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4.30.부끄러운 줄 모르는 이스라엘(호세아4:11-19)
[성경본문] 호세아4:11-19개역개정
11.음행과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마음을 빼앗느니라
12.내 백성이 나무에게 묻고 그 막대기는 그들에게 고하나니 이는 그들이 음란한 마음에 미혹되어 하나님을 버리고 음행하였음이니라
13.그들이 산 꼭대기에서 제사를 드리며 작은 산 위에서 분향하되 참나무와 버드나무와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하니 이는 그 나무 그늘이 좋음이라 이러므로 너희 딸들은 음행하며 너희 며느리들은 간음을 행하는도다
14.너희 딸들이 음행하며 너희 며느리들이 간음하여도 내가 벌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남자들도 창기와 함께 나가며 음부와 함께 희생을 드림이니라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망하리라
15.이스라엘아 너는 음행하여도 유다는 죄를 범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 너희는 길갈로 가지 말며 벧아웬으로 올라가지 말며 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맹세하지 말지어다
16.이스라엘은 완강한 암소처럼 완강하니 이제 여호와께서 어린 양을 넓은 들에서 먹임 같이 그들을 먹이시겠느냐
17.에브라임이 우상과 연합하였으니 버려 두라
18.그들이 마시기를 다 하고는 이어서 음행하였으며 그들은 부끄러운 일을 좋아하느니라
19.바람이 그 날개로 그를 쌌나니 그들이 그 제물로 말미암아 부끄러운 일을 당하리라제공: 대한성서공회
부끄러운 줄 모르는 이스라엘(호세아4:11-19/2017.4.30.오전)
1. 여행객에게 태국은 동남아시아 가운데서 가장 인기가 있는 국가라고 생각합니다.
자유로운 분위기와 흘러넘치는 사람들과 물자, 그리고 친절과 미소는 한 번 찾아간 사람들을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찾아오도록 만드는 그런 곳입니다.
그리고 남자를 여자로, 여자를 남자로 만들 정도로 못하는 것이 없는 곳이 수도 방콕입니다.
그런데 타이의 방콕에 가면 가는 곳 마다 불교 사원이 있고, 각 사원 안에는 또 많은 불상들이 있는데, 어떤 불상들은 고뇌에 차 있는 모습을, 어떤 불상은 자비와 사랑의 모습으로, 또는 표정을 알아보기 힘든 그런 얼굴 등, 여러 종류의 모습을 하고 서 있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불교는 인간의 근본적인 고통인 生, 老, 病, 死의 네 가지 고통에 더하여,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에서 맛보는 고통, 미워하는 원수를 만나는 고통,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할 때에 당하는 고통, 인간의 정신과 육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 맛보는 고통을 더하여 사고팔고(四苦八苦) 라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사람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에 맛보는 고통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보면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는 말씀이 반복되는 것과 "그대로 되니라"는 말씀도 반복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만물들이 창조되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만물들이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안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만물 가운데 유독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제 마음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면서 하나님의 계획과 그 뜻에 거역하고 말았습니다.
사도바울은 이러한 사실을 가리켜,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1:23) 고 하였습니다.
그야말로 호세아 시대의 사람들의 모습을 그대로 눈앞에서 보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시는 하나님이야말로 고통에 고통을 더하셨습니다.
2. 여러분! 인간이 스스로의 죄로 말미암아 당하는 그 고통과, 죄 때문에 인간이 당하는 고통을 지켜보고 계시면서, 그 죄의 결과는 영원한 고통과 저주임을 아시고 계시는 하나님과 사이에서 과연 어느 쪽이 더 많은 고통과 아픔을 당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혹시 잘 모르신다면, 인간을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사고팔고(四苦八苦) 의 고통에서 건지시려고 아들을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게 만드신 하나님의 모습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두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이 당하시는 고통이, 우리가 당하는 고통보다 더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는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분의 형상 곧, 지, 정, 의를 따라 만들어진 존재이기 때문에 다른 만물들과는 달리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는 밀접하게 통하는 감정과 의지와 지적 요소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분은 우리를 잘 알고 계시며 또한 우리도 하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분은 독생자까지 십자가에 내어 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 또한 그 분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함이 마땅한데, 그런데 이런 관계를 무엇이 깨트리고 파괴했습니까?
우리의 죄가 가장 귀한 관계를 깨트리고 말았습니다.
세상 가운데 죄가 들어오면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심각한 상태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인간의 죄는 죄를 지은 당사자만 고통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고통을 주며, 이것을 지켜보시는 하나님도 고통 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3. 세상에 죄가 들어온 이후로 사실 인간의 모든 행위며 삶 자체가 다 고통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자식을 낳으면 기쁨이 충만하지만, 그 기쁨과 자랑은 잠시일 뿐, 보호하고 양육하고 사랑을 쏟는 모든 행위는 전부 고통이 동반하기 마련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이별의 슬픔도 피해 갈 수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가 호세아서를 보면 우리 때문에 당하시는 하나님의 고통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분명하게 자각해야 하는 것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내게 있는 문제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관계의 불신감에서 시작하여, 세상에 만연해진 향락적인 삶이며, 빈부의 격차나 정치적인 대립과 갈등, 그리고 교회 안에 만연해진 종교적 다원주의와 세속주의, 형식주의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현실 속에서 무엇이 문제이며, 이런 문제는 어디서 시작되었으며 어떻게 하면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이렇게 고민하고 갈등하면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 도움을 구하는 것이 이 시대에 우리가 받은 사명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이고, 우리의 삶에 대하여 이 시대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며 우리는 그기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문제에 대하여 생각도 하지 못하고 관심도 주지 않으며, 교회 안에서 조차 이런 사실을 말하지 않는데, 왜 우리는 이런 문제를 가지고 고민해야 합니까?
4. 이유는 본문 14절 끝에 보니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망한" 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깨달아야 합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백성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본문에서 더 거슬러 올라가보면, 선지자 호세아가 고멜과의 사이에서 자식을 낳았지만 그 결과는 기쁨이 아니라 참담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도 용서도 없으며(1:6), 심지어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1:9) 이라 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든 원인은 4:1절에 보니, 이스라엘 가운데 진실도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떠난 죄, 곧 하나을 버린 죄에 더하여 우상숭배와 도덕적인 타락입니다.
호세아 시대는 여로보암 2세의 경제적인 번영과 평화를 마지막으로, 시간이 가면 갈수록 국가가 점점 기울어지면서 멸망으로 치닫고 있었던 시대였습니다.
번영과 평화가 도리어 너무나 많은 부작용을 낳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 첫 번째의 부작용이 종교적인 타락현상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은 나무로 만든 우상에게 계시를 구하고 있었고, 11-12절에 보니 이교도들이 맛보는 정욕에 함께 빠져 그 마음이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이방인의 신이 준 것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도적질 하여 이방 우상에게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보다 우상 앞에서 음행하는 것을 더 즐거워했습니다.
그 결과는 그들의 자식들이 음행과 간음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성적으로 타락하고 도덕적인 불감증에 빠지고 만 것입니다.
5. 그런데 12절의, "음란한 마음에 미혹이 되" 었다는 이 말은, 음란으로 가득한 영에 사로잡힌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13-14절에서 자녀들이 다 음란으로 충만한 더러운 영의 노예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믿음의 사람이 성령에 충만하여 그 분의 인도를 받듯이, 하나님을 떠나 세상과 짝하는 사람들도 제 정신으로 세상을 사랑하고 악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악령에 사로 잡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일을 즐거움으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콤플렉스가 있습니다.
이 콤플렉스라는 단어는 심리학의 용어로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열등감입니다.
그런데 이 콤플렉스라는 장벽을 뛰어넘으면 도리어 이것으로 창조적인 힘을 발휘하여 인생을 더욱 아름답고 가치 있는 존재로 만들 수 있지만, 반대로 이것을 극복하지 못하게 되면 매우 부정적인 힘으로 작용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인생에 좌절과 고통으로 평생을 어두운 그림자 속에 스스로 숨어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신앙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삶의 모든 환경과 조건이 항상 하나님을 잘 섬기고 축복받은 사람으로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여러 가지의 시험과 감당하기 힘든 난관들이 장애물처럼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이런 것을 넘어갈 때 영적으로나 육신적으로나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가리켜 히브리인이라고 하는데, 히브리라는 말이 건너온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애급에서나 팔레스틴에서 사실 이방인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이런 열등감이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그 땅의 신인, 우상을 섬기도록 만들었습니다.
종교적인 변신으로 그 땅 사람들과의 동화를 시도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 이스라엘은 영적으로도 하나님을 떠난 음녀가 되었고, 육신적으로 이방인의 풍습에 빠져 성적, 도덕적인 타락에 빠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6.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의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자신들의 행위에 대하여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징벌이나 심판이 없을 때 더욱 심화되는 현상입니다.
말씀을 가까지 하지 못하니 깨닫는 기회가 없고, 깨달음이 없기 때문에 자신들의 생각과 행위에 대하여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인간 스스로에게는 죄를 이길 만한 힘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는 더 많은 유혹과 쾌락을 요구하게 되며, 그 결과는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길 뿐입니다.
이렇게 죄는 하나님을 떠나게 만들고, 죄는 깨닫는 영을 죽이며, 죄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저들은 광야에서 자기들을 축복하시고 인도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과거의 하나님으로 만들었고, 가나안 땅에서는 가나안인들이 섬기는 신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그 땅을 풍요롭게 만드는 바알이나 아세라 신을 섬기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계명과 율법으로 이스라엘을 불편하게 만들지만, 이 땅의 신들은 우리에게 즐거움과 풍요로움과 쾌락을 준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부자들은 하루하루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살아가는 가난한 자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사치와 향락으로 불평등과 부정을 만연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을 부끄러워하기 보다는 오히려 자랑으로 삼았습니다.
이런 것이 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죄 짓는 일에 용기를 내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은 이런 도덕적인 타락이었습니다.
7.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14절에 보니 그들이 음란과 간음을 행하여도 하나님은 결코 그들을 벌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그들의 악한 행위를 모른 척 하시거나 눈 감아 버리겠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그들의 고집이 워낙 강하여 암소처럼 완강하기 때문에 타협하신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그들과 그들의 자녀들이 도덕적으로 부패한 것, 특히 소돔성에서 일어난 사건처럼, 성적으로 타락해버린 것 자체가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부끄러운 일을 행하면서도 그것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같은 참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롬1:24) 고 하면서,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1:27) 다고 했습니다.
깨닫지 못하고 계속해서 죄 가운데 빠진 것과 그 죄에 대한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은 소돔성의 사람들이 받은 징벌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연약함이 죄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다고 하여도, 그 죄상을 깨닫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8. 하나님은 자신을 버리고 음란하게 우상숭배 하고 있는 이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계속해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시는데, 그가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6:6에 보면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고 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제사 보다는, 그 제사를 받으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먼저 알기 원한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어떤 존재이며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도 못한다면 진정한 사귐이나 사랑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죄악은 모든 것을 불태우고 망가뜨리며 영원한 죽음을 가져올 정도로 엄청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죄악과 죽음도 따라 오지 못할 정도로 더 크고 엄청난 것이 무엇입니까?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죄가 너무 크고 무거워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고 용서를 구할 수 없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선지자 호세아가 외치는 내용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끊임이 없고 변함이 없는 영원한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에게 소망을 주는 것은, 죄의 세력보다 더 큰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외치기를,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븥듯 하도다"(11:8) 고 하였고, 계속해서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할"(9) 것이라 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이스라엘은 물론 오늘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9. 하나님을 떠난 죄인이 세상의 어떤 즐거움과 쾌락을 누린다고 하여도 만족이 없습니다.
왜냐면 참 목자, 참 주인, 참 사랑의 아버지 품안에서 떠나버리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에게 필요한 것은 그 어떤 죄도 다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요, 그 분을 향하여 돌아가는 것입니다.
내게 사랑의 손을 먼저 내 밀어 주시고, 어둠 속에 숨어 있는 나를 먼저 찾아 오셔서 용서하시고 위로해 주시고 소망을 주시는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죄를 버리고, 죄가 주는 고통과 저주의 묶임에서 해방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깨닫고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죄 가운데서 일어나서 돌아서는 순간, 우리 가운데 자리 잡은 죄의 세력은 힘을 잃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은 다시 우리 안에서 강물처럼 흐르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고 하였습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가운데 오셨고, 십자를 통해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우리를 부끄러움이 없는 영원한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삼으신 줄 믿습니다.

