족하고, 또한 논쟁에 취약한 성격이고 보니 상당히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가장 힘들었던 것은 그들이 기독교에 대하여 하는 말이 대부분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기독교는 분열과 분쟁의 역사라고 할 수 있으며, 세상의 어떤 조직이나 단체보다도 배타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일본 교회는 타 지역에서 새로운 신자가 전입해 오면, 이 사람을 받아들이느냐 마느냐로 심사를 하고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이 되면 거절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2. 지금도 세상에는 교회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교회를 비난하고 공격하며 어떻게 하던지 허물과 문제를 들어내어 기독교를 무너뜨리려고 하는 세력이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라는 존재가 세상에서 구원의 방주로, 또는 세상의 빛이나 소금으로의 사명을 감당하려면, 복음으로 인한 고난과 많은 희생을 감당하지 않으면 결코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완수해 나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교회를 사랑하고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하며 성도의 교제를 나누고, 세상을 향하여 꾸준히 복음을 전하면서 선을 행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우리의 시선이나 소망이 세상을 향하지 않고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피 흘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사랑과 무한한 은혜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며, 또한 우리가 세상적인 유행이나 가치관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생명을 오직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생명의 말씀 위에 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원래 교회는 죄인들과 연약한 인간들이 모이는 집단이기 때문에 부족한 부분이 많을 수 있으며, 때로는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으며, 이로 인하여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공격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천여 년 동안 일관되게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부족하고 연약한 지상교회를 향한 변함없는 하나님의 은혜요 성령님의 도우심 때문입니다.

3. 올해 1월 21일에「인생의 멍에」라는 제목으로 시작한 호세아서 강해가 오늘까지 22번의 설교로 이제 13, 14장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일 년 가까운 세월을 통해 본문의 말씀들을 묵상하면서 느끼는 것은, 과연 이스라엘이 이방나라와 민족들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과, 왜 하나님은 이러한 이스라엘을 끝까지 놓지 않고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가족이나 형제들이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들이 사람들 앞에서 자랑스러운 존재가 되면 기쁘고 고마운데, 잘못된 언행으로 인해 사람들의 공격을 받거나 소문거리가 되면, 그것이 본인은 물론이고 그런 형제와 가족을 둔 우리 자신의 잘못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 하나님도 못난 이스라엘 때문에 얼마나 많이 속이 상하셨고, 이방인들 앞에서 얼마나 부끄러우셨으며, 그들 때문에 얼마나 수모를 많이 당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것은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이고 더하면 더 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쨌든 여로보암으로 부터 시작하여 호세아에 이르는 19명의 왕들 중에 누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백성을 사랑한 왕이 있었습니까?
북왕국 이스라엘 역사 200년 동안 정치, 종교, 경제, 문화 등의 방면에서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을 제외하고는 하나님 중심으로 살았던 인물이 누가 있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상숭배와 범죄로 망해가는 이스라엘에게 회개를 촉구하며 돌아오라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것은 그들이 언약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4. 사람들이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는데, 사회생활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혈연이나 골육이라는 것이, 세상의 그 어떤 힘으로도 깨뜨릴 수 없는 단단한 연결고리로 묶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못난 존재라고 해도,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이 혈육이라는 연결 고리 안에서는 다 용서가 되고 용납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새롭게 느낄 수 있는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세상에서 제일로 단단하게 여기는 이 혈연, 골육이라는 단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것입니다.
인간의 사랑이 아무리 숭고하고 아름다워도 한계가 있고 시간이 지나면 혈육도 소멸할 수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이 지상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그 은혜는 완벽하고 영원하고 또한 가장 아름답고 값진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결혼식 때 서약하는 신랑 신부의 사랑도 아무리 성실하게 지켜도 100년을 넘지 못합니다.
부모 자식 간의 사랑도 한 세대를 지나면 아무도 기억해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태어나서 온갖 사랑을 평생에 이 한 몸에 다 받아 누린다고 해도, 이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과 무한한 은혜를 받지 못했다면 이 사람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고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우상숭배와 온갖 범죄로 얼룩이 져도 그들은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입은 존재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다른 말로 표현하기를 언약의 백성이라고 했습니다.
감사하게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는 물론이고 세상들 앞에서도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그런 인생들이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해 주셨고,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고, 이스라엘보다 더 부끄럽고 흉악한 죄인이지만 십자가의 보혈로 그 분의 영원한 자녀로 삼아 주셨으니, 우리에게는 오직 감사와 기쁨이 있을 뿐입니다.
  
5. 본문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이스라엘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까?
7절에 보면 에브라임, 곧 이스라엘 그들은 상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상인이라는 말을 히브리어 원어로 보면 「케난」 즉 가나안인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호세아서에서 나타난 이스라엘의 이미지는 부패하고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가나안 사람, 즉 장사꾼, 무역상인을 같은 존재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도덕도 윤리도 제대로 된 가치관도 없는 이런 가나안 장사치에 비유를 할 수 있습니까? 도대체 그들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여기에 대한 사실을 아모스 선지자는 암8:4-6절에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를 삼키며 땅의 힘없는 자를 망하게 하려는 자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가 이르기를 월삭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곡식을 팔며 안식일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밀을 내게 할꼬, 에바를 작게 하고 세겔을 크게 하여 거짓 저울로 속이며, 은으로 힘없는 자를 사며 신 한 컬레로 가난한 자를 사며 찌꺼기 밀을 팔자 하는도다".
이것이 그 당시의 가나안인들이 하는 행위였고, 이것이 당시의 이스라엘의 상행위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이스라엘이 스스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불편한 진실이었습니다.
더구나 그 뒤에 기록된 7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두고 맹세하시되 내가 그들의 모든 행의를 절대로 잊지 아니하리라" 고 하였습니다.
이 또한 이스라엘이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불편한 사실이었습니다.
이유는 8절에 내가 능력이 있어서 재물을 얻었고, 내가 수고한 결과로 부자가 되었는데, 왜 하나님이 나를 심판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6. 시대마다의 도덕성을 한 눈에 보려면 당시의 장사꾼들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우리 시대는 정치꾼이 백성을 속이지 않으면 정치를 할 수 없고, 장사치가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이문을 낼 수 없으며, 종교, 교육가가 위선을 떨지 않으면 권위가 설 수 없다고 했는데, 당시의 이스라엘의 모습이 그랬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의 장사술은 거짓말과 교묘한 사기술로 매매를 일삼았습니다.
그런데 호세아 12장에서 야곱을 부정적인 내용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유는 야곱의 잘못된 행위가 지금 이스라엘 가운데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믿음의 조상 야곱을 자기들의 아비라고 불렀습니다.
우연이라고 말하기에는 그 표현이 너무나 선명한 것은, 자식은 아비를 닮기 때문입니다.
요8:38에 보면,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들은대로 진리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고, 너희는 조상들의 잘못된 유전을 따라 악을 행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44절에 가서는 유대인들이 경악할 말씀을 하시는데,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고 했습니다.
그래서 콩 심은 곳에서 콩이 나고 팥 심은 곳에서 팥이 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부모가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으면 자식은 그것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되며, 나중에는 그런 것을 지혜로운 처세술로 보게 됩니다.

7. 결국 이스라엘이 신앙적으로는 이미 애급 사람들처럼 우상숭배로 더러워졌고, 윤리적으로는 가나안 사람들처럼 타락 할대로 타락해 버렸는데, 이러한 그들의 모습에서 선지자 호세아는 형을 속이고 온갖 거짓말로 범죄한 야곱을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13-14절에서 다시 야곱의 잘못된 행위를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이 장자 명분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그것 때문에 도망자의 신세가 되어 삼촌 라반의 집에서 오랜 세월 얹혀살면서 그곳에서도 똑같은 짓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12절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하나님도 야곱에 대하여 섭섭한 마음을 가진 것 같습니다.
라헬을 아내로 삼기 위해서 야곱이 무엇을 했습니까?
자기를 속였다고 미워하는 삼촌 라반을 20년 동안 섬기고, 라헬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20년 동안 양을 치면서 재산을 불린 이 야곱이, 그의 갈길을 인도하시고 많은 허물을 용서하시며 많은 대적으로부터 보호하며 지혜를 주셔서 하는 일마다 형통하게 만들었던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서 한 일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늘 어렵다고 느끼는 것 몇 가지 있는데, 첫째는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것이고, 둘째는 사람을 말씀으로 변화시켜서 새사람 되게 하는 것과 셋째는 교회의 부흥입니다.
물론 이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하시는 일이지만, 주님의 손발이 되어 일하는
사람으로서 대단히 어려운 일이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내 한 사람의 잘못된 판단과 어리석음과 실수로 인하여 많은 것을 잃어버리게 만들고 망치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8.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역사라고 하는 그 사건들을 통해서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일찍 깨달았더라면 결코 그 인생길이 험악하지 않았을 것이고, 이스라엘이 이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가나안인으로 불리는 수치도 당하지 않았을 것이고, 앗수르에 멸망당하는 그런 고통도 겪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시대마다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끊임없이 말씀을 선포하도록 하셨지만,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말씀을 고리타분하게 여기고, 오직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아메바 같은 그런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중동에서 양을 치는 목자들이 가끔 양들이 말을 듣지 않으면 과감하게 그 다리를 하나 꺾어 버린다고 합니다.
그러고 나서 그 양을 가슴에 안고 치료하고 회복하는 동안에 목자와 양의 관계가 아름답게 회복이 된다고 합니다.
하나님도 때때로 우리가 말을 듣지 불순종하여 거역하면 우리 인생의 소중한 것들을 쳐서 꺾어 버리십니다.
시편기자도 고백하기를,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119:67) 고 하였고, 71절에 가서는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알게 모르게 말씀에서 멀어지고, 그러다 보니 예배와 말씀에 소홀해지고, 나중에는 남들도 다 그렇게 하는데 하고, 자신을 변명하다보면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9. 사람들은 은혜를 입으면 처음에는 그것이 고맙고 기쁜 일이지만, 그 은혜가 계속해서 반복이 되고 시간이 지나면,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되고, 마침내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못하고 도리어 그것이 불편한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에게 불편한 진실이 무엇입니까?
말씀에 순종하면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는 길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길을 고집하다가 멸망한 그들의 고집과 어리석음이 문제였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철저하게 망가진 이스라엘을 마지막 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품에 다시 안으시려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그 사랑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자신들이 아비라고 부를 정도로 흠모하고 자랑하던 그 조상 야곱의 잘못된 모습이 드러나면서, 그 모습이 있는 그대로 자신들의 모습으로 비쳐지고 있다는 그 사실이 불편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기독교 2천년의 역사가 얼룩지고 사람들의 비난을 받는 이런 현실이 세상을 향해 복음을 전해야 하는 우리에게 생각 이상으로 불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모든 불편한 진실을 뛰어넘어 십자가로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마치 탕자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도무지 아들이라고 인정할만한 그런 모습을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그렇게 망가진 우리를 용서하시고 불쌍히 여겨 먼저 안아 주시는 아버지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과거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었고, 오늘 우리가 받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선언하기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롬5:20하)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불편한 진실은 어느 것 하나라도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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