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0.8.사람의 마음, 하나님의 마음(호세아11:1-12)
[성경본문] 호세아11:1-12개역개정
1.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2.선지자들이 그들을 부를수록 그들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
3.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았음에도 내가 그들을 고치는 줄을 그들은 알지 못하였도다
4.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 그들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었노라
5.그들은 애굽 땅으로 되돌아 가지 못하겠거늘 내게 돌아 오기를 싫어하니 앗수르 사람이 그 임금이 될 것이라
6.칼이 그들의 성읍들을 치며 빗장을 깨뜨려 없이하리니 이는 그들의 계책으로 말미암음이니라
7.내 백성이 끝끝내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그들을 불러 위에 계신 이에게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8.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9.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10.그들은 사자처럼 소리를 내시는 여호와를 따를 것이라 여호와께서 소리를 내시면 자손들이 서쪽에서부터 떨며 오되
11.그들은 애굽에서부터 새 같이, 앗수르에서부터 비둘기 같이 떨며 오리니 내가 그들을 그들의 집에 머물게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12.에브라임은 거짓으로, 이스라엘 족속은 속임수로 나를 에워쌌고 유다는 여전히 하나님과 거룩하고 신실한 자들에 대하여 정함이제공: 대한성서공회
사람의 마음, 하나님의 마음(호세아11:1-12/2017.10.8.오전)
1. 가끼누마센신(柿沼洗心)은 사이다마껜(埼玉県) 출신으로 독학으로 불교의 깊은 경지에 들어간 자로, 자신이 깨달은 것을 삶을 통해서 실천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인 사람입니다.
그는 선심회(洗心会)라는 법인을 만들어 인류평화에 이바지 하면서, 특별히 오랫동안 한일 불교복지 협회장을 지내면서 양국의 관계를 개선해 나가는데 많은 힘을 쏟았습니다.
그 중에는 경도의 귀 무덤의 12만 6천여의 혼령들을 400여년 만에 그들의 영혼이 조국에 돌아가도록 하는 일과, 일본 각지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조선 사람들을 위해서 위령탑을 세우며, 안중근 의사의 혼령을 위로하는 등, 한국 사람들도 하지 못하는 귀한 일들을 앞장서서 행하며, 특히 일본인 조상들이 조선반도에서 행한 만행들을 진심으로 참회하는 마음으로 한일 선린우호를 위해서 몸을 바쳐 헌신한 사람입니다.
그의 이러한 지속적인 행적을 보고, 지금까지 일본을 증오하고 원수로 생각하던 많은 사람들의 마음들이 열렸고, 한일 양국의 일반 시민들이 그의 활동에 많은 응원을 보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외형상으로는 불교인 같은데, 그 속사람은 결코 불교에 메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타인에게 종교를 강요하지 않으며, 대신 무슨 종교를 믿던지 그 가르침을 각자의 삶을 통해서 나타내는 것이 참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참된 종교적 영성은 종교에 상관없이, 「かたよらず、こだわらず、とらわれず」 즉, 치우치지 않으며, 집착하지 않으며, 사로잡히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종교로서 가장 중요한 핵심인 죄 문제나 구원에 관한 문제, 소위 복음에 관한 내용은 하나도 없기 때문에, 고통 하는 인간의 문제를 전연 외면하고, 오직 선행을 통해 새롭게 된 인간들이 서로 사랑하며 의를 이루면 천국이 임한다는 그런 분위기입니다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의 종교인을 통해서 한일 양국의 많은 사람들의 닫힌 마음이 열리고, 이런 흐름이 양국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고 있다는 것은, 종교나 국가 민족의 차원을 넘어서 귀하고 훌륭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2. 물론 우리 기독교는 지금까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도록 일본 복음화와 선린우호를 위해서 타종교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일본을 위해서 사랑과 헌신을 쏟아내고 있지만, 한 편으로 우리도 역사문제나 타 종교에 좀 더 관심을 갖고 다가간다면, 이것 또한 선교적 차원에서 새로운 접촉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종교나 국가 민족, 문화의 차이가 아니라 결국 사람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상의 모든 물이 하나의 바다로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인해서 강제로 막아놓은 물은 연결은커녕 시간이 갈수록 썩고 생명이 살리는 물이 아니라 생명을 죽이는 물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어디에 살던지 무엇을 하던지 다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그 마음을 많은 사람들이 종교나 문화나 역사나 어떤 가치관이나 이익을 위해서 분리시키고 가두어 놓기 때문에, 그곳에서 대립과 전쟁과 갈등이며 고통이 쌓이는 것입니다.
한국에서도 존경하는 일본 사람들이 많이 나오고, 일본에서도 존경하는 한국 사람들이 많이 나온다면, 한일의 우호관계는 물론 선교사역에 더 큰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3. 본문에 나오는 내용을 보면 1절 이하에서는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나오고, 5절 이하로 내려가면 이러한 하나님 앞에서의 인생들의 생각이나 마음이 나오고, 다시 8절 이하에서 하나님의 마음이 보이고, 12절 마지막에는 다시 하나님을 향한 인간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호세아를 읽어 내려가면 갈수록 참담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유는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인간이 이렇게 까지 끝을 모를 정도로 타락하고 추락하고 망가질 수 있느냐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요즘 사람들의 심성이 지나치게 이중성을 갖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남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내가 가지고 있으면 그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지만, 내가 누리지 못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누리는 것을 보면 참을 수 없는 부끄러움과 분노가 솟아오릅니다.
나는 온갖 막말을 쏟아내어도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지만, 남들이 나를 욕하고 비판하면 견디지 못합니다. 그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응징하려고 합니다.
이런 마음에 무슨 감사를 기대할 수 있으며,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무슨 미래를 기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스라엘을 향한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이야말로 참담함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4.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배우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본문 1절에 보면 과연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자기 자식처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내 아들을 애급에서 불러 내었" 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자식을 키워본 부모들은 잘 아시겠지만 특히 한국 사람들은 아들이라고 하면 무조건 용서하고 이해하고 심지어 거짓말에 잘도 속아줍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맹목적인 눈먼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아들에게 걸고 있는 기대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내 아들" 이라는 표현은 매우 강력하고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마7:11절에 보면, 예수님의 말씀으로 그 앞 구절에서,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고 하면서,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고 하셨습니다.
아들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잘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또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시험하기 위해서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이 말씀대로 아들을 제물로 드리려고 할 때, 그 때 하나님의 응답이 무엇이었습니까?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22:12) 고 하셨습니다.
100살에 낳은 아들까지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려는 아브라함의 마음과 행위는 더 이상 그에게 다른 무엇을 요구할 것이 없을 정도로 완벽한 신앙의 증거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 은혜에 보답하려는 마음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내 아들까지 하나님이 원하시면 드릴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마음 그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분은 우리를 위해 자기 독생자를 보내시고 우리를 위해 희생하셨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요 마음인 것입니다.
5. 그런데 지금 우리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그리고 이스라엘의 마음은 어떠하였습니까?
2절에 보니 하나님이 그들을 부를수록 사랑할수록 그들은 점점 멀리 떠났다고 했습니다.
그냥 떠난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우상에게 분향하며 자신들을 제물로 드리고 있었습니다.
3절에 보니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내 팔로 안았다고 하였고, 4절에 보면 짐승을 길들일 때 사용하는 멍에가 아니라 사랑의 줄로 이끌었다고 했습니다.
이 사랑의 줄이 무엇입니까?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본 받아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 안에는 당연히 지와 정과 의가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정의가 없는 짐승처럼 사람의 줄인 멍에가 아니라 사랑의 줄, 곧 아버지의 사랑으로 그들을 양육하고 함께 하시면서 그 가는 길을 이끌어 주셨던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으로 교육이 잘 된 어린아이들은 부모의 말 한 마디에 움직이고 순종합니다.
그러나 못된 자식은 어릴 때부터 부모가 고함질러도 못 들은 척 하고 반항합니다.
그리고 심한 경우에는 부모가 싫어하고 미워하는 짓만 골라서 행동합니다.
호세아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4절에 보니 하나님은 도리어 그들이 원래 짊어졌던 그 멍에, 마치 먹을 것을 앞에 둔 짐승들을 위해서 멍에를 벗겨 편하게 먹도록 하는 것처럼 그렇게 이스라엘의 멍에를 벗겨 주시고 먹을 양식을 주었다고 했습니다.
6.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응은 의외였습니다.
3절에서는 하나님이 그들을 품에 안았지만, 5절에 가서는 그들의 주인처럼 행세하던 애급을 연모하면서 하나님께는 돌아가기 싫어하였고, 7절에서는 고집이 센 짐승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에 점점 멀리 떨어졌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은혜를 입을수록 그들의 마음은 강퍅해 졌고, 아버지의 사랑으로 양육을 받을수록 말씀을 배척하며 용서를 받으면 받을수록 그 마음이 교만해 졌으며, 아버지의 사랑을 귀하게 여길 줄 몰랐습니다.
이같이 인간의 마음은 받으면 받을수록, 누리면 누리는 만큼 은혜의 소중함을 모릅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말씀으로 양육 받고 자신의 눈동자처럼 그들을 아끼셨지만, 결국 이스라엘은 아무것도 아닌 우상에게로 달려갔으며, 기꺼이 그 종이 되기를 자청했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예수님이 하신 말씀대로,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마7:6) 절의 말씀 그대로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세월이 흘러도 변할 줄 모르는 인간의 마음입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우리 안에는 여전히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죄성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죄의 세력을 인간의 힘으로는 제어하거나 극복하거나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셨고, 우리의 힘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를 이기고 유혹과 온갖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해 주신 것입니다.
7.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축복의 땅인 가나안에서 복의 근원이 되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늘 고통과 문제가 떠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자신들이 받은 축복과 은혜, 구원의 능력이 어디서 오며 누구로 말미암은지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의 보혈의 은총으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내가 받은 이 축복이 무엇이며 누구로부터 말미암은 것인지 알지 못할 때, 우리도 이스라엘처럼 고통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독생자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한 사람도 죄 때문에 멸망하지 않고 다 구원받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손으로 직접 만드신 인간이 고통하고 망하는 것을 절대 기뻐하지 않으시며, 다 복 받고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기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의 눈에 하나님 보다는 세상이 먼저 보이고, 하나님의 뜻 보다는 내 고집과 생각을 앞세우다 보니, 점점 영의 눈이 어두워지고, 그래서 영적 분별력을 상실하고 결국에는 죄에게 사로잡혀서, 나는 내 마음대로 자유롭게 산다고 생각하지만, 결국에는 죄에 사로잡힌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본문 7절에 보면, 마침내 그들이 축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떠나는데, 그냥 알게 모르게 떠나가는 것이 아니라 끝끝내 내게서 물러갔다고 했는데, 이전 성경 번역을 보면 결심하고 물러갔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결심은 원어로 「타라」 라고 하는데 이것은 집착하다, 메달리다, 치우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그를 떠나는 것을 집요하게 계획적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8. 그렇다면 하나님을 떠나 죄 가운데서 내 마음대로 사는 결과가 무엇입니까?
8절에는 이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하기를 불붙는 것 같다고 하였고, 9절에는 맹렬한 진노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구절들은 범죄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 중에라도 여전히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변함이 없는 하나님의 긍휼을 말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죄에 대한 엄중한 심판이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지금까지 오래 참으셨는데 조금 더 참으시면 될 것인데 왜 지금에 와서 징계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 하심이라"(히12:6) 고 하였고, 계속해서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는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12:11) 고 하였습니다.
이와같이 객관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징계는 단순히 죄에 대한 심판으로 보여지만, 그 내면에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의사가 암에 걸린 중환자를 수술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그 자녀된 자의 생명과 건강과 미래의 영원한 축복을 위해서 그들에게 뿌리를 내리고 떠나지 아니하는 죄의 세력을 분리하시기 위함입니다.
암 덩어리를 떼어 내어야 사는 것처럼, 이스라엘에게서 죄라는 죽음의 암 덩어리를 떼어내는 작업이 바로 징계요 재앙이요 일시적인 심판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은 진노와 심판 중에라도 그들에게 소망을 주기 위한 메시지입니다.
바로 이것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이며,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를 십자가의 보혈로 구속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인 줄 믿습니다.
9. 인간의 마음은 은혜를 입으면 입을수록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나중에는 모든 것이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음에도 불구하고, 전부 나의 공로요 나의 소유요 내 능력이라고 생각하고, 은혜를 베푼 자를 잊어버리고 그에게서 점점 멀리 떠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은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면서도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교만하며 하나님을 떠나고 잊어버려도, 그들이 언약의 백성이요 십자가의 보혈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들을 잊지 못하고, 그들이 멀리 떠나가면 떠나갈수록 그 사랑하는 마음이 불붙는 듯이 애통해 하시고 아버지의 마음으로 긍휼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분의 사랑에 등을 돌렸고, 고멜처럼 그 사랑을 배신하고 떠나갔지만, 하나님은 십자가의 보혈로 더러워진 우리 마음을 씻어 주셨고, 지금도 죄의 유혹을 받아 떠나간 우리를 간절히 부르시고 애통하는 마음으로 찾으시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줄 믿습니다.
오늘 이러한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은혜가 이 땅에 가득하기를 소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